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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기독교 종교의 영적 조상, 마술사 시몬>의 줄거리:
예수님의 이름을 관계하기에서 제3의 방식이 나타납니다. 교인들은 예수님 이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유대 종교는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박해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서 특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교인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받아들이는데, 사회생활의 교양과 마술을 위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기독교 종교의 영적 조상, 마술사 시몬
(사도행전 8장 9절~25절)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4.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기독교 종교의 영적 조상, 마술사 시몬>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기독교 종교의 영적 조상, 마술사 시몬’
제목 본래의 의미를 다 말씀드리자면 “예수 이름 신앙인, 예수 이름 교양인, 예수 이름 마술 애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을 부를지라도 신앙인이 아닌 교양인이나 마술 애호가가 된다면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20~23절을 보면 베드로가 사마리아인 마술사 시몬을 질책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질책이 예수 이름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마술사 시몬은 예수 이름을 받아들였지만 예수 이름 신앙인으로서 받아들였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 교양인이 되려 했고 예수 이름 마술 애호가가 되려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 신앙인과 대조되는 교양인과 마술 애호가의 상태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교양인이 된다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사회에 어울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세상에서 일종의 경향이나 흐름이 될 때 뒤쳐지지 않으려고 따라서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속함으로써 사회적 품위를 더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해서 예수 이름을 받아들이고, 예수 이름으로 연관된 문화적 분위기를 받아들임으로써 교양과 품위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술 애호가가 된다는 것은 속임수와 연관이 있습니다. 마술은 속임수를 통해 불가사의한 일을 일으키고 그로부터 관심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불가사의란 사람의 생각이나 논리나 상상이나 능력을 초월하여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마술 애호가들은 뻔한 이야기를 지양하고 생각과 상상과 힘이 미치지 못하는 차원의 일들을 지향합니다. 이처럼 불가사의한 일들이 삶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이름 마술 애호가입니다.
이처럼 사회생활에 있어서 품위를 더하기 위한 교양을 위하거나, 불가사의한 일들을 추구하여 예수 이름을 붙잡는다면 베드로의 말대로 무서운 저주에 해당되는 상태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마술사 시몬을 향해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라는 저주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저주가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나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았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많은 이웃 또한 여전히 예수 이름 교양인이자 예수 이름 마술 애호가로 살아가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시몬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사마리아에서 마술사로 이름을 떨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읽지 않은 9~11절을 보면 시몬에 대해 묘사하기를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따르고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길 정도였으니 정말 마술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마술로 사회의 지도자적인 위치까지 점하게 된 특이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아닙니다만 전승에 따르자면 시몬이라는 사람은 애굽에서 철학과 마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이 마술이 실제로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만 정황상 큰 기적이나 표적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 집사님이 행하는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 따르게 되었고, 마술사 시몬 또한 세례를 받고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포기하면서까지 이러한 일들을 배워보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술사 시몬이 한 일은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일들이었으나 어디까지나 숙련된 마술사의 범주 내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몬에 대한 언급을 보면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이름을 강력히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박해를 했습니다. 반면 교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받아들여서 목숨을 걸고 붙잡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서 특이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예수 이름을 관계하는 방식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교인과는 다른 제3의 방식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교인들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수용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유대인들처럼 마음에서 찬란한 세상을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는 이러한 특징을 쉽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만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던 시기에는 이러한 비교는 쉽지 않았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로 본격적인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가해지면서 흩어진 교인들에 의해 말씀이 전해지는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처음 일어난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이름을 왜 받아들이는가 봤더니, 예수 이름을 사회적 품위를 높이기 위한 교양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혹은 마술 애호가라고 할 수 있을 불가사의한 일들이 예수이름으로 나타나기를 바라서 예수이름을 받아들이더라는 겁니다. 이렇듯 예수 이름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유대인 못지않게 세상을 사랑하는 모습은 이제까지 없었던 제3의 방식 변종이 나타난 겁니다.
이렇게 인간세상에서 사회생활을 위한 교양적 차원에서 예수 이름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예수 이름 교양인” 그리고 삶에서 불가사의한 체험을 하고자 예수 이름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예수 이름 마술 애호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몬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앞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던 아브라함이 “예수 이름 신앙인”들의 조상이라고 한다면, 교인처럼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유대인처럼 세상을 사랑한 시몬은 “예수 이름 교양인, 예수 이름 마술 애호가”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를 살아가던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 이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었기에 예수 이름을 받아들이고도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빌립 집사님은 물론이거니와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인들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교인 중에서 그러한 일이 나타날 뻔한 사건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교인들은 그 일을 교훈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성에서는 이러한 특이한 상황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 이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예수 이름을 통하여 세상의 성취를 얻고자 하는 이상한 적극성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변형된 영적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의 조상으로 대표되는 인물이 바로 마술사 시몬이었습니다.
본문 12~13절을 보면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표면적으로는 긍정적인 일들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몬이라는 사람도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 세례를 받고 떠나간 것에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을 따라 세례를 받고 적극적으로 빌립 집사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표적과 능력을 보고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신앙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시몬은 사회적인 경향이나 흐름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사회적 흐름에 얼마나 민감했는지 자신의 자리를 쉽게 포기하고 자기에게 등 돌린 사람들을 따라서 세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시몬이 지도자로서 특별한 소신이나 신념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몬이 중시했던 것은 인간사회 속에서 형성되는 경향과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관심받기 위한 수단으로 마술을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빌립 집사님으로부터 자신의 마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었고 감탄하여 따르게 됩니다. 빌립 집사님을 자기보다 더 능한 마술사로 보았고 스승으로 모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마술사 시몬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교양과 마술이었습니다.
정리해봅니다. 시몬은 사회적 경향과 흐름에 맞추어 교양 있는 위치를 유지하고자 예수 이름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경향과 흐름 속에서 돋보이기 원하여 채택한 마술을 붙잡고 있는 차원에서 빌립 집사님의 기사와 표적과 능력을 배우기를 추구합니다. 세상을 위해 예수 이름을 사용하고자 붙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하매 방언을 말하는 등의 신비한 기사와 표적들도 나타났을 것입니다. 마술사 시몬이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자신도 기사와 표적을 일으킬 수 있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시몬의 마음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있었기에 세례를 받은 후에도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건네며 성령을 받게 해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오히려 무시무시한 저주를 받게 됩니다.
20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로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선물에는 관계성이 전제가 됩니다.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 이유 없이 선물을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돈을 받고 판다면 그것도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교인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성령의 역사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은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내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고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의식이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고백하며 동일시가 이루어질 때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영화로운 광채 속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 증거로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또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세상의 모든 가치를 젖혀둔 채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에서 소원의 형식으로 하나님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관계하기입니다. 이런 관계를 통하여 인자 예수님 안에서 마음이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보며 관계함으로써 몸이 살고 있는 땅에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일들을 베드로가 하나님의 선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사와 표적을 일으킬 수 있는 권능을 허락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세상에서 불가사의한 일들을 이루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불가사의한 기적과 표적과 권능이 나타남을 통해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천상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계심을 믿으라는 증거로 주신 것입니다.
시몬의 요구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상충되는 일이었습니다. 시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통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인자 예수님을 통하여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의 관계 전체를 제거해버리고 오직 이 세상에서 나타나는 기사와 표적과 권능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믿고 세례를 받았음에도 성령이 임하시지 않자 성령의 역사를 돈으로 사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결코 신앙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베드로는 시몬에게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며 저주를 내립니다. 이 저주는 시몬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 교양인, 예수 이름 마술 애호가들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예수 이름 교양인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단체에 속해 사회생활의 품위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마음이 연합하여 하나 되어서 천상에 올라가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 예수 이름 마술 애호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 이름을 붙잡음으로써 삶의 현장에서 인간의 생각과 상상과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들 또한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마음이 연합하여 하나 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마술사 시몬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모습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 또한 마술사 시몬의 후손으로 지내왔던 시간이 길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끔찍합니다.
또 베드로는 21절에서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란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증언 즉 말씀입니다. 이러한 도와 관계가 없고 분깃이 없다는 것은 예수 이름을 부를지라도 구원과는 무관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유는 전적으로 세상을 탈출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 세상을 탈출해야만 세상 있음의 느낌에 대해 죽을 수 있고, 세상 좋음의 확신에 대해 죽을 수 있고, 세상 소원함에 대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이 세상을 탈출하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다면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삶을 위하여 예수 이름을 이용하게 됩니다.
누가가 이러한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는 이것이 너무나 특이한 현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 신앙인”으로서 자성의 차원에서 그러한 사람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사실이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태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에는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도 세상을 탈출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교인들 사이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이러한 모습은 계속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마술사 시몬의 영적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기에 자성의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상상도 못할 충격이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머무르기를 바라는 유대인들이 예수 이름을 박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어둠 속에 묻어둔 채 세상을 찬란하게 바라보면서 관계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술사 시몬과 같은 사람은 마음이 세상을 떠날 생각을 하지도 않으면서 예수 이름을 받아들임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마음에서 찬란하게 보이는 세상을 위하여 예수 이름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도들과 교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마술사 시몬에 대한 일화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한편 시간이 흘러 2세기 무렵이 되면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라는 이단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전설에 따르자면 이들이 시몬의 계열을 따르는 자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외경 중에 베드로행전에서는 베드로와 마술사 시몬이 원수지간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성경 밖의 기록이기에 확실한 내용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내용으로부터 교회가 이러한 성향을 얼마나 경계하였는지를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해봅니다. 세상을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예수 이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예수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회적 경향이고 흐름이 되자 품위를 더하기 위하여 교양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예수 이름을 통해 사람의 상상과 능력을 초월한 불가사의한 일들이 삶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 이름 붙잡기는 결코 옳지 않습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아서 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말씀을 전하던 상황에서 이러한 사람들의 출현은 그야말로 충격적 사건이었습니다.
마술사 시몬은 어떻게 보자면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선조격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다는 스데반 집사님의 해석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구약 선민들의 조상을 넘어서 인자 예수님 안에서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보고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의 조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비되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본문에서 언급된 마술사 시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술사 시몬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예수 이름을 붙잡는 기독교 종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인과 교회를 기독교 종교로써 전락시킨 대표적 인물입니다.
우리 또한 기독교 종교의 교인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느 누가 세상 탈출할 것을 기대하면서 세례를 받고 성령 받기를 원해서 예수 이름을 불렀겠습니까? 교회의 태동기에서 사도들이나 교인들은 세상을 탈출하지 않고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세상을 탈출하는 것을 생각지도 않고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당연시 하였습니다.
지금도 예배당 모임에 소속된 것을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이러한 처지에 처해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통하여 세상을 떠난다는 생각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조상이 바로 마술사 시몬입니다. 마술사 시몬의 영적 후손들은 기독교 종교인으로서 편만하게 지구상을 덮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본문을 통해 이들 모두에게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몬의 후손들은 예배당 생활로 얻을 교양이나 불가사의한 체험을 기대하며 헌금도 하고 충성과 봉사와 헌신을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시도는 영혼을 망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 또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예수 이름 신앙인”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사도행전을 통하여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예수 이름을 붙잡고 세상을 당장 떠나야 한다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기독교 종교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관계할 수 있도록 인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셨으니 오늘도 하나님 관계하기에 승차하여 그 승차감을 만끽하며 나머지 세상일들은 하나님께서 관계하시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