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2009년 12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하루 5000원 주차료를 지불하는 주차장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조각 공원과 계곡사이 넓은 숲이 나온다
여름을 맞아 얕은 개울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한가하고 평화롭다
그 한편으로 성보박물관도 거대하게 서 있다
성보박물관만 보고도 이 법주사가 얼마나 그동안 한반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절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도는 떠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도를 멀리했고
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았으나 세속이 산을 떠났도다
山非俗離俗離山
조선 중기의 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속리산을 보고 남긴 시의 한 구절이다. 속리산은 맑고 청량한 산이다. 그 옛날 이곳을 찾았던 백호의 시에 묘사된 것처럼 속리산은 속세를 떠난 피안(彼岸)의 세계다.
대곡 성운의 제자로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썩어빠진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그 어떤 구애됨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이 한 시대를 풍미하다 이름없이 사라진 백호가 이렇게 찾은 속리산이다
엊그제 이 시대의 인물 김민기도 그렇게 갔다 드러나지 않으려 했는데 민중이 그를 찾았고 그 때문에 권력의 핍박으로 한세상 어렵게 살다가는 이들의 생애, 그러나 그 민중은 이내 이들을 배반하고 윤정권 같은 사악한 권력을 좇다가 결국 세상의 쓴맛에 희망을 놓는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천축(天竺, 印度)에 갔다가 백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절을 지을 터를 찾아다니는 길에 흰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었다고 한다.
의신조사가 노새의 기이한 행적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경치에 비범한 기운도 느껴져서 그곳에 절을 지은 후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법주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시대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차례로 법주사에 주석하며 수차례에 걸쳐 중창이 이루어졌다. 문종의 다섯째 아들인 도생승통은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원종 때 미수대사는 왕명으로 각종 경전 92권을 찬술하기도 했다.
1363년(공민왕 12년)에는 공민왕이 직접 법주사에 와서 양산 통도사에 모셔진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했다. 이때 사리를 모셨던 사리탑이 아직도 법주사 능인전 뒤쪽에 남아있다.
팔상전이다
우리나라 수많은 탑 가운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목탑으로 국보 제55호인 법주사 팔상전이다.
쌍봉사 대웅전과 두 기였지만 1984년에 쌍봉사 대웅전이 불타는 바람에, 목탑으로서는 유일한 지정문화재가 되었다.
5층의 옥개는 네모지붕이며 그 위에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1968년 해체 중수할 때 5층 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고 심초석에서 사리장치와 함께 동판에 새긴 글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팔상전은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된 것을 1605년에 재건하고 1626년에 중수했다고 한다.
법주사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고려 숙종이 그 아우 의천을 위하여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가 3만 명이나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세조 임금도 법주사에 들러 복천암에 머물던 신미대사를 도와 절을 크게 중창했다.
조선 중기에는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지닌 대찰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이후 1605년(선조 38년)부터 1626년(인조 4년)에 걸쳐 사명대사와 벽암각성 스님이 팔상전 등 전각을 중건했다.
약사전 앞 베롱나무꽃의 붉음과 수국의 연두가 묘하게 어우러져 한폭의 수채화를 수 놓는다
법주사는 대한민국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유일한 고식(古式)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을 비롯, 다양한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만 3점이고, 보물은 13점, 충북 유형문화재가 20점, 문화재자료 1점 등이다.
이것은 쌍사자석등으로 국보 제5호(1962.12.20 지정)이다. 높이 330cm. 이 석등은 일반형 석등의 간석 부분을 8각기둥 대신 쌍사자로 변화를 준 이형석등이며, 쌍사자석등의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금강문·천왕문·조사각·사리각,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석등 벽면에 사천왕이 조각되어 있다
현재 법주사는 2018년 6월 30일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1천 년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께 등재된 다른 여섯 곳은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1939년에 당시 주지였던 장석상 스님이 의뢰해서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김복진이 법주사 미륵불상을 조성했으나 한때 중단되었다가 1964년 완공했다.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예전엔 갈색 계통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황금색으로 변했다
법주사엔 신법 천문도병풍(보물 제848호)이 있는데 이는 불교와 관련 없는 문화재로 경종 3년(1723년)에 중국에 와 있던 쾨글러(I.Koegler)가 작성한 300좌, 3083성의 큰 별자리표를 관상감 김태서와 안국빈이 직접 배워서 그린 별자리그림이다. 쾨글러의 천문도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사본으로 세계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아마도 영조 때 영빈 이씨의 원당을 만들고 이 병풍도 함께 하사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대웅보전 뒤에 자리잡은 선희궁 원당은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원당이다. 청와대 옆 칠궁의 하나인 선희궁의 이름 그대로 절집 안에 후궁의 원당이 들어서 있는 특이한 예다.
삼성각이 약간 높은 산지대에 있지 않고 대웅보전 한 측면 귀퉁이에 있는 것도 특이하다
팔상전 옆 사방이 트인 전각 안에 모셔진 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도 법주사에만 조성되어 있는 보살상이다. 구원겁토록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할 것을 서원한 보살이 희견보살로 뜨거운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다.
원통보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에는 앉은키 2.8m의 금색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미륵불상 조성관련 기록이 적혀있는 탑이다
법주사 능인전은 사창 영역의 서쪽에 위치한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앞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건물의 이름은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불린다.
조선 인조 2년(1624)에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법주사를 중건할 때,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9)이 다시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사리탑이다
1362년(공민왕 11) 공민왕이 홍건적을 격파하고 법주사에 행차하여 통도사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모니의 사리 한 개를 이곳에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형식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서 기단부 위에 탑신(塔身)을 얹고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얹었으며, 정상부에 상륜(相輪)을 장식하였다. 기단부는 상대(上臺) · 중대(中臺) · 하대(下臺)로 구성되었는데, 평면방형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평면 8각의 기단이 놓여 있다.
소담하게 핀 수국사이 우뚝 솟아있는 메타스퀘이어 두 그루가 법주사의 운치를 더한다
법주사 석련지
국보 64호(1962.12.20 지정). 높이 195cm. 지대석 위에 올려진 반개한 연꽃이 있는 화강석 수조이다. 지대석은 8각이며 각 면의 좌우에 우주를 새기고 안상을 하나씩 조각했다. 그 위에 3단의 각형 받침을 두었으며 받침 위에는 겹꽃의 내림연꽃을 돌려 간석을 받치고 있다.
고풍스런 능인전 담을 돌아 수정암으로 가는 길 커다란 두 조각 바위 사이 마애여래의상이 있다
보물 제216호. 높이 500cm. 광배는 생략되었으며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설법인(說法印)을 결하고 있고 연화좌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내려딛고 있는 의상(倚像)이다.
머리는 나발이며 육계 밑에 계주가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둥근형으로 살이 쪘으며, 턱 밑의 주름과 짧은 목에 표현된 삼도가 목걸이처럼 늘어져 있다.
고려불화 가운데 1350년에 제작된 〈미륵하생경변상도〉(일본 신노인[親王院] 소장)의 본존불과 세부표현에서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 역사적으로 법주사는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었으므로 이 불상조성의 신앙적 배경으로 미륵신앙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