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김성일 - 개척자의 피 땀 눈물 - 4. 잊을 수 없는 진주 생활
1 그 후 협회 제1회 수련을 받고 난 후 진주교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 당시에는 식구가 적어서 나는 학업을 중단하고 나간 것이다. 진주 교회는 진주중학교 정문 앞의 조그만 2층 집에 있었다. 식구는 부인 식구 몇 명과 청년 서너 명, 그리고 학생들이 7, 8명 되었다. 첫 주일 예배 날이 되자 어떻게 말씀을 전할까 적정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김순겸씨가 설교하고 나는 간단히 인사만 했다.
2 진주교회는 여장군 강경렬씨가 세운 교회라 신앙의 열도가 높았으며 강희재, 이숙회 두 집사는 남편과 이혼하고 교회에 들어오기까지 했다. 내가 진주교회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그 기간은 나를 하늘이 단련시키는 훈련 기간이었고 성장 시기였다. 하루는 설교하는 도중에 집 주인 할머니가 ‘집세를 달라’라고 소리를 쳤다.
3 그다음 날 나는 시계를 팔아서 집세를 내고 쌀을 샀다. 시계가 없으니 마음은 편했다. 옷을 새것 하나 입어도 괴로운 처지였는데 시계까지 찬 것은 더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시계를 팔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전도에만 전념하고 활동했으나 학생들만 전도될 뿐 도무지 어른들은 오지 않았다.
4 그래서 마음은 항상 허전했었고 또한 내 개인적인 학교의 복학 문제가 늘 마음에 걸렸다. 주위에서는 6촌 형이 진주 농과대학의 학생과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농대라도 졸업하라고 권유했지만 목회를 중단할 수가 없어서 망설였다. 책만 보면 내 마음은 자꾸 갈등이 생기니 아예 책까지 팔아서 정리하고 전도 비용으로 썼다.
5 그다음 문제는 이성 문제에 대한 시험이 왔다. 정성껏 식구들을 키우다 보면 식구가 따르게 되고 그런 후에는 나도 모르게 정이 가고 그것이 점점 사랑으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그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자꾸만 빠져드는 데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6 성경에 ‘음란한 마음만 먹어도 죄가 된다’라고 했는데 나는 뭇 생명들을 살려야 할 목회자이면서도 이것도 주관하지 못하니 고민이 쌓이게 되었고 결국 전도하다가 내 생명을 죽이느니보다 차라리 집에 돌아가 뜻을 그냥 따라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7 최후로 이요한 목사님을 찾아뵙고 목회생활 그만둬야겠다고 얘기하려고 부산까지 갔으나 차마 말을 못 하고 다시 돌아왔다. 그 후로 두 번이나 갔다가 뜻을 못 이루고 세 번째야 말씀을 드렸다. 목사님은 “네가 식구에게 끌리는 그 마음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 마음은 하늘이 너를 중보로 세워서 식구를 사랑하는 마음이고 식구들이 너에게 끌림은 네가 하늘의 중보로 일하기 때문에 하늘사랑에 의하여 끌리는 것이다. 다만 그 귀한 사랑을 네가 유린 말고 하늘 앞에 돌리라”라고 말씀하셨다.
8 나는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의 해방을 받았다. 이제는 아버지 앞에 귀한 사랑을 돌리자고 결심하고 진주로 향했다. 내 마음이 정리되고 나니 학생들이 전도되었다. 어려운 생활을 아는 학생들은 도시락을 놓고 가고 쌀을 가져와서 밥을 해 놓고 가는 등 사랑과 정이 넘쳤다.
9 나는 학생들이 올 때가 되면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기다렸다. 서로의 얼굴이 마주치면 좋아서 웃고 뛰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님의 심정을 체득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린 식구들이 핍박을 받을 때는 그 아픔을 내가 대신 맡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중학교 3학년인 정양숙 양이 자기 아버지(고등학교 선생)께 머리채를 잡혀서 맨발로 끌려가던 일 등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10 1961년 동기 계몽 때는 어린 학생들을 동기 계몽에 내보내 놓고 가슴을 졸였다. 진주여고 3학년생인 김영자 양은 산청군 차황면으로 전도 보냈는데 거기서 더 멀리 떨어진 지리산 밑 골짜기로 들어갔다. 어찌나 염려가 되던지 그 학생을 찾아서 차황면에 갔는데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어두워졌다.
11 산등 길을 뛰어서 한참 가다가 산골짜기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안심하고 동네를 찾아갔다. 그 학생은 산골에서도 잘 생활하고 있었다. 하늘은 항상 인간이 알지 못하는 배후에서 지켜 주고 계시다는 것을 체휼하게 되었다.
12 진주 교회장 시절에 잊지 못할 일은 선생님께서 생신 때 금식하시고 전 식구들이 금식해서 지구장에게는 오토바이를, 지역장에게는 자전거를 사주시면서 ‘내 등을 타고 다닌다고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님께서 하사해 주신 자전거를 탈 때마다 배고픔도 참을 수 있었고 어두운 밤에 산길을 갈 때도 선생님이 옆에 계시다는 든든함으로 무서움을 이길 수 있있다.
13 1961년 늦은 여름에 합천군 쌍백면에서 전도하고 있는 민경식씨로부터 부흥회를 해달라는 연락이 와서 합천 지역장 조동현씨, 거창 지역장 정승원씨와 같이 쌍백면을 향해 떠났다. 얼마 후 소나기가 계속 내리는데 산골짜기에서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에 도로가 끊기고 물이 배꼽까지 차버렸다. 곧 물은 불어서 급류가 되었고 우리의 앞길을 막았다.
14 우리는 휩쓸려 떠내려갈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필사적으로 자전거를 붙잡고 간신히 뭍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선생님께서 하사해 주신 자전거는 나의 생명보다도 더 귀한 것이었다. 그해 겨울에 이성림(季聖林)씨가 개척하고 있는 산청면을 순회하였다.
15 이른 아침 바람을 안은 채 자전거를 타고 산청을 향해 가는데 도중에 배가 고파서 자전거를 타고 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눈 위에 누워서 쉬다가 밥을 얻어먹고자 한 집에 가서 밥을 달라고 청했더니 없다고 한다.
16 또 한 집을 가니 아기들이 밥을 여기저기에 떨어뜨리며 먹고 있었는데 그 집에서도 거절당했다. 세 번째 집에 들러보니 아주머니가 밥상을 마련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밥 한 그릇 달라고 하니 밥이 남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섭섭한 마음이 앞섰다.
17 네 번째 집에 마지막 용기를 내어 들어갔다. 젊은 청년이 장작을 패다가 나의 사정을 듣더니 고생한다고 하면서 “우리 부부가 먹다 남은 밥인데 이것도 좋으냐”라고 하면서 내놓았다. 밥은 꽁보리밥인데 작은 냄비에 3분의 1 정도 남아 있었다. 그 밥을 다 먹어 치우고 나니 손가락만 한 고구마를 씻어서 주었다. 나는 그것을 얻어먹고 힘이 나서 산청에 갈 수가 있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