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12:2-3
[현대인의성경]
2. 그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는 동안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으나
3. 산당을 헐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은 계속 거기서 제사를 지내며 분향하였다.
[NIV]
2. Joash did what wa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all the years Jehoiada the priest instructed him.
3. The high places, however, were not removed; the people continued to offer sacrifices and burn incense there.
요아스의 통치(열왕기 하 12:1-3)
여기에서 요아스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볼 수 있다.
1. 그는 40년 간 치리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스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순리대로 하면 더 오래 다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겨우 47세였을 때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1절).
2. 그는 여호야다가 살아서 교육해 주는 동안에는 의롭게 잘해 나갔었다(2절). 지위나 재산과 권력과 자유를 너무 빨리 누리게 되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들은 미처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도 모를 때에 그것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그들에게 중대한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요아스에게도 그런 위험이 있었으나, 여호야다같이 현명하고 경험 많고 믿음직스러운 좋은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잘 보호될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은 요아스 자신에게도, 나이가 들었을 때까지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의 지도를 받으려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젊은 사람들, 특별히 어린 왕들, 그리고 중요 직위에 있는 모든 젊은이들이 좋은 지도를 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의로운 일" 이 어떤 것인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을 주위에 가지고 있다면, 그 사실은 그들에게 큰 자비이다. 또한 그들이 그러한 사람들의 조언과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그 때는 그들도 혼자의 힘으로 현명하고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잠 29:15).
3. "산당은 제하여지지 아니하였다" (3절). 나라의 곳곳에 제사와 분향을 위한 단이 있었다. 이것은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 만든 것이나, 예루살렘에 있는 제단에 대항하고 경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적(私的)인 제단들은 아마 초기보다도 후기의 악한 통치자 시대에 많이 사용된 것 같다. 왜냐하면 후기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기가 안전하지도 않았고, 성전 제사도 규정대로 드려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야다도 그것들을 묵인한 듯하다. 왜냐하면, 몇몇 생각이 깊은 자들은 자기들이 더 좋은 제단을 지니지 못할 바에야 그런 것들을 좋게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여호야다 자신도 성전을 개혁하고 거기다가 사물을 잘 정리해 둠으로써 백성들을 점차로 산당에서 떠나도록 하고자 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도 차츰 그런 제단에서 떠나고자 했을 것이다. 아니었다면, 제사장 여호야다나 요아스 왕은 그들의 개혁 사업을 끝까지 추천시켜 나갔든가, 또는 그렇게 뿌리 깊은 관습을 막을 충분한 용기와 실력이 모자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아스의 타락(역대하 24:15-27)
우리는 여기에서 요아스가 타락하고 배반한 슬픈 이야기를 읽게 된다.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큰 일들을 해주셨다. 그도 하나님을 위해 잠시 일을 행했었으나, 이제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릇된 일을 쫓고 있다. "황금이 흐려졌도다. 가장 훌륭하던 황금이 변질되었도다."
Ⅰ. 요아스가 배반하게 된 동기. 그가 의로운 일을 행할 때도 "온전한 마음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결코 진실되지도 않았고, 훌륭한 원칙에서 행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렸을 때 성전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자랐으며 우상 숭배 파괴에 앞장섰던 고로, 자기에게 왕관을 씌워준 여호야다의 뜻에 그저 응했던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풍향이 바뀌자 그도 바람따라 곧 돌아서고 말았다.
1. 그의 훌륭한 조언자는 그를 버려두고 죽어버렸다. 여호야다가 130세가 되도록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와 그의 나라에 대한 자비였다(15절). 그의 나이로 보아 그는 솔로몬 시대에 태어났고, 이 전에 여섯 왕대를 모두 살았던 것 같다. 여호야다가 이렇게 영예롭게 죽은 것을 요아스에게 보여준 것은, 여호야다가 그에게 가르쳐 온 선한 길로 계속 나아가도록 격려해 주는 것이었다. 여호야다 "그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다" 는 영예로운 찬사를 하면서(아마도 이것은 그의 묘석에 새겨진 비문이었을 것이다) "무리가 그를 열왕의 묘실에다 장사하였다" 고 했다. 여기에서 유다 나라가 "이스라엘" 이라 불리우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지파들이 하나님을 배반했으므로 이들만이 참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세대에게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가장 영예로운 일이라는 것과, "선을 행하는 자는 그 세대 사람들의 찬미를 얻게 될 것" 임을 명심하자. 여호야다는 하나님께 대하여 선한 일을 행했다. 어떤 자의 선행도 하나님께 미치지는 못하나, 여호야다는 성전 예배를 복귀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집에 대한 선한 일을 행한 것이다(23:8). 믿음을 촉구하는 일에 자신을 바친 자들이 나라에 가장 선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다. 여호야다는 영예롭게 생을 끝맺었다. 그러나 요아스가 가지고 있던 작은 믿음마저 여호야다의 무덤 속에 모두 매장되었으며, 여호야다가 죽은 후 왕과 나라는 비참하게 타락해 버렸다. 경건한 열의를 품고 유익한 일을 행하는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며, 그의 죽음이 방백이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심판을 가져다 주는 가를 보라. 우리 구주의 말씀대로 "스스로에게 소금을 치는 것", 즉 내적인 원칙을 가지고 믿음 가운데 행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 또 온갖 변화 속에서도 그것만이 우리를 지키는 일임을 주시하자. 우리가 이렇게 행할 때는, 부모나 사역자, 친구를 잃는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을 잃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2. 나쁜 조언자들이 왕의 주위에 모여들어, 교묘히 그의 환심을 샀고, 감언이설로 속이고 아첨했다. 또한 그들은 그에게 "절하고" 그의 나이 많은 스승의 죽음에 대해 조위를 표하는 대신, 그렇게 오랫동안 그를 구속해 오던 그 스승으로부터 풀려나게 되었다는 뜻으로 그에게 축하를 표했다. 그들은 그에게 더 이상 제사장들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엄숙한 교훈과 제재에서" 벗어나 왕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유다의 방백들은 그를 타락시키기에 퍽 열심들이었다(18절). 그의 아버지와 조부는 좋은 것을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아합" 의 집에 의해 타락했다. 그런데 이제 유다의 방백들이 그들의 왕을 꾀어 타락시킨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악한 생각" 을 품는 자들은 어디서든 악한 조언자를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왕에게 절하고" 그의 절대적인 권능에 대해 자만을 갖도록 유혹하면서 그의 왕권을 위해 힘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혜로운 충고를 하기는커녕 율법이나 계율, 제도 대신에 왕의 즐거움을 찾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왕은 그들의 말을 들었다. 그들의 아첨하는 말은 그를 즐겁게 해 주었고 여호야다의 지시보다도 더욱 기분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방백들과 백성들은, 이처럼 그들에게 자유와 권세를 감언이설로 약속해 주나 결국은 그들을 고통과 굴욕으로 이끄는 자들에 의해 수 차례나 파멸당했다.
Ⅱ. 배반한 일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다" (18절). 방백들은 여호야다가 살았을 동안에는 감히 제안할 수 없었던 것을 왕에게 요청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 요청을 불쾌히 여길 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요아스가 왕 위에 오른 당시 부숴 버린 목상과 우상을 다시 세우고자 한 것은 언제나 지루하고 낡은 성전 의식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왕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허용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들과 합세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전을 수리한 그들이 성전을 버리고 목상과 우상을 끌어들여 그것들을 섬기게 된 것이다. 인간들은 얼마나 변하기 쉬우며 신뢰할 수 없는 존재들인가!
Ⅲ. 이러한 배신을 가중케 하는 죄악이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사악함을 책망하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려주심으로써 "그들을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선지자를 저들에게 보내셨다" (19절). 하나님을 떠나 음행하는 자들을 사역자들에게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사역자들의 일이다. 매우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증언자를 보내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께 불성실하게 행하더라도 그는 선지자를 보내시어 그들을 회개시키고 가르치도록 했으며 만일 그들이 돌아온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틀림없이 얻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시키려 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들이 악행을 "계속하여 죽기보다는 돌아와 살기를" 원하시며 멸망하는 자들은 결코 변명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일을 수행했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나 거의 아무도 듣지 아니하였다."
1. 그들은 모든 선지자들을 무시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으며 놀라울 정도로 우상에 집착하고 있어서, 선지자들의 책망이나, 경고, 위협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방법들로도 그들을 돌아오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적었고, 그 말을 듣고 주의하는 자는 더 적었다. 더욱이 그것을 믿고 따르려는 자는 극히 적었다.
2. 그들은 매우 훌륭한 선지자인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를 죽였다. 그 외에 또 다른 자들도 죽였을는지도 모른다. 스가랴에 대한 일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방백들에게 소식을 전했다(20절). 백성들은 성전 뜰에 모여 있었는데(그것은 그들이 그곳을 모두 떠나 버리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여기에서 장엄한 잔치를 베풀려고 했을 것이다. 이 스가랴가(그는 선지자로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예언의 신에 감동되어 제사장의 뜰에 있는 책상 위에 서서 백성들이 저지른 죄와 그에 대한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불쾌하지 않은 어조로 분명해 말해주었다. 그는 선지자들이 때로 그러했듯이 어느 특정인을 비난하거나 어떤 특별한 심판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불쾌하지 않게 그들이 율법에 적힌 것을 기억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들이 성서를 살펴보았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1] 그들은 계율을 여겼다. "너희는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너희도 알다시피 목상과 우상을 섬겼다. 너희가 왜 하나님을 거역하여 스스로를 망치는가?"
[2] 그들은 죄값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되다면 너희는 이 악한 길로는 결코 형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악을 행하고 잘 되기를 바라지 말자. 아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너희에게 이미 말씀하셨던 대로 그가 너를 버리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 29:5, 31; 31:16, 17). 하나님의 말씀을 등불삼아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섭리를 밝혀주는 것이 사역자들의 임무이다.
(2) 그들은 이 소식을 전한 충실하고 친절한 선지자를 잔인하게 다루었다(21절). 방백들 혹은 그를 일부의 모반에 의해 그리고 이 훌륭한 경고로 해서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왕의 명을 쫓아" 그들은 그를 돌로 쳐서 즉시 죽였다. 그는 불경한 말을 했다거나 반역을 했다든가 혹은 거짓 예언을 했다든가 하는 율법상의 명목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 뜰안에서" 민중의 폭동 가운데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아마도 왕들의 역사 속에서도 가장 사악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 은 거룩한 제사장이었고, 그 "장소" 는 신성한 성전 뜰안(" 문 입구와 제단 사이에 있는" 안쪽 뜰안이 있다)이었으며, 그 "소식은" 더욱 거룩한 것으로서 그 소식이 예언의 영에서 나온 그 소식이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책망은 의로왔고 경고는 훌륭한 것으로, 모두 성서에 근거를 둔 말들이었다. 더욱이 그것을 전하는 그의 태도는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무례하고 대담하게 하나님께 맞섰다. 선지자의 피를 보지 않고는 그 예언에 대한 자기들의 분노를 풀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할지어다!" 인간들이, 더욱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의롭고 영예로우며, 거룩한 것을 이토록 경멸하고 모독하며 또 이렇게 악랄한 일을 행하다니! 또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왕이 왕을 보호하고 지지하는 직책을 맡은 자를 죽이라고 명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도다. 유대인들은 이들이 일곱 가지의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제사장, 예언자, 사사를 죽였으며, 무죄한 피를 흘렸고, 성전 뜰을 더럽혔다. 전승에 의하면 바로 안식일 곧 선행을 해야할 그날에 이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안식일을 모독한 것이다.
(3) 이 죄악을 가중시키는 사건이 있다. 즉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충성했기 때문에 순교를 당한 이 스가랴는 이스라엘에게 많은 선한 일을 행하고, 특히 요아스에게 아버지처럼 보살펴 주었던 여호야다의 아들이었다는 점이었다(22절).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었으며, 믿음에 대한 경멸이었다. 그것은 또한 여호야다에 대한 감사함을 전혀 생각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요아스는 스가랴의 아버지의 은혜를 기억하지도 않고 의무를 충실히 한 그 아들을 죽여버렸다. 만일 그 아버지가 거기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배은망덕한 자라는 호칭보다 더 수치스러운 호칭은 없다.
(4) 그 죽어가는 순교자는 자기를 죽이는 살인자들에게는 보복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서원하여 주옵소서!" 이 말은 복수의 영으로부터 나온 말이 아니라 예언의 영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서원하시리라." 이것은 가인을 고발하여 울부짖은 아벨의 피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흘린 피에 대한 끊임없는 울부짖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복수를 맡으신 하나님께 피로 갚아주실 것을 청하나이다. 그는 의로우시므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 귀중한 피의 호소는 이 배반한 왕에게 내려질 심판을 재촉했다. 이것은 이 후에 예루살렘이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멸망당하는 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그들이 선지자를 경멸했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구조될 수 없는 파멸 속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36:6). 나아가서, 우리 구주께서도 당신과 당신의 복음을 박해하는 자들은 이 스가랴의 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순교자들의 피는 이토록 오랫동안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이다(마 23:35 참조). 이러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우리의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계 6:10)하고 울부짖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Ⅳ. 요아스의 이 사악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했다.
1. 적은 아람 군대가 예루살렘의 주인이 되어 방백들을 죽이고 그 성읍을 약탈했고 노략물들을 다마섹으로 보냈다(23, 24절).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리 적의 군세가 막강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을 때는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와 반대로 얼마 안 되는 보잘 것 없는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심히 큰 군대" 를 패주시켰다. "이것은 그들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군세는 적과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매우 불리하게 되어 역습당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하나님이 떠나가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적이 되시어 그들을 치셨기" 때문이었다. 아람 사람들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도구가 되어 요아스를 징벌하였으나, 그들 자신은 그것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사 10:6, 7; 신 32:30 참조).
2. 하나님은 요아스에게 악한 신을 보내어 그의 조부나(21:18) 사울과 같이 그의 육신이나 마음을 괴롭히는 큰 병을 주셔서 죽게 하셨다. 요아스는 아람 사람들의 침입을 받았을 때는, 단지 그들만 처치해 버리면 모든 일이 잘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에게서 물러가기 전에 하나님은 그의 상처와 함께 그를 죽이셨다. 보복이 내릴 때에는, 한 고통이 끝나면 또 다른 고통이 오게 마련이다.
3. 그의 신복들이 그를 모반했다. 아마도 그는 그의 병이 치료되기를 바랬을 것이다. 아직 중년 나이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회복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함정으로부터 빠져 나오려는 자는 다시 올무에 걸리고 만다." 그는 자기의 병으로 인해서 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 때, 바로 칼에 의해 죽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인하여" 침상에서 요아스를 죽였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스가랴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여호야다의 다른 아들들도 죽였던 것 같다. 아마도 그를 살해한 자들은 그 피에 대한 대가를 갚으려고 "의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일을 행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도록 허용할 의도를 가지고 계시는 가에 달린 것이다. 성도들의 피를 마시는 자들은, 자신들의 피를 성도들에게 주어 마시도록 하게 될 것이다. 성도들의 피는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왕을 살해한 자들의 이름이 여기에 적혀있다(26절). 이들의 어머니들이 하나는 암몬 사람, 또 하나는 모압 사람으로써 모두 이방 여인이라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우상 숭배에 깊이 빠진 왕은, 우상 숭배를 막기 위해 율법으로 금했던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장려했던 것 같다. 그러한 결혼이 자초한 파멸을 보라.
4. 요아스는 그릇된 통치로 자기의 영예를 더럽혔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를 열왕의 묘실에 장사하지 않았다. "저희를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하소서" (시 69:28). 이러한 징벌들은 "중대한 중책을 받은 것" 이라 적혀있다(27절).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는 그 누구도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짐이기 때문이다. 또는 이것을 "경책" (영문에는 부담)이라 부른 것은 선지자를 통해 통고한 경고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흔히 하나님은 당신을 배반한 자들에게는 이 세상에 살 동안에도 진노의 특별한 표정을 찍으신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