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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寧成氏는 王族인가?
[국조문헌비고(國祖文獻備考)]에 따르면, "성(成)씨는 주문왕(周文王)의 일곱째 아들인 성(郕)나라 숙무(叔武)의 후손이다. 자손들로 인하여 나라를 氏로삼았는데 뒤에 초(楚)나라에게 멸망되자 고을 읍(邑)을 떼고 成氏가 되었다. 시조인보의 아버지는 숙정(叔正)으로 신라때 대관을 지낸 성저(成貯)의 후손이다."라고 했고, [승인무학전(僧人無學傳)]에 따르면, "당나라 때에 학사(學士) 성경(成鏡)이 있었는데 상곡(上谷) 사람으로서 동쪽 조선(朝鮮)으로 건너왔다. 그후 백제에는 성충(成忠)이 있었고 신라에는 성저(成貯)가 있었는데 모두 절의 또는 관벌로 한 시대에 드러났다. 고려때에 휘(諱) 숙창(淑昌)이란 분이 계셨는데 벼슬은 호장부정(戶長副正)이었다. 호장부정(戶長副正)이란 바로 옛날의 원외랑(員外郞:正六品-左,右 正言, 拾遺, 補闕, 獻納, 尙衣奉御 등)인데 이분이 휘(諱) 인보(仁輔)를 낳으시니 벼슬은 중윤호장(中尹戶長)이었다."라고 적혀있다.
먼저 [국조문헌비고(國祖文獻備考)]부터 검토하자, [제왕세기(帝王世紀)]에 따르면 "문왕(文王)의 처인 태사(太姒)가 백읍고(伯邑考)를 낳고, 다음으로 무왕발(武王發), 관숙선(管叔鮮), 채숙도(蔡叔度), 성숙무(郕叔武), 곽숙처(霍叔處), 주공단(周公旦), 조숙진탁(曹叔振鐸), 강숙봉(康叔封), 담계재(聃季載) 를 낳았다"고 하며, [사기-관체세가(史记-管蔡世家)]에 따르면 "무왕(武王)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10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태사(太姒)라고 했다。문왕(文王)의 정비(正妃)이다. 그 장자가 백읍고(伯邑考), 다음이 무왕발(武王发), 관숙선(管叔鲜), 주공단(周公旦), 채숙도(蔡叔度), 조숙진탁(曹叔振铎), 성숙무(成叔武), 곽숙처(霍叔处), 강숙봉(康叔封), 염계재(冉季载)이다. 염계재가 가장 어렸다."다고 하여 숙무가 문왕의 일곱째 또는 다섯째로 기록하고 있다. [국조문헌비고]에서는 [사기]의 내용을 따라서 기록한것으로 보이며, 숙무는 무왕의 친동생인것이 확실하다. 숙무는 본래 주족처럼 희씨(姬氏)였으며, 자(字)는 광숙(邝叔)이고, 백작(伯爵)이었기때문에 성백(郕伯)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그림1:郕나라 伯爵 姬叔武>
다음으로 주나라의 종족특성을 살펴보자. [맹자(孟子)]에서는 주문왕을 서이(西夷)사람이라고 적었고, [사기(史記)]에서는 그 선조가 유태씨(有邰氏)의 딸 강원(姜嫄)의 아들 후직(后稷)이라고 했다. 유태씨는 동이족의 조상인 염제열산씨(炎帝烈山氏)의 후예라 한다. 곧, 주족(周族)은 부계는 서이이고, 모계는 동이로 생각된다. 동이의 홍산문화(紅山文化)와 서이의 감숙성(甘肅省)유적은 모두 몽골을 거쳐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부근에서 시작되었다. 또, 후직의 증손 공유(公劉)는 종족들을 이끌고 흉노(匈奴)의 전신인 융적(戎狄)들 땅으로 유랑하여 그 뒤로 8대 300여년 동안 융적의 풍습을 따라 그들과 이목생활을 했다고 한다. 300여년을 흉노풍습을 따랐다는 것이다. 공유의 9세손 고공단보(古公亶父)때부터 정착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고공단보는 뒤에 주나라 태왕(周太王)이라 추존되었고, 그 손자가 주나라 문왕(周文王) 곧, 서백(西伯) 창(昌)이다.
이번에는 성나라의 위치를 살펴보자. [사기-관체세가]의 기록에 따르면, "성숙무(成叔武)는 문왕의 아들이며, 무왕의 동생으로서, 무왕이 은나라를 멸한 후 성(成)에 봉해졌다. 成은 郕, 盛으로도 표기하는데, 동한(东汉)시대 성양현(郕阳县)을 옛날의 성백(郕伯)의 나라라고 했다. 지금에 산동성(山东省) 범현(范县) 근방이다."라고 했고, [백가성(百家姓)]에서는 이곳을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녕양현(寧陽縣) 동북지방으로 고증하고 있다. 지도에서 Cheng이라고 표시된 나라이다. 강태공(姜太公)의 제(齊:Qi)나라와 주공단(周公旦)의 노(魯:Lu)나라 사이에 위치했었다.
성나라는 서주시대 말기쯤에 초(楚:Chu)나라에게 멸망되고, 이후 성씨들은 뚜렷한 근거지 없이 생활하였다. 한무제(漢武帝)때 [사기(史記)]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에 성기(成己)라는 대신(大臣)이 있었다고 하고 [북량록(北凉錄)]에는 같은 시기에 옛 흉노부락 도격족(屠格族)에도 성씨가 분포했다고 하여 중국변방으로 진출했음을 시사한다. 도격족이란 흉노 휴도부(休屠部)를 말하며, 감숙성 북부에 있던 흉노족이다. 그러나 성씨가 번창하게 된 것은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시기에 이르러서 인데, 각각 하북회래(河北懷來)와 하남복양(河南濮陽)에 큰 취락을 형성하고 살았는데, 회래지역 성씨들이 상곡군망(上谷郡望)을 형성하게 된다. 백가성(百家姓)에는 상곡군만을 언급했는데, 복양지역 성씨들은 동군군망(東郡郡望)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승인무학전(僧人無學傳)]에 따르면 우리나라로 건너온 성경(成鏡)이란 학사가 상곡인(上谷人)이므로 상곡군망만을 살펴보자.
[백가성(百家姓)]에 기록된 "상곡군(Shanggu)"은 진시황(秦始皇)의 통일군제(统一郡制)로서, 성씨(成氏)가 속했던 상곡군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张家口)인데, 작은 오대산(小五台山) 동쪽, 적성(赤城)과 북경시 연경현(延庆县) 서쪽, 만리장성 안쪽(內長城)과 북경시 창평현(昌平县) 북쪽에 이르는 곳으로 가칭 "상곡군"이라 했다고 한다. 북위(北魏)는 잘 알려진 바와같이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나라였다. 성씨가 번창한 때는 공교롭게도 이 시기였다. 선비족은 수당(隨唐)시대를 거쳐 대부분 한화되어 없어진 종족들이다. [백가성]이 편찬된 시기가 북송(北宋)때이니까 아마도 남북조시기부터 북송시대에 걸쳐서 성씨들은 상곡에 모여살았나보다. 성경은 당나라때 우리나라로 건너온다. 박시인님의 [알타이神話]에서는 상곡은 우리나라말 '수리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섬서성 북부인 상군(上郡:Shang)도 '수리고을'로서 같은 의미라고 했다. 흉노가 강성하던 시절 선우(單于)는 용성(蘢城:Longcheng)에 있고, 태자인 좌현왕(左賢王)은 상곡에, 우현왕(右賢王)은 상군에 거처했다고 한다. 용성은 몽골의 흐슈 차이담(Хєшєє Цайдам)근방에 위치했다. <지도1:西周시대 郕, 지도2:秦나라때 上谷>
[승인무학전]에서는 성충(成忠)이라는 인물이 성씨였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성충이 백제의 좌평(佐平)까지 올랐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성충은 백제의 중앙귀족 8대성에 들어가지 않는 데도 좌평에 올랐다. 아마도 왕족과 혼인을 한 성씨가 있었음을 추측해 본다. 혹은 신채호선생의 말대로 성충은 그냥 이름이고 본래 왕족인 부여씨(扶餘氏)일수도 있다! 오늘날 백제 8대성 중 진씨(眞氏)가 남아있는데, 진씨 역시 본래 중국의 하북성 상곡에서 기출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에 서산진씨(西山眞氏)가 단본이라고 한다. [승인무학전]에서는 또 성저(成貯)라는 인물도 성씨였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창녕성씨 시조 諱인보(仁輔)의 아버지는 신라 대관 저(貯)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신라가 백제를 병합한 뒤에 생존했던 인물로 생각된다.
끝으로 족보가 숭상되었던 시기가 조선시대에 와서이고 그전의 세계는 고증하기가 까다롭다는 것이 사실이다 보니 성충, 성저에서 어떻게 창녕성씨가 연계되는 지는 밝혀질 가능성이 적다. 그저 상곡인 성경이후로 한반도에 성씨가 있게 되었고, 창녕성씨는 그 중에서 명맥을 유지한 유일한 성씨(成氏)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만주족(滿州族), 몽고족(蒙古族), 조선족(朝鮮族)에게도 成氏가 있으며, 중국에는 길림성씨(吉林成氏)를 비롯해 다수의 성씨본이 존재하지만 한국에는 창녕성씨(昌寧成氏)가 단일본이다. ,,,,,,,,,,,,,,,,,,,,,,,,,,,,,,,,,,,,,,,,,,,,,,,,,,,,,,,,,,,,,,,,,,,,,,,,,,,,,,,,,,,,,,,,,,,,,,,,,,,,,,,,,,,,,,,,,,,,,,,,,,,,,,,,,,,,,,,,, 위와 같은 기록(記錄)들이 있으나 우리 창녕성씨(昌寧成氏)는 동방(東方)의 대족이며 고려중엽(高麗中葉) 이후에 일어났는데 중윤공(中尹公) 휘(諱) 인보(仁輔)가 시조(始祖)로 상계(上系)는 상고(詳考)할 길이 없고 고증(考證)할 사료(史料)가 없어 계축보(癸丑譜) 창제(創制)할 때 중윤공(中尹公) 휘(諱) 인보(仁輔)를 시조(始祖)로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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