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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4일 주일 설교 – 교회설립 43주년 기념주일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28
설교 제목: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28~30
https://youtu.be/_kTauQMceKs?si=u1Ngjbpv2ZLWgFMt
설교를 위한 묵상:
교회설립 43주년을 맞이하여 교회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교회를 부르시는지, 그리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위대한 뜻을 위하여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들에게 자기 형상을 입히시고 그것으로 세상을 치료하신다. 그 뜻과 목적에 부합하기 위하여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칭찬받는 교회가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설교 개요:
1.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
2. 하나님은 왜 사람을 부르시는가?
3. 그 아들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
***
1.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
오늘은 우리 교회 설립 43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1981년 7월 12일에 금호동에서 시작했습니다. 지금 있는 예배당은 우리 교회의 여섯번째 예배당입니다. 우리 교회는 금호동과 행당동, 그리고 왕십리 일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모인 교인들은 저마다 다른 지역에서 나서 서울로 이주해 온 분들입니다. 그리고 43년이 되었으니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이제 가정을 이루고 저마다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는 오늘 교회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새소망교회에 모여 이렇게 살고 있으니 교회는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고 저마다 예수님을 믿으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주일마다 모임을 갖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는 많은 교회가 있고 그 교회들의 모습도 정말 다양합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말은 본래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교회를 쳐취(CHURCH)라고 하는데 이 말은 주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세우시고 주님이 머리가 되시므로 주님의 것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을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지으셨고 그 피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으므로 자신을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많이 부른 노래가 생각납니다. . ‘싱글벙글 내 얼굴은 예수님의 것… 울끈불끈 힘있는 팔은 예수님의 것…’ 교회는 자신을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敎會)는 한자어로 풀어보면 가르치는 모임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며 그것을 사람들에게 언행으로 보여줌으로써 가르친다고 할 때 그것도 일리 있는 말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실히 따라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진리를 가르치고 그 진리를 따르려는 노력이 진지하게 실행되는 곳입니다. 신앙이 진지해지면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데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를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ecclesia)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이 세상의 모든 단체와 다른 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믿음, 그리고 그 부르심에 따라 우리가 기도하고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믿음,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부르셨고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후로 많은 사사들과 예언자들을 부르셔서 자기의 뜻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자기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뜻을 따라 살았고 그렇게 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부르셨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는데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떻게 들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를 사도 바울의 전도 현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자신을 환상 가운데 부르셔서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전도를 하다가 자꾸 길이 막히고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환상을 봅니다. 사도행전에는 그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소개됩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사도행전 16:9~10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복음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밤중에 환상 가운데 마케도니아 사람을 보았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오늘의 그리스 북쪽 지역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옷차림과 행색은 서로 다릅니다. 마케도니아는 아시아에서 볼 때 바다 건너 유럽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환상 가운데 그 마케도니아 사람이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요청합니다. 그 환상을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해합니까? ‘아, 이것은 하나님이 저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뜻이로구나!’라고 해석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들을 부르셔서 그리스 지방으로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새소망교회로 오게 되셨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이곳으로 부르셨습니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소망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이곳으로 부르셨습니다. 저를 새소망교회로 부르신 분은 이인성 장로님입니다. 제가 면목동에서 옹달샘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이장로님이 찾아오셔서 이리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부르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교우 여러분과 의논하고 나서 이장로님이 대표로 오셨습니다. 그때 저는 옹달샘교회 교우들과 함께 이 부름이 무슨 뜻인가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교우들은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리로 부르셨다고 교우들과 저는 인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바다 건너 아프리카로 부르시고 얼마 후에는 다시 필리핀으로 부르십니다. 거기서 노년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의 친구 방효천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다양한 방법으로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새소망교회를 섬기게 하신 줄을 인정하고 이렇게 섬기고 있습니다. 물론 이곳에서 주님을 섬기던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다른 곳으로 이주한 분들도 있습니다. 모두다 지금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개척했고 어떤 분은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그들을 인도하셔서 자기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사람들을 부르실까요?
2. 하나님은 왜 사람을 부르시는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시며 교회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들을 부르시는 걸까요?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이유는 아마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많은 자손을 주셨고 땅과 재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것을 받았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니,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려고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에 대하여 어떤 계획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28~29
이 본문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28절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학자 톰 라이트는 이 본문을 다시 풀어줍니다(로마서의 길). 이 본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즉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에 동역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민족을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아니었다면 그 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뜻에 순종하는 이야기는 그들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열매를 보십시오. 우리들의 순종도 그렇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동역에 동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과 사랑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조금 더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들의 형상을 닮게 되면 그 아들은 맏아들이 되고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자기 아들의 형상을 닮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르실 때 그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구나! 그런데 그렇게 부르시기 전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향하여 계획하신 본래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을 닮게 하려는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도 하나님의 아들을 닮게 하려고 애쓰셨겠구나!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고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율법을 주셨구나! 단지 그 땅에 들어가서 잘 먹고 잘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그 땅을 주셔서 거기서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아들처럼 만드시려는 것이었구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좀더 생각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실 때는 봉사하고 헌신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무슨 일을 시키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시키실 일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일을 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은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들은 그 땅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쫓으셨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목표가 어쨌든지 자기 백성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애써서 땅을 차지하게 하신 그 백성을 흩어버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백성이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릇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부자는 되었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교회가 되게 하셨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처럼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서 우리가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예수님의 형제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교회는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결국은 모래 위에 세워진 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가 크고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찬을 받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3. 그 아들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좀 더 설명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30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시기 전에 미리 정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각 사람을 위한 계획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디모데전서 2:4). 이것은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초청하십니다. 그 초청에 응답한 사람을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의롭다 하십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노아를 당시의 의인이라고 여기셨습니다(창 6:9).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셨습니다(창세기 15:6).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마 1:19).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하실 때는 그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십니다. 노아에게는 장차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가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실 때 그에게 하나님이 자기의 계획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임무를 받게 될 때, 또는 하나님이 장차 자기에게 무슨 일을 맡기시는 것을 느낄 경우에 그것은 곧 그가 의로운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만약 그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을 부르시고 그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즉,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주십니다. 그렇게 할 때마다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13).
저희 부부가 신혼 때에 겪은 일입니다. 저희가 다니던 교회가 문을 닫아서 교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좀 큰 교회로 출석하자고 다짐을 했지만 제가 군대에서 개척교회 전도사님을 만나서 그 교회에서 봉사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우리 부부가 왜 그 전도사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분의 사연을 듣고 왜 그 교회에 마음이 끌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이 인도하셨습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은 늘 선택을 할 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택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선택을 할 때 우리는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저하고 두려워합니다. 차라리 이전에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도 해 봅니다. 그러나 이 길이 옳은 줄 잘 알기에 뒤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겨 드립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하시면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3~24). 예수님은 자신이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영광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왜 영광을 얻는 일입니까?
직장에서 더 높은 직책으로 발령받는 것을 가리켜 영전(榮轉)했다고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영전을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박수 받을 일을 하거나 더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 영광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그 사람이 자신의 소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므로 영화롭게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뜻을 굽히지 않으시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우러를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다가 재물에 눈이 멀어 은화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그는 영광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로부터 오명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은 그 사람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그 사람이 끝까지 잘 감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끝까지 붙들고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짐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처럼 소임을 끝까지 감당할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영화롭게 되는 길임을 사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면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이 영화로운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큰 업적을 남겨야 영화로운 인생이 될까요? 예수님은 얼마나 큰 교회를 남기셨나요?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온 제자들과 여인들을 위해서 끝까지 진실을 지키셨습니다. 법정에서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벗어버리기 위해 마음에 없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영화로운 길, 영광의 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가정을 끝까지 지키는 것은 영광의 길입니다. 어떤 목회자에게 영화로운 삶은 자기에게 주어진 작은 교회의 교인들을 끝까지 정성껏 돌보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영화로운 인생에 그에게 있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설립 43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어떤 교회를 만들어야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라는 칭찬을 듣겠습니까? 그것은 규모에 있지 않고 진실에 있습니다. 그것은 화려함에 있지 않고 손해를 감수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 있습니다. 억울해도 참고 끝까지 상대방을 품어주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라면 우리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영화로운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세상에서 크고 화려한 인생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닮기 위하여 노력하는 삶입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이 각자 이런 삶을 살아야겠다는 깨우침으로 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닮은 영광스러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우리 교회는 이 세상에서 정말 멋진 교회가 될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