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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29
에베소서 2장 8-10절
사도신경의 모든 내용을 살피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모든 것을 믿으므로 그대는 지금 무슨 유익을 얻느냐는 질문을 하는데,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영생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과 관련해 질문하는데, 어떻게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답변으로 우리가 잘 아는 이신칭의,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이신칭의 자체는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칭해진다는 것이지만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덧붙여 설명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거슬러 극심한 죄를 범하였고 그것들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으나, 또한 여전히 모든 악에게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는 것을 나의 양심이 고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게 공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순전히 은혜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보상과 의와 거룩함을 내게 베푸시고 전가시키셔서, 마치 내가 전혀 죄를 범한 적이 없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나 스스로 이행한 것처럼 여기시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칭해진다고 할 때 믿음 자체에 어떤 공로가 있어서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다시 말해 그가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바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믿음이지 믿음 자체에 뭔가 힘이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믿는 마음으로 그런 은덕을 받아들일 뿐이라고 말할 때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덕을 받도록 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언급하지 못한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하자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한 후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거슬러 극심한 죄를 범하였고 그것들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으나, 또한 여전히 모든 악에게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는 것을 나의 양심이 고소한다고 말합니다. 사도신경의 죄 사함과 관련해서 설명할 때도 말했지만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더 이상 정죄 받는 일은 없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과 2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실상은 무엇인가? 56문 죄 사함 부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평생토록 싸워야 할 나의 죄들이 있다는 것이요, 나의 죄악 된 본성 또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60문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여전히 모든 악에게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나의 양심이 고소한다는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기 전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거슬러 극심한 죄를 범하였고 그것들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악에게로 기울어지는 성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얻은 이후에는 그나마 주의 은혜를 따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에 대하여 순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변함없는 것은 무엇인가? 여전히 모든 악에게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양심을 고소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칭의가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지, 실제로 우리 안에 의를 주입하여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의를 없애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있고, 죄의 성향이 있지만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히시고 덮어주셨기 때문에 가리어진 것이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때 사탄은 이런 우리의 양심을 자극합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네가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 아니신가? 하나님은 완전한 분으로 죄를 조금도 용납하실 수 없는데, 그런 분이 어떻게 너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의 답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죄를 짓습니다. 그런 우리 자신을 보면 구원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형벌을 당하심으로 더 이상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하여 정죄를 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만드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도 죄를 짓습니다.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도 죄의 찌꺼기가 섞여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다 완성하셨습니다. 완성하신 바를 우리에게 거저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선언만 하신 것이 아니라, 선언하신 바가 실제로 성취가 되도록 하시는데, 이런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비록 죄로 인하여 양심의 고통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낙심하여 넘어지고 일어서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선행의 문제를 다룹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고 할 때 자칫 방종의 삶을 살아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신칭의에 대한 강조를 하게 되었을 때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윤리적인 방종을 낳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주장하기를 우리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하며, 혹은 일부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일부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저들의 교리를 반박하는 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2문입니다.
62문. 하지만 우리의 선행은 왜 전부든 일부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될 수 없습니까?
답.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라야만 하는데(갈3:10, 롬3:20, 신27:26), 우리가 아무리 고귀한 선행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더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사64:6).
왜 우리의 선행 중 전부 혹은 일부라도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없는가? 우선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있는 선행이려면 절대적으로 완전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완전하시며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율법의 창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자주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지켜 행하라는 말씀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신명기 5장 1절만 하더라도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십계명의 내용을 말씀합니다. 신명기 27장 2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은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역으로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곧 선이라는 것입니다. 즉 선과 악의 기준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율법에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창시하셨다고 할 때 성경은 율법에 따라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율법은 그가 완전하신 분으로 완전한 기준이 된다는 것이요,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적 기준이 되는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난주에도 말했지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을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행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출생을 따라 난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아담으로부터 원죄를 전가 받아서 전적 부패와 함께 전적 무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 사이에 선한 행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 누가 선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특히 야고보서 2장 10절과 11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즉 율법은 어느 하나만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 열에 아홉을 지키더라도 하나를 지키지 않으면 율법을 범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선행이 의롭다고 하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의 계명도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온 율법을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전적으로 부패한 자들이 이런 식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율법은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것까지도 살피게 만듭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신 바가 그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했다고 해서 실제적인 살인, 실제적인 간음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행하는 악한 모든 것을 살인이요 간음이라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 앞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우리가 어떻게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을 지키되 어느 하나라도 빠뜨려서는 안 되고, 또 율법의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것까지도 지켜야 하는데, 그런 율법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한 순간도 빠짐없이 선만 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을 부패한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혹 누구도 예외 없이 칭찬할 만한 그런 선행을 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사야 64장 6절입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시편 143편 2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즉 선을 행하는 거기에도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선행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의 선행이 전부든 아니면 일부든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선행 자체가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불완전하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경이 상을 말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상급이 있다는 것은 그 상급에 대한 선행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런 선행은 공로로 여기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영생에 대해서도 선행에 대한 상급으로 여기기까지 합니다. 이런 내용에 대하여 반박하는 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3문입니다.
63문.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미래의 세상에서 선행에 대해 상을 주실 텐데, 그래도 우리의 선행이 아무 공로가 없습니까?
답. 이 상급은 공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눅17:10, 딤후 4:7-8).
조금 전에 우리는 우리의 선행이 전부든 일부든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없는 이유로 우리의 선행 자체가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우르시누스는 이것 외 몇 가지 이유를 더 설명합니다. 그 중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설사 우리의 행위가 완전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창조하신 목적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17장 10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본래부터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선행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그것들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부분이 고린도전서 4장 7절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어떤 면에서 63문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선과 악의 구분에 있어 그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에 있습니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선이요,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이 죄요 악입니다. 성경은 분명 선에 대하여는 상을, 악에 대하여는 벌을 말씀하십니다. 한 예로 요한계시록 22장 11절과 1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때문에 우리는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상을 바랄 수 있습니다. 바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라야 합니다. 또한 바라는 만큼 악에서는 멀어지고 선에 대해서는 가까이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것이 나라고 해서 내가 선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성경은 한편으로는 분명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벧전3:11 참조). 권면의 형식으로도 말씀합니다.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16:19) 그래서 사람들은 선을 행하면 선을 행하는 원인이 나에게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우리의 본성은 어떠합니까?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안에는 평생토록 싸워야 할 나의 죄들이 있습니다. 또한 나의 죄악 된 본성도 있습니다. 모든 악에게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어서 그것이 나의 양심을 고소하기까지 합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설명하는데, 18절부터 보겠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18-23) 어떤 사람은 이러한 내용을 불신자에게 적용하지만, 불신자의 경우는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선을 소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가 그 대상입니다.
그런데 신자라 할지라도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 갈등을 일으키는데, 그 결과가 무엇이냐? 23절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은 본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보다 그와 다를 법, 다시 말해 죄의 법이 우리 안에 강하게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탄식합니다. 24절을 보시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리고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이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이 아니면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죄의 법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선을 행하는 일이 있다면 누구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데, 빌립보서 1장 6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2장으로 가시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12절과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2절 자체는 분명 명령의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런 형식은 마치 우리가 해야 하는 것처럼 비춰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느냐?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 말씀의 성취는 어떻게 해야 가능한가? 그래서 나오는 것이 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까지 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마치 레위기 20장 7절과 8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 명령하시는 바는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라고 하시지만, 그리고 그 거룩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킴으로 되는 것이지만, 우리 스스로 거룩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끝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 나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의 선과 관련된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할 수 있다면 죄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선을 행한다고 할 때 선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만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그 명령을 절대적이고 완전하게 수행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단코 선의 원인이 나에게 있어서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이 가르치는 바가 정확하게 이것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죄를 제외하고 선한 모든 것은 내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감히 상을 말할 때 공로에 대한 상을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자세는 누가복음 17장 10절과 같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 입장에서는 명령 받은 것을 완전하게 다 행하면 그것으로 나의 공로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종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어떤 명령을 하셔서 그 명령대로 다 행한다고 보상해야 할 의무 자체가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보상하겠다고 하시면 그것이 그의 은혜요, 그의 자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상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한 형태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완전하게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종이라면, 피조물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완전한 형태로 행할 수 없다면 얼마나 더 무익한 자겠습니까? 특히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전체 율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야 하는 것이요, 외적인 면만이 아니라 내적인 면까지도 지켜야 하는 것이요, 한 순간도 빠짐없이 계속해서 지킴으로 선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패한 본성 가운데 있는 인간이 어떻게 이것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부족함이 있고, 점과 흠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무익한 종이지만, 사실은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상을 약속하신다고 해서 그 상을 우리의 공로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공로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계신 상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내게 공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순전히 은혜로’(60문)라고 표현한 것처럼 상에 대해서도 순전히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과는 달리 개혁자들은 성경의 상급에 대하여 결단코 공로에 대한 상급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상급에 대하여 말하기 때문에 상급 자체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공로로 인한 상급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불링거라는 개혁자가 쓴 제 2 스위스 신앙고백 제16장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16장은 믿음과 선행, 선행에 따르는 보상, 그리고 공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공로가 아닌 은혜의 상급 부분만 읽어드리면, “성도의 행위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의 위엄을 헤치는 요소들과 불완전한 요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것을 행한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시고 품어주신다. 이 때문에 그들에게는 약속된 상급이 주어진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시지만 그것은 우리의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은사에 대한 상급이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급을 받든 지간에 이것은 은혜, 즉 상급이 아닌 은혜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한 선은 우리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은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다시금 반박하기를,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는 데 무관심하게 만들고 속되게 만든다는 주장합니다. 이신칭의의 가르침, 그리고 상급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선에 대하여 열심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여기에 대해서도 반박하는데, 64문입니다.
64문. 하지만, 이 가르침이 사람들을 무관심하고 속되게 만들지 않을까요?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자들로서는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마7:18, 눅6:43-45, 요15:5).
사실 64문의 질문과 같은 내용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교리를 잘못 사용한 것으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잘못 사용의 예는 성경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로마서 6장 1절을 보시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20절에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로 율법을 주신 목적과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잘못 사용한 결과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에 거해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 수 없는가? 로마서 6장 2절 이하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2-4) 간단히 말하면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교리는 그런 은혜를 받는 자리에만 머물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분명하게 정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살도록 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10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선 8절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이때 은혜, 믿음, 구원은 다 여성명사입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이것’은 중성명사로 앞에 있는 은혜, 믿음, 구원을 다 받는 말입니다. 은혜도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믿음도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구원도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9절에서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0절에서 “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는가?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선물로 주시며, 그런 선물로 인하여 구원이라는 선물까지도 주셨는가?” 할 때 목적하시는 바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무엇을 위해 만드셨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요리문답 64문의 답도 이와 다르지 않는 내용입니다. 즉 참된 믿음이란 결코 우리로 하여금 방종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자들로서 감사의 열매를 맺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가르침이 바로 이런 내용 안에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로마서의 가르침과 야고보서의 가르침이 상반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로마서를 통해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는바 그리스도의 피와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2장 24절을 보면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가톨릭과 같은 데서는 믿음만이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은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을 보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하는데, 믿음과 상반된다는 의미에서의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이냐, 아니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냐를 놓고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함이 아니라, 믿음을 말하지만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를 놓고 말하면서 행함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의 마땅한 열매는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라, 행함이 의롭다 하심에 대한 감사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은 공로가 아니라 우리를 은혜로 의롭다 하심에 대한 감사의 열매입니다. 특히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자들로서는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다고 할 때 우리로부터 나타나는 선과 관련된 모든 열매가 여전히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요15:5). 나아가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했다 할지라도 거기에 우리의 무익함이 있는 줄 알아야 하고,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밖에 없다는 것도 알아 하나님께는 합당한 영광을 우리는 그 앞에서 겸손한 자로 있으면서 선한 일에 열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