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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안>
제목: 마지막 날에
일자: 2023년 6월 4일 주일
[사도행전 2:16~21]
설교 목적:
베드로는 자신이 마지막 날을 살고 있다고 확신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확신했다. 왜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개념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본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모든 육체에게 성령이 부어지고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청년들은 환상을 보며,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오순절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내 입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판타지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를 새롭게 비추어 준다. 지난 주일은 성령강림절이었으므로 이 주제를 생각해 보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하다.
설교 개요
1. 우리는 말세를 살고 있는가?
2. 사도들은 왜 자신들이 말세에 있다고 생각했는가?
3.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어떤 의미인가?
4. 요엘의 예언은 성령운동을 지지하는가?
5. 요엘의 예언은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1. 우리는 말세를 살고 있는가?
우리 기독교인들은 말세라는 말에 익숙합니다. 종말과 말세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가 말세이며 종말인 이유는 그 때 주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문명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의미로서 우리는 종말 또는 말세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늘 깨어 그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가르침이 기독교회 안에서 지금껏 통용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말세와 관련하여 특이한 것은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는 단어입니다. 말세의 끝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까닭은 초기교회 때부터 말세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난 2,000년간 말세였습니다. 신자들은 왜 말세가 이렇게 긴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한 영혼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시기에 세상의 종말을 연기하시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듣습니다.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말세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이제 도리어 말세라는 말의 의미를 퇴색하게 한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제 말세라는 말을 하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말세나 종말에 대하여 강조하는 사람들은 광신자들이거나 아니면 신앙에 대하여 편집증적 집착을 보이는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과연 말세를 살고 있는 걸까요? 세상의 종말은 다가오고 있기나 하는 걸까요? 이렇게 어떤 말이나 개념이 희미해질 때는 그 원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무슨 뜻일까?’
2. 사도들은 왜 자신들이 말세에 있다고 생각했는가?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이 자신들이 말세를 살고 있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말세에 대하여 사도들이 말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사도 베드로가 한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 베드로전서 1:5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 베드로전서 1:20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베드로전서 4:7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를 받아볼 사람들에게 지금이 말세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이 말세이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러므로 이제 곧 말세가 되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므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들을 일깨우기 위하여 사도 베드로가 편지를 보내는 핵심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세에 대하여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 고린도전서 10:1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 디모데후서 3:1, 5
사도 바울도 서신에서 자신과 교회가 지금 말세를 만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가 되면 일어날 잘못된 일들을 설명하면서 지금 그런 일에 가담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바로 말세를 살고 있으며 그런 종말적 현상이 이미 세상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디모데에게 거기에 미혹되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말세 신앙’은 사도 바울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빌립보서 4:5, 공동번역개정판
사도 야고보의 글에는 말세 신앙이 얼마나 실제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강한 권면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 야고보서 5:3
이렇게 많은 구절들을 접하다 보면 말세신앙을 갖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도들이 말세신앙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이니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늘 종말에 대한 기대와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야.’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에는 이런 질문이 솟아납니다. ‘그런데 왜 말세는 이렇게 긴거야?’
그래서 우리는 초대교회가 말세라고 표현한 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무엇이고 사도들은 왜 자신들이 말세를 살고 있다고 확신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 보겠습니다.
3.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어떤 의미인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계속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끝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살펴보고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 끝에 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신 곳은 마태복음 24장입니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 마태복음 24:3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한 것은 말세가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보이시면서 그 성전이 철저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기 위해서 택하신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믿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시는 것이며 세상이 끝나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이 임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 말세가 언제쯤이 되겠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말세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하게 되는 때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24장을 읽어보면 말세에 대한 징조와 현상들은 모두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34절)고 확증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세상의 끝날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하는 날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의미에 대한 중요한 단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자기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입니다. 그것은 예언자들이 전해준 말씀 속에 자주 나타납니다. 예언자들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경고하기를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날에 어떤 재앙이 임할지를 그림언어로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이 예언자들의 메시지였습니다.
그 중에 몇 구절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 이사야 2:12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 요엘 1:15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 스바냐 1:14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 요엘 2:31
이 구절들은 모두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는 예언자들의 메시지입니다. 예언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주님이 오셔서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성경의 전통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시대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며 주관하신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하나님이 속히 갚아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볼 때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무리 찬란하다 하더라도 거짓과 죄악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아침 안개와 같이 스러질 것이라는 판단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처럼 이 세상과 이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으며 하나님이 속히 오셔서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믿음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습니다. 신실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노아의 시대에 세상을 어떻게 심판하셨는지와 애굽에 대하여 어떤 재앙을 내리셨는지를 분명하게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말세신앙은 자기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말임이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예언자들도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으며, 예수님은 물론 초대교회의 사도들도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말세와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그것은 당연한 신앙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이 성경을 제대로 배우고 믿는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물론 이 당연한 믿음과 기대 때문에 성도들은 거짓된 세상에서 진실하게 살며, 폭력과 착취가 난무한 세상에서 나누고 베풀면서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속히 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기 때문에 고난도 역경도 참았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종말신앙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창세 이후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신앙이며 그들의 신앙이 진실됨을 드러내는 가장 명확한 증표가 될 것입니다.
4. 요엘의 예언은 성령운동을 지지하는가?
말세에 대한 개념이 이렇게 정리되었다면 이제 ‘마지막 날’에 대한 요엘의 예언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지막 날에 대한 요엘의 예언은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날 설교에서 인용하여 더욱 유명해진 구절입니다. 특히 우리 교회가 속한 오순절 신앙인들은 이 구절을 노래로 만들어 자주 부를 정도로 이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습니다: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2:16~21
여기서부터 ‘마지막 날에’라는 노래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기 원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리라는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구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 과연 성령의 충만을 주신다는 약속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특히 여기에 나오는 마지막 날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말세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엘이 말하는 마지막 날은 말세(末世)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어그러진 모습을 바로잡으시는 날이며, 그 날은 여호와의 날이며 주의 크고 두려운 날입니다. 그 날은 심판의 날이며 동시에 구원의 날입니다. 악인들에게는 멸망의 형벌이 내릴 것이며 의인들에게는 칭찬과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날이 중요한 이유는 그 날은 세상이 새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일어나시는 그 날에 세상이 새롭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이사야 65:17). 그리고 그렇게 열리는 새로운 세상은 현재의 모습과는 매우 다를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그려준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로 그처럼 완벽한 모습입니다. 그 몇 가지 예를 보여주는 본문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 이사야 65:25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6~9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 36:26~28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요엘 2:28~29
이 구절들은 모두 하나님이 만드시는 새로운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를 그려주는 그림언어입니다. 그것은 상함과 해함이 없는 공존과 상생의 세상입니다. 이것은 학대와 착취라는 어그러진 모습이 바로잡힌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만드시는 새로운 세상에서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도 않는 어그러진 모습이 바로잡힌 것입니다. 또한 완악한 마음이 바로잡혀 부드러운 마음으로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만인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며 그 수준은 마치 예언자들이 성령에 감동되어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며 꿈을 꾸듯이 어린아이나 청년, 그리고 노년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정통하게 알게 되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요엘 예언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새로운 세상과 새 시대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종말에 완성하실 세상의 모습입니다. 결국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그 모습이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침내 그렇게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을 들으면서 상함도 해함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꿉니다. 우리는 또한 온 세상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가득하게 될 날을 소망합니다. 그리고 만인이 하나님의 뜻에 정통하게 될 날을 사모합니다. 그것이 예언자들의 예언에 담겨 있는 희망과 소망입니다.
오순절 신앙인들이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여 성령충만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하여 주신 말씀과 환상들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세상에 대한 청사진이며 판타지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평화와 공생, 공존 그리고 공영의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지식으로 가득찬 세상입니다. 단지 성령충만을 경험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세상에 대한 더 크고 포괄적인 비전에 동참하는 것에 그 예언의 목적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요엘을 비롯한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5. 요엘의 예언은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저는 이 설교의 첫 부분에서 말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말세를 인류 역사에서 단 한번 마지막에 있을 사건으로 이해한다면 말세는 지연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2,000년 전에 예수님과 사도들은 착각을 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세를 자신의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때라고 이해한다면 말세는 언제나 임박한 현실입니다. 말세를 그렇게 정의하고 나면 예수님과 사도들의 표현도 합당한 근거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금이 바로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라’(고후 6:2)고 말한 것은 올바른 말세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주님이 속히 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믿음은 현실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속히 오셔서 모든 것을 보응하시고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세를 단 한번의 사건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지난 2,000년 동안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기다리신 셈이 됩니다. 그리고 아직도 어느 때에 진정한 말세가 올지 아무도 모르는 채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기는 풍조가 자리잡게 됩니다. 사실 이미 우리 기독교 사회 안에는 이런 패배적이고 자조적인 풍조가 만연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부 광신자들은 시한부종말론에 빠져 현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바로잡혀야 할 신앙의 왜곡입니다. 예수께서도 가르치시기를, 때와 기한은 하나님의 소관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을 믿고 우리에게 주어진 본분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증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며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삶과 언행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고 계십니다(요 5:17).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하신 것처럼 독일의 나찌와 히틀러를 심판하셨습니다. 악랄한 공산주의자들이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린 것에 대하여 심판하셨습니다. 아시아에서 여러 나라를 짓밟고 생명을 앗아간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나님은 독재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과 백성들 가운데서 계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감찰하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약자들의 억울한 부르짖음이 하늘에 이를 때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이 있는 곳에 강림하시고 그 세상과 나라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또한 이 세상의 권세자들과 통치자들을 주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심판의 날에는 모든 사람이 함께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바로잡으신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뜻을 가지고 노력합니다. 그들이 그런 노력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른 말세 신앙은 신자들에게 이 세상의 문제에 대하여 더 적극적으로 개선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되게 합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로 세상은 더 공정하게 되고 더 따뜻하게 됩니다. 그것이 말세 신앙이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말세 신앙을 가지면 우리는 지금 임박한 종말 앞에서 살고 있음을 의식합니다.
요엘의 예언에서 두드러진 점은 모든 육체에게 주님의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을 인용한 후에 실제로 하나님의 성령이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도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무리가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로 확대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영이 인종이나 종교, 그리고 국적을 초월하여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유대주의의 폐쇄성을 극복할 때 성령의 감동하심이 필요했던 것처럼 성령의 감동하심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범위를 더 넓게 바라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기독교회는 요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모든 민족과 나라들과 방언들을 불러 한 가족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앞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오순절 교단에 가둘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령은 교파나 종파 또는 교회에 갇히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만물에 생기를 공급하시고 만민을 붙드십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운동이 교리나 전통에 갇힌다면 도리어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는 일에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도리어 교회는 만물을 화목하게 하시고 소생시키시는 성령의 역사에 발맞추어 나갈 수 있도록 교파나 종파를 초월하여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운동은 생명운동이며 화해운동이며 일치운동입니다. 성령운동은 결코 은사운동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비전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새 하늘과 새 땅의 판타지입니다. 그것은 그림언어로 그려진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환상입니다. 그 환상과 비전 때문에 우리는 더 넓게 더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힘을 모아 생명을 살리고 충만하게 하는 일에 나설 수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확신하는 사람마다 주님이 속히 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자신을 바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기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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