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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29
로마서 5장 12절 [6장 3-4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은 모든 인류의 뿌리요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다룹니다. 1항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그들은 사단의 간계와 시험에 의해 유혹을 받아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 범죄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밖에서, 하나님의 눈 밖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그들의 이 죄는 하나님이 그의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을 따라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것을 정하도록 목적하사 허락하기를 기쁘게 여기셨다고까지 고백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영원 전에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장차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정하시되 불변토록 정하셨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 1항). 여기에는 인간의 타락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작정하신 그대로 섭리하시되,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세와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한 선하심은 첫 타락 및 사람들의 모든 죄들까지 확장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5장 4항). 그러나 작정하셨다고 해서, 작정하신 그대로 섭리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의 저자나 승인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작정에 대한 고백에서도, 작정의 실행인 섭리에 대한 고백에서도 여기에 대한 강조가 있었습니다. 먼저 작정에 대한 내용 3장 1항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죄의 저자인 것도 아니며, 피조물들의 의지에 강제성이 제공된 것도 아니며, 제2원인들의 자율성이나 우연성이 제거된 것도 아니라 오히려 확립되었습니다.”
섭리에 대한 내용 5장 4항 후반부 역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들은 단순한 허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장 지혜롭고 권능 있는 제한에 매이되,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목적들을 위해 여러 경륜 안에서 그들을 명하고 다스리심에 매인 자들입니다. 그러나 죄됨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피조물로부터만 나옵니다.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죄의 저자도 승인자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뿌리요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를 방치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여 범죄함으로 그들은 그들의 창조된 상태로부터 타락했던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3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 2항은 그 결과에 대한 것인데, 이 죄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떨어져서 죄 가운데 죽게 되었고, 영혼과 육체의 모든 기능들과 부분들이 전적으로 오염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은 3항과 4항으로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사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원죄의 구성 요소인 부패로 인하여 결국 우리 스스로가 자범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먼저 신앙고백서 3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인류의 뿌리인 그들은 일반적 출생에 의해 그들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모든 후손에 이르기까지(시51:5, 창5:3, 욥14:4, 15:14) 이 죄책이 전가되었고(창1:27,28, 2:16,17, 행17:26, 롬5:12,15-19, 고전15:21,22,45,49) 죄 가운데 동일한 죽음과 부패된 본성이 전달되었습니다.
여기서 ‘모든 인류의 뿌리인 그들은’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딕스혼 부부의 믿음의 고백이라는 책에 보면 아담과 하와를 인간 죄책에 대한 이중의 근원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전의 기독교 전통을 반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전통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생물학적 연관성으로 우리 첫 부모의 타락한 인간 본성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죄의 결과들에 참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이 부분은 실재론에 대한 설명입니다. 최근 죄의 전가와 관련해 바빙크의 책을 요약하여 설명 드린 바가 있지만(개혁교의학3, 6부 타락한 상태의 세계, 42장 죄의 확산), 전가 방식에 있어서 실재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 10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는 말씀에 기초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허리 안에 있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아담의 허리 안에 있었으며, 그리하여 아담의 죄는 모방이 아니라 번식을 통해 전달되고 출생을 통해 우리의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실재론을 신앙고백서는 ‘모든 인류의 뿌리인 그들은 일반적인 출생에 의해’라는 말에서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신원균 목사의 경우는 신앙고백서 해설서에서 “신조는 죄책의 전가 방식에 대해서 2가지를 소개한다.”고 하면서 실재론이 그 가운데 하나임을 말하기도 합니다. 실재론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성경이 과연 모든 인류의 뿌리로 아담과 하와를 말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딕스혼 부부의 책에서는 아담과 하와를 ‘온 인류의 뿌리’라고 묘사한 것은 1646년 전후의 잉글랜드 신학에서는 비교적 일반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아담만을 가리켜 ‘인류의 공통의 조상이자 뿌리’라고 말합니다. 또한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대회가 끝난 후 몇 해 안에 이 부분과 관련해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부분을 염두 해 두고서 다시 신앙고백서의 내용으로 오자면, 모든 인류의 뿌리인 그들, 즉 아담과 하와는 일반적인 출생에 의해 그들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모든 후손에 이르기까지 이 죄책이 전가되었고 죄 가운데 동일한 죽음과 부패된 본성이 전달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그들만의 타락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미쳤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조금 전에 “신조는 죄책의 전가 방식에 대해서 2가지를 소개한다.”고 말했는데, 실재론이 그 가운데 한 가지라면 다른 한 가지는 대표론입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서는 실재론보다는 대표론을 더 중심적으로 설명하는데, 모든 인류의 뿌리가 아담과 하와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타락이 모든 인간에게 미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담과 하와가 모든 인류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담이 모든 인류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강조는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우선 대요리문답 제22문입니다. 모든 인류는 아담의 첫 범죄 안에서 타락했습니까? 공적 인물인 아담과 맺어진 언약은 아담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을 위해서도 맺어진 것입니다. 일반적 출생에 의해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고, 아담의 첫 범죄 안에서 아담과 함께 타락했습니다. 소요리문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16문입니다. 모든 인류는 아담의 첫 범죄 안에서 타락하였습니까? 아담과 맺어진 언약은 아담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과도 맺어진 것입니다. 일반적 출생에 의해 아담의 혈통인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범죄했으며, 그의 첫 범죄 안에서 그와 함께 타락했습니다.
물론 아담을 모든 인류의 대표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덴 지역에서 전도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6절입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을 모든 인류의 대표로, 한 혈통의 뿌리로 두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난 자들이 아담의 본성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창세기 5장, 아담의 계보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1절에서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하면서도 아담의 자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5:3) 만약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죄의 전가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모양 곧 아담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만이 아니라 죄의 결과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모든 인류가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할 때 그 죄의 결과 죽음을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대표성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는 구절이 로마서 5장입니다.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12절을 먼저 보시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성경은 분명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를 대표로 하여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과 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명시된 내용은 불순종의 결과 죽음을 말씀하고 있지만, 역으로 순종의 결과 생명까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보편적으로 행위언약이라고 말하는 이 내용을 생명의 언약으로 설명합니다(제12문).
그러나 모든 인류의 대표인 아담은 순종이 아닌 불순종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대표성은 이어지는 15절 이하 19절에서도 설명되는데, 이 내용에서 중요한 것은 아담의 모든 인류의 대표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의 대표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여러분, 사람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습니다. 만약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의 대표가 된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무엇만 남는가? 아담을 대표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원죄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결과만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 문제를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 가운데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펠라기우스입니다(이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고). 영국에서 태어난 펠라기우스(354?-420)는 380년경에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 기독교의 순수한 번성을 기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많은 기독 신자들이 영적으로 게으르고 부패한 것에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왜 기독 신자들이 영적으로 게으르고 부패하게 되었는가? 그는 신자들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잘못 해석한 교리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에 대한 반동으로 사람의 자유 의지와 그에 따른 책임을 주장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에 나타난 선한 일을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이 전제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선이나 악을 택할 자유를 갖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이해는 아담과 하와의 부패한 본성이 그들에게 전달되어 악한 것만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람의 본성을 낙관적으로 여겨서 사람에게 부패한 본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죄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알미니안주의자들 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교회 역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던 겁니다. 성경은, 그리고 우리가 살피고 있는 신앙고백서는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인류의 뿌리요,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신앙고백서는 ‘일반적인 출생에 의해’라는 표현도 쓰고 있지만, 딕스 혼 부부는 여기서 ‘일반적인 출생 때문에’가 아니라 ‘일반적 출생에 의해’, 즉 그들로부터 보통 출생법으로 태어난 그들의 모든 후손이 타락하였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죄는 사람 대 사람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요, 심지어 부모에게서 육체적인 출생 방식에 의해서 자식에게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타락은 생식의 행위들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것은 단지 생식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이 되는’ 모든 이들에게 타락이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다고 할 때, 이 죄책이 전가되었고 죄 가운데 동일한 죽음과 부패된 본성이 전달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죄책은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말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 지은 죄인으로 선고받은 것을 말합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은 아담에게만 있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지만, 신앙고백서는 이 죄책까지 전가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죄에 대한 책임이 아담에게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라고 할 때 아담만 죄책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 역시 아담 안에서, 아담이 대표로 있기 때문에 동일하게 죄책을 가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되는 이유는 죄에 대한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유아로서 죽는 경우, 심지어 유산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법정에서 볼 때 죄 지은 죄인으로 선고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죄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어떤 면에서 세상 사람들의 논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있다는 것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있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죄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있습니다.
죄책만이 아니라 부패된 본성까지 전가되는데, 더 이상 사람은 처음 창조할 때의 모습처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부여된 사람으로 지음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파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타락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창세기 9장 6절에 보면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는 말씀을 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은 타락한 인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0-18) 간단히 말하면 일말의 선을 행할만한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의 부패함은 전적이라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부분, 부패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신앙고백서는 다윗의 고백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는 말씀, 욥기에 있는 말씀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14:4),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욥15:14)는 등의 말씀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담의 형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창5:3). 그러므로 아담의 첫 범죄 이후 모든 인류는 죄인으로 시작하지 무죄한 상태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말하는 것처럼 결코 백지 상태로 시작하는 사람은 일반적 출생에 의해 태어나는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이제 4항으로 넘어가겠는데, 방금 살핀 죄책과 부패의 전가를 신학에서는 원죄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원죄는 죄책과 부패로 되어 있는데, 아담의 죄의 결과 모든 인류가 죄를 전가 받는다고 할 때 바로 이 원죄를 전가 받는 것입니다. 죄책도 전가 받고, 부패도 전가 받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그 스스로 죄를 짓습니다. 이것이 자범죄입니다. 이 자범죄에 대한 진술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 4항입니다.
이 원래의 부패로부터 모든 자범죄들이 나오는데(약1:14,15, 엡2:2,3, 마15:19), 그 부패에 의해 우리는 전적으로 모든 선을 싫어하고, 행할 수 없고, 대적하며(롬5:6, 8:7, 7:18, 골1:21), 그리고 모든 악을 향해 전적으로 기울어집니다(창6:5, 8:21, 롬3:10-12).
조금 전에 로마서 3장에 있는 진술을 말했지만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까? 왜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까? 선을 싫어하고, 선을 행하는데 무능하며, 오히려 선을 대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이 아닌 악을 향해서만 달라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은 철저히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이 원래의 부패로부터 모든 자범죄들이 나온다고 고백합니다. 인용하고 있는 몇몇 성경 구절의 진술로 하자면, 야고보서 1장에 있는 말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입니다. 자신의 욕심으로 시험을 받는데, 그 욕심은 어디를 향하는가? 죄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2-3)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자신인 줄 압니다. 그러나 처음 창조될 때부터 인생은 자신이 주인공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 사단의 유혹으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지만, 사단의 거짓일 뿐 거기에는 하나님이 아닌 사단을 주인으로 삼는 결과만 낳았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생은 하나님이 아닌 사단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 결과 인간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냅니다. 야고보서 1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을 받아 죄라는 결과만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행하는데,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방향은 진노를 받아 마땅한 것만 쏟아낸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19절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원죄를 가지고 있는 자로 태어나기 때문에, 이미 부패한 본성을 따라 나기 때문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 등 이러한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늘 이것만 생각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또한 불신자이지만 신자가 볼 때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최근 안타까운 재난 소식도 있었지만, 그런 재난 가운데서도 돕는 손길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되었다면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이고,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사회 질서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행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으로 나타나는 선처럼 보이는 그 뿌리는 결코 선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5장의 진술처럼 악한 생각이 그 뿌리요, 살인과 간음 등이 그 뿌리입니다. 실제 살인, 실제 간음이 아닐지라도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율법 해석에 따르자면 살인과 방불한 생각과 마음이, 간음과 방불한 생각과 마음이 눈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불신자의 선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부패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자신의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부패한 것을 열매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결과 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것을 깨닫는 자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선이 아닌 악을 행하는 데로만 나아가는 것이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원래의 부패로부터 모든 자범죄들이 나온다고 할 때, 그 부패에 의해 우리는 전적으로 모든 선을 싫어하고, 행할 수 없고, 대적합니다. 선에 있어서 우리는 연약한 자요 무력한 자이며(롬5:6), 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선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아니 굴복할 수조차 없습니다(롬8:7). 그만큼 부패한 본성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롬7:17). 그래서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은 악한 행실밖에 없습니다(골1:21). 신앙고백서가 마지막 부분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행동은 모든 악을 향해 전적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 때부터 드러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식구 몇 명을 제외한 모든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패한 본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8:21) 그만큼 모든 악을 향해 전적으로 기울여져 있는 것이 부패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노아 시대 때 이 사실을 드러내셨다고 해서 그때서야 비로소 나타난 것인가?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 이후 놀라운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다름 아닌 형제 사이에 살인이라는 끔찍한 죄가 나타난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살인에 앞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그러나 죄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이 부패한 본성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동생 아벨을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가인의 후손 가운데 라멕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부패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4:23-24) 자신이 상처를 입고 상함을 받았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라면, 자신을 위해서는 벌이 칠십칠 배라고까지 말할 정도입니다. 죄에 대한 뻔뻔함만 있을 뿐,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러워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부패한 본성의 모습이요,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오늘날 그런 모습이 없다고 해서 이런 모습의 뿌리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양심을 붙드시고, 또한 율법이라는 용도를 통해 각 국가마다 그 법을 세워 죄가 확산되지 않도록 막으셔서 그나마 죄가 세상에 가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사람이 선해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아담 안에서 함께 타락하여 죄인으로 태어나고 부패한 상태에서 태어나 죄 외에는 쏟아낼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것이 아담을 뿌리로 둔,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둔, 그래서 일반적 출생에 의해 태어나는 모든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로마서 5장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의 대표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쳐나게 됩니다. 심판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지만, 하나님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르게 하십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지만,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됩니다. 이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의 대표입니다. 아담의 죄가 우리의 죄가 된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로 세워 그를 통해 의를 이루시고 그의 의를 우리의 의로 전가시켜 주시는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며, 여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 있는 겁니다. 그 선물을 우리가 받았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이고, 나아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닌 의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고 권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보게 하지만, 비참한 현실을 보게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 은혜에 더욱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그 은혜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믿는 자다운, 주의 백성다운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