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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버릴 수치심 가질 수치심>의 줄거리:
수치심(羞恥心)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느끼는 마음으로, 자신의 약점이나 잘못 또는 무가치함이 남들 앞에서 탄로 되었다고 느낄 때 일어나는 감정이지요. 그러나 긍정적인 면은 다른 사람 앞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 앞에서 가질 경우 더 나은 나를 지향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그래서 수치심은 함정일 수도, 자극일 수도 있습니다.
버릴 수치심 가질 수치심
(스바냐 2장 1절~15절)
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버릴 수치심 가질 수치심>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버릴 수치심 가질 수치심’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 수치심을 느끼십니까?
몸매 때문에 수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연예기획사에 심부름을 가게 되었는데 무심코 들어가니 탤런트와 모델과 가수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앞에 서니 자신의 몸매가 너무 비교되어서 수치심을 느낍니다. 혹은 좋아하는 이성 앞에서 몸매 때문에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입장이라면 아이가 공부를 못하는 것이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승진이 안 되거나 남들보다 학벌이 낮고 연봉이 적은 것이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수치심을 느끼는 자신이 수치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학벌이 좀 떨어져도 몸매가 좀 떨어져도 당당하면 아무렇지도 않을 것을 끝내 그렇지 못한 자신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수치심에 대한 TED 강연을 통해 일약 스타가 된 브레네 브라운(Brene Brown)이라는 교수가 있습니다. 이분의 저서 중에 “수치심 권하는 사회”를 보면 문화와 사회가 우리에게 수치심을 가르치고 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고 하면 안 되는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정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을 거울삼아 나를 볼 때에 수치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세상은 완벽한 몸매가 능력이고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봉이 높아야 잘 나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조건에 도달하지 못하면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특히 같은 기준을 공유하는 집단 안에서는 수치심이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저자는 수치심을 자신감으로 바꾸라고 제안합니다. 이른바 수치심 회복 탄력성입니다. 수치심을 일종의 병으로 보고 정상적 마음 상태로의 회복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 가지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중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수치심으로부터 피하기보다는 수치심이 촉발되는 이유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수치심에 맞서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변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치심과 관련하여 본문 스바냐서 2장 말씀을 살펴보면 브레네 브라운 교수와는 상반되는 관점의 언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라고 합니다. 브레네 브라운 박사는 수치심을 치유되어야 할 병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스바냐 선지자는 수치심을 모르는 것을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선민만을 대상으로 한 문제제기는 아니었습니다. 1절 말씀에서 백성이란 남 왕국 유다의 서쪽에 있는 블레셋, 동쪽에 있는 모압과 암몬, 남쪽의 구스, 북쪽의 앗수르를 비롯한 만백성을 일컫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수치를 모르는 자들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사회적으로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던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스바냐 선지자는 수치를 알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브레네 브라운 교수는 수치심 극복을 위한 네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것은 오히려 마음에 부담만 되는 율법적 조항에 가깝습니다. 이 말대로 할 수도 없고 한다고 해서 수치심이 극복되지도 않습니다. 희망을 불어넣어 줄 수는 있으나 희망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수치심을 극복하는 것은 수치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몸매, 연봉, 학벌, 자녀 때문에 수치심을 느낄 때에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다른 수치심을 갖는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가지라고 한 올바른 수치심을 가질 때에만 세상이 주는 모든 수치심을 극복하고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수치심에는 가져야 될 수치심과 버려야 될 수치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버려야 될 수치심은 가져야만 할 수치심을 가질 때에 버릴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날’은 바로 1장에서 언급했던 여호와의 날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임하게 되면 인생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끝나게 될 터인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생으로 판명나기 전에 말씀을 듣고 올바른 수치심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수치심이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로 “닉사프”로써 부끄러워하다, 사모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곧 내가 열망하고 간절히 갖고 싶어 하는 것이 수치를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브레네 브라운 교수의 지적은 타당합니다. 몸매로 인해 수치심을 느끼는 이유는 아름다운 몸매를 열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봉이 적아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연봉이 늘어나기를 열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스바냐 선지자가 말하고자하는 올바른 수치심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공감하고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수치심과는 다른 수치심입니다. 이 수치심은 바로 여호와의 날과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여호와의 날을 종말에 나타나는 것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 여호와의 날이 신약성경에서는 ‘주의 날’로 바뀌지만 그 기본 정신은 동일합니다. 이 여호와의 날은 모든 인류 각자에게 하나님이 일대일로 대면하시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으로써 모든 개인과 대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동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았기 때문에 외면했던 하나님을 더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한 분을 제외한 어떤 대상에게도 관심을 쏟을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날이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시는 날입니다. 이 날에는 누구도 배우자나 가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없고, 차원을 달리해서 UN의 국제문제나 당면한 외교현안일지라도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말기 암 환자조차도 여호와의 날에는 자신의 건강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날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수치심의 의미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돈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돈이 없는 사람은 수치심을 느낄 것입니다. 골프 클럽에서는 3~4년이 지나도 실력이 늘지 않아서 싱글로 진입하지 못할 때에 수치심을 느낄 것입니다. 자동차 면허시험장에서는 시험을 볼 때마다 낙방할 때에 수치심을 느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날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해본 적이 없는 것을 수치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만으로 기쁨을 얻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없는 것이 가장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수치는 곧 기쁘고 만족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몸매, 연봉, 자녀의 형통, 학벌 등이 수치의 이유가 되는 사회가 이러한 대상들을 기쁨과 만족의 이유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본래 매일 매일을 여호와의 날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하루라도 하나님을 벌지 못했고 갖지 못했다면 그것을 수치로 여기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사람들은 보고 듣고 만져지는 세상 것들 가운데서 기쁨과 만족의 이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은 사람들을 대단하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맨 주먹으로 시작해서 재벌이 된 사람은 자서전을 쓰고 강연을 다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해줄 것이고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하나님을 갖지 못했다면 여호와의 날에 자타가 공인하는 자부심이 크면 클수록 수치심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한다면 재벌이 되었다고 자부심을 느끼고 몸매가 좋다고 거드름을 피웠던 것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재벌이 된 사람도 이처럼 수치스러울진대, 재벌이 돼보겠다고 평생 돈을 좇아 산 사람은 수치심을 느낄 대상을 갖지도 못한 채 평생을 허비했으니 그 수치심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6~37절에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배우자로 인해 고민합니다. 배우자가 좋아서 자랑스러워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불평합니다. 그러나 배우자가 만족스럽든지 불만스럽든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대면한다면 배우자에게 그렇게 관심을 두었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찾지 않고 배우자에게 기대하거나 불평을 했는지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수치심입니다.
이런 수치심은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한 관심의 대상이 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좋으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대면해서 좋으심을 느끼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세상에서 잘되기를 약간이나마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대면하고서도 세상에서 얻었던 박사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면 이 사람 또한 천국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천국을 느끼기 위해 주기도를 통해 십자가 생활화를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러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기가 막히게 좋다고 여기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순간 의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좋아했던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스바냐 선지자의 예언이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창피와 굴욕을 당하려고 하나님 앞에서 수치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과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33살인 한창 나이임에도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다면 솔로몬보다 더 큰 부자가 되실 수도 있었고, 찬하의 석학들이 울고 갈 정도의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실 수도 있었고, 원대한 철학사상을 퍼뜨리시며 수천수만의 제자들을 거느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한류열풍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인기를 끄시다가 아무 미련 없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도 천국에 대해 그렇게 간구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칼로 무 자르듯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부활하신 뒤에는 40일간 제자들을 모으시고 승천을 드러내시기 위해 활동하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칭기즈칸처럼 정복을 하셨던 것도 아니셨고 빌게이츠처럼 돈을 벌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인슈타인처럼 세상을 뒤집을만한 학문적 이론을 내놓지도 않으셨고, 한류스타들처럼 인기를 끌어보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대형교회 목사님처럼 초대형 목회를 하려고도 하지 않으시고 곧장 이 세상을 등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천국을 간구해야 되는 이유가 됩니다. 온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 33살의 한창 때에 일말의 미련도 없이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께로 향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존재인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 하나님을 벌기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관심의 대상이 되실 때에 우리는 올바른 수치심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벌지 못한 모든 사람이 느낄 수치심을 앞당겨서 느끼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원동력이 됩니다.
1절의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라는 스바냐 선지자의 호소는 단지 나무라기 위함이 아닙니다. 부디 매일 매일을 여호와의 날로 삼으라는 권유입니다. 정작 종말이 온다면 때는 늦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지지 못함으로 생겨난 수치심은 영원히 지속될 뿐이지 극복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미리 종말 때의 수치심을 회복하여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성전의 상번제 어린양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으라는 것입니다.
열망하는데 주어지지 않을 때에 수치심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열망과 소원과 간절함이 생길 때마다 그 자체가 수치임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돈이 없어서 돈에 대한 열망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에게 속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결핍되어 있는 것을 돈의 결핍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이 없기 때문에 건강에 대한 열망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아파도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는 건강에 대한 열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경험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면 병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벌기 위해서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죽지 않으면 하나님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갖지 못하면 스바냐 선지자의 말대로 수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못 가졌음에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세상의 수치심에 노예가 되어서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겨난 수치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 수치심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 죽게 하고 하나님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영원토록 하나님을 가져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하나님을 가져야 할까요? 바로 인간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들에 의해서 어떠한 수치심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될 때까지 하나님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얼마나 벌어야 하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입니다.
천국은 매일 매일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이 천국이 지금 우리의 삶에서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을 여호와의 날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 이외의 모든 대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열망하고 싶은 세상의 모든 대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이 세상 안에서는 어떠한 열망도 생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버는데 주력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함으로써 이 세상 것이 없어서 느끼는 모든 수치심을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이 없는 수치심을 앞당겨 느끼면서 하나님 벌기에 총력을 기울이는 삶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세상을 향해 열망하는 수치스러운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만큼이라도 하나님을 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