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부인 묘에서 2~3km이동하면 성삼문선생 유허지가 나온다
성삼문 선생 유허는 성삼문이 출생한 집터이며, 그의 사후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서원이 건립된 곳이다.
입구 길가에 두 개의 비가 세워져 있다. 하나는 유허비로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노은서원 유허비이다.
이곳은 성삼문(成三問)의 외조부 박첨의 고택이 있던 곳이며, 성삼문이 출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인 이량이 1676년(숙종2년)에 성삼문선생의 옛집 근처에 사당을 세우고 사육신을 같이 모실 것을 소청하자 조정에서 이를 가납하여 녹운서원이란 사액을 받고 매년 12월에 제사를 지냈다.
성삼문 등 육신의 신원과 성승장군 복관이 이 때쯤 이루어졌으니 그와 발맞춰 이루어진 것 같다
1685년(숙종 11)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를 추가 배향하였다.
1687년(숙종 13) 녹운서원 옆에는 별사(別祠)를 건립하여 성승(成勝, 삼문의 아버지)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784년(정조 8)에 성승은 별운검(別雲劒)으로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던 점이 인정되어 신원된 후 제향되었다.
1692년(숙종 18) 조정에서 녹운서원(綠雲書院)이라 명칭하고 사액하였다가 1712년(숙종 38) 노은서원(魯恩書院)으로 개칭하였다.
‘노은’은 민진후(閔鎭厚, 인현왕후 오빠)와 송시열(宋時烈)이 노산(魯山)의 ‘노’자와 은의(恩義)의 ‘은’자를 따서 동네 이름을 노은이라 했던 데에 기인한단다. 역시 서인 노론들은 안 끼는데가 없다 녹운서원이라 사액 받을 때는 기사환국 후 남인정권이 들어선 시기인데 노은서원으로 개칭한 때는 노론정권이 부활한 때이다 서원의 조직을 자기 당의 조직으로 끌어들이고 자신들의 치적을 드러내기 위해 이런 일들을 벌인게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노은서원은 1864년(고종 1)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이래서 세우고 저래서 세운 너무나 많은 서원들 특히 서인들의 서원이 대부분이었다
그 많은 서원들의 권력으로 깡패처럼 조선후기를 자신들의 정치 조직으로 넓혀 자신들의 세상으로 만들어 놓고 나라에 세금도 내지 않은채 일반 백성에게 그 피해를 고스란히 전가하니 이런 조치를 내린 것이다
당시 유생들은 사육신의 위패를 매안한 다음, 그 위에 단을 쌓아 ‘노은단(魯恩檀)’이라 하고, 매년 음력 10월 15일 제향을 올렸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홍성고적현창회에서 삼문을 개축하고 정화하였다.
노은단으로 올랐다
몇 년 전 왔을 땐 이 은행나무 말고도 노은단 앞에 거목이 있어서 더 운치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제 이 나무 한그루 밖에 없다 원래 서원이나 향교 앞에는 공자가 제자들과 행단에서 토론을 한 유래를 들어 은행나무 등을 심었는데 요즘엔 은행 열매의 냄새가 좋지 않고 열매의 쓰임도 보잘 것 없어 베어 버리는 경우가 많아 조금 안타깝다 예전엔 은행열매가 제사에 꼭 쓰여 값도 비쌌는데 물질의 풍요가 이런 문화도 바꾸게 한다
성삼문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으로 개성유후(開城留后) 성석용(成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성달생(成達生)이고,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는 식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1447년에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다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승진하였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했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등과 함께 이를 도왔다.
집현전 학자 중 성삼문 포함 앞 세 사람은 사육신이고 뒤 세 사람은 계유정난 후 공신이 되어 앞 동료들의 처와 자식을 나눠 가지니 참으로 세상사가 개탄스럽기도 하다
특히 성삼문은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 중인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音韻)에 대해 토론하고 질문하는 등 훈민정음 창제에 많은 공을 들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해와 1446년 9월 29일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았다.
공신록에 오른 인물은 수양대군을 포함해 36명이었는데, 성삼문도 정변 당일 집현전에서 숙직하며 근무한 공이 있다 하여 3등공신에 올랐다. 성삼문은 자신의 이름을 공신록에서 삭제해 달라고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가시방석 같은 보위에 앉아 있던 단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내놓고 말았다.
그때 예방승지였던 성삼문은 직무상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갖다 바쳐야 했다. 옥새를 품에 안고 옮기던 성삼문은 그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지 못하고 목 놓아 울고 말았다.
세조가 성삼문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 후에도 성삼문은 절대 세조에게 대군 나으리란 호칭만 썼지 주상이란 호칭을 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종의 유언을 기억하고 있던 집현전의 학자들은 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결국 학자들을 중심으로 단종의 복위가 시도되었다. 이들이 단종 복위에 나선 것은 단종에 대해 충절을 지킨다는 유교적 명분도 있었지만 관료 지배 체제의 구현을 이상으로 삼았기에 세조의 독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기도 했다.
이후 아버지 성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박팽년·유응부(兪應孚)·허조(許慥)·권자신(權自愼)·이개·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성삼문은 거사일 전날에 집현전에서 비밀 회의를 열고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박쟁(朴崝) 등 무신들에게는 세조와 윤사로(尹師路)·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를, 병조정랑 윤영손(尹鈴孫)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들이 나누어 제거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김질(金礩)에게는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으로 하여금 상왕 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를 한명회가 제의 해 별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어 거사는 일단 중지되었다. 이에 거사는 세조가 친히 거동하는 관가(觀稼: 임금이 봄에 권농하기 위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던 행사) 때로 미루어졌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성삼문은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 종친에 대한 호칭)’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그는 달군 쇠로 다리의 살이 뚫리고 팔이 잘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와 신숙주의 불충(不忠)을 꾸짖는 기개를 보였다. 세조는 더 이상 취조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며 모두 능지처참할 것을 명했다.
박팽년은 형장에 가기도 전에 감옥에서 죽었고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중림, 김문기, 박쟁(朴崝) 등은 능지처참되었다. 체포되기 전에 가족과 함께 자결한 유성원을 포함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이개를 사육신(死六臣)이라고 부른다(김문기를 포함하여 사칠신이라고도 한다).
이들 중 특히 성삼문은 아버지가 주모자 중 한 사람이었기에 삼족이 몰살되는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처형된 사람들의 시신은 사지가 절단되어 형장에 그대로 버려졌고 잘린 목은 효수되었다.
아버지 성승을 비롯하여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어 혈손이 끊기고 아내와 딸은 관비(官婢)가 되었으며, 가산은 몰수되었다.
그나마 그들의 의리에 감복한 사람들에 의해 신체의 일부가 거두어져 노량진 변에 묻혔다.
일설에는 시신을 거두는 자는 역시 엄중 처벌하겠다는 명에 따라 모두들 꺼리는데 김시습 만이 그 시신을 거둬 노량진에 매장하고 세상을 등져 방랑의 세월을 보냈다고 전해온다
형을 당한 뒤 성삼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성삼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節臣: 절개를 지킨 신하)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특히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에서 대의를 위해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성삼문의 높은 절의를 기록, 후세에 전하였다.
유허지에서 오른쪽 마을로 이동하면 노은리고택이 나온다 과거에는 엄찬고택이라 했는데 이제는 명칭이 바뀌었단다
성삼문은 어릴 적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이 고택이 바로 그 장소란다
외조가 박첨이라 했고 어머니가 죽산 박씨였는데 왜 엄찬고택이었는지 모르겠다 정조 때 성삼문의 민원 소를 올린 인물이 판서 엄숙이었는데 아마도 성삼문의 외손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삼문은 1418년 도총관인 성승(成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지금은 이 고택을 수리중이어서 안으로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성삼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에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 때 사칠신의 한 사람인 김문기의 후손이 몸을 숨기고 평안도 영변에 숨어 살았는데 그들의 전설이 바로 청개구리 설화라는 이야기와 함께 그 후손의 한 사람인 소월 김정식의 시로 마무리를 한다
접동새 - 김소월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서러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