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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천 조목의 인간상
월천서당
월천 조목의 생애
월천의 조상은 원래 교주도 횡천군(현 행정구역상 강원도 횡성현)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의 5대조인 참판공이 경상도 문경현 천곡리로 옮겨 살았다. 그리고 4대조 정자공이 거주지를 다시 예천군 금당곡으로 옮겼다. 이어 아버지 참판공이 예안에 사는 동지 권수익의 딸에게 장가를 갊으로 인해, 처가 동리인 예안현 월천에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월천은 1524년 3월 23일에 경북 예안현 월천리 집에서 태어났다. 이어 월천은 1528년(5세)에 비로소 책을 읽을 줄 알았다. 이 때, 그는 아버지 품속에 있을 때에 입으로 대학을 전수 받았다. 말하자면, 월천은 부친의 구송을 통해 대학의 원문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그는 대학을 듣고, 읽는 것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밤이 되었지만, 잠을 자지 않고, 늘 부친을 졸라대었다. “아버지, 왜 저에게 계속 가르쳐 주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는 이미 전해 받은 학문은 반드시 백번 이상 복습한 뒤에 그만 두었다.
월천은 1535년(12세)에 4서 3경을 모두 읽었다. 이어 13세 때(1536년)에는 정월달에 현사사에서 독서했다. 그리고 월천은 1538년(15세) 겨울에 비로소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퇴계는 농암 이현보의 아들 이문량에게 월천에 대해 칭찬하기를, “대춘(월천의 부친)은 훌륭한 아들을 두었다!” 라고 했다. 월천은 1539년(16세)에 처음으로 갓을 썼다. 이어 월천은 1541년(18세) 정월에 청량산에서 독서를 했다. 이어 그는 그 해 가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1월 석대암에서 독서를 했다. 이후, 월천은 1542년(19세) 6월에 안동 향교를 두루 유람하였다.
이어 월천은 1543년(20세) 정월에 현사사에서 독서했다. 그리고 10월에는 광흥사에서 독서를 했다. 그리고 월천은 1544년(21세) 11월에 풍기의 신재 주세붕을 찾아 가 뵈었다. 이 때 신재는 풍기 군수가 되어 그곳에서 재직했는데, 월천이 그를 찾아 가서 뵈었다. 이에 신재는 월천에게 그 고을의 향교에서 공부를 하도록 허락하였다. 이 때, 신재는 월천이 지은 글을 보고,
“이 글은 긴 강과 큰 하수처럼 끝없이 넓어, 중국의 한유가 남긴 글에 뒤지지 않는다”
라고 하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공평하고 관대하면 마음자리가 확 열리고
검속하고 공안하면 즐거운 시절 있으리니
영원히 주고 싶은 것은 오직 이 여덟 글자인데
늙은 이 몸은 실천하지 못해 부끄럽구나
이어 월천은 1545년(22세)에 백운동 서원을 유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546년 5월에는 어머니 초상을 당했다. 그 해, 11월에 용두산에 어머니를 장사지낼 때, 월천이 어머니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어머니의 죽음을 지나치게 슬퍼하자, 퇴계는 다음처럼 언급했다.
“월천은 대성할 그릇인데, 어린 나이에 여막에 거처하고 근심하여 스스로 너그럽게 억제하지 못하니, 저렇게 슬퍼하다가 몸을 상할까 염려스럽다”
고 하였다. 이어 월천은 1547년(24세)에 어머니의 무덤에서 다소 먼 거리인 퇴계의 처소까지 찾아가 스승에게 상례를 문의하였다. 그 해, 5월에는 담복을 입고, 여막에 거처하였다. 월천은 이듬해인 1548년(25세) 4월에 백씨와 사별하였다. 그해 7월에 어머니의 3년상을 마쳤다. 이어 12월에는 부용산에 어머님의 무덤을 이장했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지내던 월천은 1549년(26세) 때에 참봉 권개세의 따님을 을 아내로 맞았다. 5월 달에는 당시, 풍기군수로 재직하던 퇴계를 찾아뵙고, 백운동서원에 머무르면서 공부를 했다. 이 때 퇴계가 풍기군수로 재직했기 때문에 월천은 스승을 찾아 가서 그렇게 공부했던 것이다. 이어 월천은 1550년(27세)에 퇴계에게 경서에 대해 질문했다. 월천은 맹자 양혜왕 상편에 ‘곡속(觳觫)’ 아래 ‘약(若)’ 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래로 붙여서, ‘약무죄이취사지(若無罪而就死地)’ 7자로 구절을 삼았으나, 월천은 곧 이것을 위로 붙여 ‘곡속약(觳觫若)’ 3자로 구절을 삼는다고 했더니, 퇴계는 월천의 견해가 지극히 옳다고 인정하셨다. 무릇 경서의 구두와 글의 뜻을 해석 하는 데에 있어서, 월천이 질문한 것으로 인해 바르게 고친 것이 매우 많다. 이 때문에 퇴계는 항상 문인들이 의심나는 곳을 질문하면, 반드시 “조사경에게 물어 보라”고 하셨다.
이듬해인 월천이 1551년(28세) 정월에 퇴계를 찾아뵈었다. 퇴계는 하루 종일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는데, 뜻을 세우는 것과 독실하지 못한 행실 및 돌아보지 않는 말에 대해 순순히 타일러 경계하신 것이었다. 모두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말씀이었다. 이 어 월천은 그 해 가을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월천의 과거 응시는 이듬해에도 계속되었다. 29세가 되던 해 1552년의 봄에 생원회시에 합격했다. 이 때 월천의 장인이 집에서 축하 잔치를 베풀고자 했으나, 월천은 한사코 만류했다. 월천은 그해 11월에 현사사에서 계를 만들었다.
이어 월천은 30세가 되던 해인 1553년 12월에 성균관에서 유학을 했다. 월천이 성균관에 에 들어가서 베옷을 입고, 가죽 띠를 맨 채 문을 닫고 오로지 경전에만 힘쓰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월천은 30세(1554년)가 되었는데, 묵사동에서 신재 주세붕을 배알하고, 물러나 쉬셨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말씀드렸다. 이어 4월에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월천은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문을 올리려고 하다가 그만 두었다. 이 때, 문정왕후의 총애를 입고 있던 스님 보우가 정치에 관여하였는데, 월천이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문을 지어 퇴계에게 여쭈었다. 퇴계는 답서에서 다음처럼 언급했다.
“그 소문을 보니 역대에 고증해 놓은 것이 거울삼아 경계할 것이 아주 적절하고 환히 나타난다고 할 만 하네. 근년에 온 조정이 간하여 다투어 충성스러운 말과 바른 의논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직 이러한 예만 없으니 시험 삼아 천자가 사는 궁전의 섬돌을 두드려 간쟁하고픈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고명한 자네의 처지로 봐서는 말없이 그대로 있는 것이 좋겠네."
고 하셨다. 그러므로 월천은 마침내 상소문을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9월에는 칠원 무릉동에서 주신재의 죽음을 슬퍼했다.
월천과 퇴계의 교제는 이어졌다. 월천은 1555년(32세) 2월에 퇴계의 서찰에 다음처럼 답했다.
“[연평답문]을 혹 하루 몇 절씩 보거나 혹 하루에 한 절을 보면서, 점점 재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절이 있는데, 저를 위해 말씀하시는 것 같아 스스로 감격해 콩을 먹고 냉이를 먹으며 살아가는 일로 삼습니다.”
5월에 퇴계에게 글을 올렸다. 퇴계의 답서는 다음과 같다.
“가난이라는 것은 선비들의 일상적인 일이지만, 그대는 참으로 이른바 일단사일표음도 없는 형편이니 그 처신하는 도가 어찌 옛 사람들이 만났던 것 보다 더욱 어렵지 않겠는가?”
라고 했다. 또 퇴계에게 글을 올려 호연지기의 논설을 논했다. 월천의 논설은 다음과 같다.
“호기를 기르는 것은 다만 오랫동안 공부가 쌓여야만 되는 것으로써 반드시 물욕이 사라지고, 의리가 밝게 통한 연후에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고, 사람을 굽어보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며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편안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기가 강재하고 호연하여 부족함이 없어서 비록 천지간에 충만하다고 하더라도 차근차근히 점진적으로 공부하여야만 될 것입니다. 말씀드리건대 아마도 몽연한 하학지인이 결심이 서지 않고, 선악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호기를 가볍게 구하려고 할 것 같으면 사물의 궁극적인 작용에 대하여 억지로 찾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어 월천은 그해 6월에 분천의 농암 이현보가 죽자, 조문하였다. 12월에는 향리에서 행하던 과거의 별시
에 응시하여 5등을 하였다. 월천은 1556년(33세) 3월에 퇴계의 시문을 받았다.
이어 월천은 다시 성균관을 향했다. 월천의 나이 34세가 되던 해인 1557년 4월에 다시 성균관에 유학했다. 이듬해(1558년)에 월천은 35세였다. 5월에 월난사에서 독서를 했다. 이 때, 퇴계가 도산에 계셨기 때문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에 대해 질문했다.
월천은 1559년(36세) 정월에 권대기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부용산에 올라가 독조동에 정사를 세울 것을 의논했다. 시를 남겼다. 독조동은 집 뒤 3리쯤의 거리에 있다. 이어 3월에는 청원대를 쌓았는데, 독조동에 있다. 이 해에 아들 구붕이 태어났다. 이듬해(1560년)는 월천의 나이가 37세가 되던 해였다. 3월에 퇴계를 모시고, 부용산에 올라가 정사터를 정했다. 4월에는 월난사에서 독서를 했다. 그리고 스승인 퇴계를 모시고 고산에 노닐었다. 시문을 지어 서로 주고받은 여러 작품이 있다.
월천은 1561년(38세) 3월에 퇴계에게 글을 올려 [부용산대]로 호를 정했음을 아뢰고, 또 문산의 출처에 대해서도 논했다. 이어 1562년(39세) 3월에는 퇴계를 모시고 취미봉에 올랐다. 5월에 퇴계에게 글을 올려 『심경』을 논했다.
월천이 1563년(40세) 3월에 퇴계는 돈궤미를 보냈다. 이 때 월천의 집에 식량이 떨어졌다. 퇴계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이처럼 돈궤미를 보낸 것이 여러 번이었다. 또 시를 지어 다음처럼 표현하였다.
인간의 가난, 부자 바다마냥 아득아득
임의 궁곤 생각하면 한숨 절로 길어지네
금리의 낡은 집은 부서짐을 보았는데
옥천은 더더구나 남종 한 놈 도망갔네
풍월은 못에 가득 동이엔 술이 없고
시서로 배 채우되 얼굴빛은 노랗다니
옛 사람이 물려준 즐거운 일 힘입어
아침에는 형비 읊고 저녁엔 상성노래
월천은 그해 6월에 아들 구붕을 잃는 슬픔을 맞게 되었다. 8월에는 도산 서당에 가서 퇴계를 찾아뵙고, 거기에서 머무르면서 경학을 강론했다. 월천은 이듬해인 1564년(41세) 7월에 스승 퇴계를 모시고, 자하봉에 올랐다. 그 봉우리는 퇴계동 입구에 있다. 월천이 월천야경을 말씀하시자, 퇴계가 감탄하면서 시 한수를 추가로 지어 부쳤다.
도산 서당에 달 밝으니 월천 서당에도 달이 밝고
오늘 밤에 바람 맑은데 어제 저녁에도 맑았네
특별히 일반 광풍제월한 곳이 있어서
우리들은 어떻게 명성을 증험하는 경지를 얻을까
월천의 화답시는 다음과 같다.
부용동의 푸르름은 도봉산의 푸름에 접하고
풍월담의 맑은 물은 퇴계수의 맑은 물에 잇닿았네
정말 좋구나! 진리의 근원을 찾아 발걸음을 내 딛는 곳에
내 마음에 명성을 의논함이 없는 것이 부끄럽네
이듬해인 1565년(42세) 6월에는 퇴계에게 글을 올려『심경』을 논하고, [인심도심정일집중도]를 고칠 것을 아뢰었다. 8월에 퇴계에게 글을 올려 [심경심학도구방심] 일절과 여러 장의 주설을 논했다.
그해 9월에는 퇴계를 모시고 시내 남쪽 능운대와 오담 등의 여러 곳을 유람했다. 이때 역동서원의 설립을 의논하면서, 이곳을 유람했었다. 12월에는 퇴계를 배알하고 [심경부주]와 [대학장구]의 일유지설을 변론했다. 왕복한 서찰이 있다.
월천의 나이가 1566년(43세) 2월에 전조로써 천거되었다. 월천은 조정으로부터 장사랑공릉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퇴계가 조정의 부름을 받자, 월천은 일어나 별장 3절을 올렸다.
이어 7월에는 퇴계를 찾아뵙고 [심경]을 질의했다. 월천은 44세가 되던 해(1567년) 12월에 역동서원 사적을 기록했다. 퇴계는 원기(院記)를 짓고는 조군의 기록이 상세하니 모든 서원에 간직하라고 하셨다.
월천은 이듬해인 1568년 정월에 퇴계에게 글을 올려 향증서치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논했다. 3월에 성균관의 우두머리로 천거되었다. 6월에는 집경전참봉에 제수되었다. 이어 8월에 부임을 했다. 이에 퇴계는 다음의 시를 지었다.
한 마리 새 숲 떠나자 또 한 마리 뒤라 따라
동서로 오고 가며 얽매어 사는 신세
어떨는지 저 구우에 보란 듯이 함께 그쳐
자유롭게 울어대고 자유롭게 나는 것과
12월에 휴가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는데,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퇴계는 당시 다음의 시를 써서 보내 주었다.
다래의 조군이 하찮은 벼슬에 나갔다가
세상사 생각과 맞지 않음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앞 내에 풍월이 가득 차고
즐거운 마음으로 홀로 앉아 옛 사업을 찾는 구나
월천은 47세 때인 1570년에 사위를 맞아 친영예를 행했다. 이때 혼인하는 집안에서는 모두 속례를 썼다. 월천이 개연히 고례를 따르려고 퇴계에게 아뢰고 난 뒤에, 한결같이 [가례절목]에 의해서 그것을 행하니, 원근 향리에서 다투어 서로 사모하고 본받았다. 그 해 7월에 퇴계를 모시고 제생과 더불어 역동 서원에 모여 [심경]을 강의했다. 8월에는 좨주 우탁 선생을 역동 서원에 봉안했다. 역동서원 [춘추향용축문]을 작성했다.
그해 11월에 퇴계가 병을 앓았다. 이에 월천은 계상에서 퇴계를 모시고 약을 올렸다. 그러나 스승은 제자를 두고, 12월 8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월천은 기년 동안 베로 만든 띠를 매고, 3년 동안 안방에 들어가지 않고, 잔치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월천은 이듬해인1571년(48세) 2월에 퇴계의 제사에 참석했으며, 3년 상을 마친 뒤에 그 신주를 그의 조상의 신주 곁에 모실 때 지내는 제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월천은 1572년(49세) 2월에 동몽교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4월에 동문들이 모여 도산에 상덕사를 세울 것을 의논했다. 5월에 퇴계의 [언행총록]을 작성하고, 동문들과 함께 [퇴계연보]를 작성했다.
월천의 나이 1573년(50세) 4월에 부친상을 당했다. 8월에 부용산에 부친을 장례하고, 어머니 정부인 권씨와 합장했다. 묘갈명과 묘지문이 있다. 월천이 여묘 곁에 거하며, 기년 동안 죽만 먹어 몸이 여위었다. 3년 동안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부인이 병이 중하여 죽게 되자, 매장하고 돌아왔다. 이해 , 6월에 3공과 이조가 함께 의논하여 학행이 드러나게 들리는 사람을 계하는데 월천을 으뜸으로 쳤다. 그 다음이 이지함, 최영경, 김천일이다.
이어 월천은 1574년(51세) 9월에 남에게 부탁해서 오건에게 제수를 보냈다. 이어 1575년(52세) 6월에 종부시주부에 제수 되었다. 이조에서는 월천이 부모상을 마치지 않았음을 채 알지 못하고 이러한 벼슬을 제수하셨다. 이어 월천은 3년 상을 마쳤다. 이어 선교장조지서사지에 제수되었으나, 월천은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다시 공조좌랑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그해 7월에는 조지서사제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53세) 정월에 조지서사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2월에는[도산서원봉안제문]을 지었다. 5월에는 [이학통록]의 발문을 지었다. 그리고 8월에는 [도산서원춘추향사항용축문]을 지었다. 그리고 10월에는 봉화현감에 제수되어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12월에는 도읍에 당도하여 주상의 은혜에 사례했다.
이어 1577년(54세) 정월에 선무장을 받았다. 그러나 월천은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용인 양벽정에 숙박했다.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차가운 해는 서쪽으로으로 지는데
내 갈 길은 어찌 어리도 빠른가?
임금이 사시는 대궐은 날로 멀어지는데
이 말은 자주 몸을 구부리는구나.
구담 이 지번의 옛 집을 방문하고 시를 남겼다. 죽령을 넘었다.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장림에 긴 수풀이 없고
죽령에 대나무가 없도다
대저 실지는 있지 않는데
인간에 장림 죽령이 그 얼마나 있었던고
월천은 그해 2월에 소나 양의 희생 없이 채소만 올리고 지내는 간단한 석전인 석채례를 거행했다. 이 때에 월천이 생도들을 모아 [소학]과 [대학]을 강의하니, 먼 지방의 학자들이 풍문을 듣고 와서 모여 향교에서 다 수용할 수 없었다. 4월에 승훈라에 제수 되었다. 이어 1578년(55세) 3월에 문수산을 유람하였다. 시를 남겼다. 이어 4월에는 청량산을 유람하였으며, 시를 남겼다. 8월에는 도산향사에 참여했다. 제사를 지낸 후 동문 여러 사람들과 함께 천연대에 올라가 시 한절을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임 가신 빈 산골에 새는 슬피 울고
칡덩굴, 소나무 계수나무만 얽혀 있네
가을 하늘 구름은 원래 무정타더니
한가로이 천연대를 향하여 석양빛을 희롱하네
모든 퇴계 문도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소백산을 유람하셨으며, 시를 남겼다. 1579년(56세)에 부실이 아들 수붕을 낳았다. 이어 봉화 향교를 증수했다. 향교가 옛터를 잃어서 궁벽하게 고을 서쪽에 있었다. 향교의 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이른바 옛터에는 곧 이미 향서당을 세웠었다. 월천이 말에서 내려 곧 향리 사람들을 모아 향교를 옛터로 복구할 뜻으로써 가르치고, 명하여 향서당을 철거하게 하고 공자를 모신 사당을 여기에 옮겨서 창건했다.
이보다 앞서 송나라 현인들의 자리 차례가 우리나라 현인들과 남쪽 모퉁이에 나란히 늘어놓았었다. 월천이 일찍이 미안하게 여겨서 봉안하고자 할 때에 임금님께 여쭈어 바르게 고치고자 했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 전의 제도를 넓혔다.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관직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왔다. 그 후에 이 뜻으로써 조정의 대관에게 말해서 그들로 하여금 계를 올려 그것을 고치기를 청하였다. 여러 고을 성전에서 송나라 현인들의 자리가 바르게 된 것은 모두 여기서부터 시작 되었다.
7월에는 관직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9월에는 여러 생도들과 더불어 청량산을 유람했다. 주고받은 시가 있다. 여러 생도들에게 월천서당에서 강학했다. 이로부터 원근 학자들이 다투어 달려와 배우기를 청했다.
1580년(57세) 3월에 예천 덕진동 선조묘를 가서 살폈다. 이어 [주자대전]을 초해서 한 책으로 만들고, 이름을 [주서초]라 했고, 또 선현들이 간절히 자기를 훈계하는 말을 써서 이름을 [곤지잡록]이라 했다. 월천이 어려서부터 [주자대전]과 [근사록]과 성리학 관련 서적 읽기를 좋아하여 종일 그치지 않았고, 밤이면 반드시 등불을 밝히고 향을 피우고 갓과 옷깃을 가지런히 하여 내용의 심오한 이치를 더듬어 찾았다. 등불이 없으면 줄줄 글을 외우며 새벽을 기다렸다.
6월에 공조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7월에는 전라도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9월에 경상도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제생을 도산에 모아 강학했다. 향중 동지들과 더불어 매 삭망마다 서로 모여 알묘하기를 약속하고, 제생에게 독서한 바를 강론하고, 드디어 원규를 지었다. 10월에는 의령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1년(58세) 정월에는 역동 서원에 제생들을 모아놓고 강학했다. 고령현감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4월에는 충청도도사에 제수되었다. 5월에 도읍에 이르러 은혜에 사례했다. 6월에 부임했다. 8월에 여가를 받아서 고향으로 돌아와 문경, 예천에 있는 선조들의 묘를 두루 살폈다. 그리고 사퇴하고 나오지 않았다. 1582년(59세) 8월에 형조좌랑 및 공조좌랑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3년(60세) 10월에는 신령현감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4년(61세) 9월에 [퇴계 선생 문집]을 모았다. 승의랑 영덕현령에 제수되었다. 그 당시에 임금님으로부터 교서를 전하였는데, 이르기를,
“조목과 정구는 모두 쓸만한데, 어찌 부름에 의거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 제수가 있었다. 풍기에 이르러 상소문을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1585년(62세) 정월에 공조좌랑 겸 교정청낭청에 제수 되었다. 2월에는 주상의 부르심을 받고 도읍으로 들어가 상소문을 올리고, 사퇴하기를 청원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관직을 옮겨 공조정랑을 받고 사직 상소문을 올렸다. 3월에 드디어 고향으로 내려 왔다. 4월에 부실에게서 아들 석붕이 태어났다. 5월에 전생서주부 겸 교정청낭청에 제수 되었다. 이어 봉훈랑에 제수 되었다. 11월에 공조정랑 겸 교정청낭청을 제수 받아 주상의 부르심을 받고 도읍에 들어갔다.
1586년(63세) 2월에 상소를 올려 물러나기를 바랐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3월에 순장을 드렸다. 4월에 하향하였다. 9월에 상서원 판관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금산 군수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7년(64세) 정월에 단양군수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4월에는 장원서장원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5월에는 동문을 여강서원에 모우고 [퇴계선생문집]을 교정하였다. 월천은 동문들과 서로 모여 교정했다. 어느 날 저녁에 여가를 내어 음식 자리를 폈다.
6월에는 봉직랑 공조정랑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는 공조정랑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2월에는 도읍에 나아가 주상의 은혜에 사례했다. 1588년(65세) 정월에 부임했다. 3월에 신재 주세붕의 아들인 교리 주박을 천곡리에서 장사 지냈다. 박은 곧 주신재이 아들이다. 월천과 동갑이다. 주박은 이 달에 신재 선생의 행장을 구하기 위해 경남 칠원 등지를 내방했다가 마침내 병을 얻어 군 전곡리에서 죽었다. 월천이 가서 조상하여 상구를 지극히 다스렸다. 강가에서 돌아가는 널을 곡하며 보냈다. 제문과 만사가 있다. 통선랑에 제수되었다.
윤 6월에는 용문에서 비가 오기를 기원하였다. 이 당시에 몇 달 비가 오지 않아 삼농이 폐하게 되었다고 아뢰어 왔다. 월천이 글을 지어 비 오기를 빌었는데 그 정성과 공경함이 지극했다. 제사 지내던 날에 단비가 크게 오니 백성들이 모두 와서 축하했다. 7월에 병으로써 감사에게 사직 상소를 올렸지만, 허락을 얻지 못했다. 8월에 석채례를 행했다. 여가를 받아서 성묘했다. 금오산서원을 방문하여 인동에 있는 야은 길재의 묘를 배알했다. [사문수간]을 편집했다. 퇴계 선생이 평소에 손수 보내 주신 서찰을 모아 꾸며서, 8권을 만들고 항상 책상위에 두면서 때때로 완미하면서 스승을 추념했다.
1589년(66세)에는 향교를 중수했다. 이보다 앞서 향교는 군 북쪽에 있었다. 지세가 협애하여 사우가 기울어져 무너지니, 월천이 한 군의 유생들을 모아 놓고서 중수할 것을 건의했다. 곧 옛터의 북쪽에 땅을 점쳐 골랐다. 드디어 날마다 친히 가서 후사를 감독하니, 1년쯤 되어서 낙성했다. 8월에 석채례를 행했다.
10월에 가야산을 유람했다. 시가 있다. 조봉대부직을 하사받았다. 1590년(67세) 5월에 감사에게 사직하는 장계를 올렸다. 그리고 사퇴하고 통보를 기다리지 않고서 돌아왔다. 떠나오는 짐이 간단하여 오직 서책 몇 권을 실었음 따름이다. 향사회에서 전별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시를 남겨 이별했다.
고령을 지나갈 때 사문 김면이 그 생도와 함께 나와서 길 왼편에서 전별했다. 9월에 월천서당을 중수했다. 시와 기문이 있다. 동쪽에 한 기슭이 있으니 높고 시원하며 시원한 땅이 탁 트여져 있다. 아침저녁으로 올라가 바라보고 인하여 자호를 동고만보라 했으니, 대개 먼 조상 문정공이 개성부에 계실 때 동고에다가 독락원을 연 것을 되살려 생각한 까닭이다. 항상 도연명 시를 사랑하여 매번 나가 놀 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문 앞에 6그루의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하루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6은 음수여서 호로 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만약 또 한그루의 나무를 심으면 곧 내 나이가 말년이 다가오니 아마 그 자라남을 보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하나를 제거하여 5 그루만 있게 하여 마침내 도연명과 함께 일컫는 것이 또한 옳지 않는가?”
드디어 명하여 한 그루를 베어 내게 하고 한가하게 살며 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제사 때가 아니면 곧 일찍이 명주나 비단의 종류는 입지 않고, 매 저녁에 자제에게 명하여 샘물을 길어 단지에 채우게 하여 곁채 아래에 두고 닭이 울면 홀로 일어나 손과 발을 씻었다. 만년에 이르러서 궁벽하여 능히 의관을 갖추지 못했다. 즐겨 평량립을 썼으며 비록 재상을 볼 때도 또한 그와 같았다.
1591년(68세) 4월에 섭취원을 축조했다. 동산은 서당 앞에 있다. 꽃나무를 그 가운데 심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거닐었다. [한중잡록]을 손수 베끼셨다. 월천이 [무명공전]과 [무이정사서]와 [도산기] 등 10여 편을 모아 베껴서 이름하여 [한중잡록]이라 하고 늘그막에 읊조리고 완상하는 자료로 삼았다. 또 잡록 한 책이 있는데 소학제사, 경서서, 당의서와 다른 잠명 여러 글 80여 편을 베끼셨다. 항상 펴서 완역하며 책상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12월에 역동서원에서 눈을 감상했다. 회나무를 읊은 시가 한 절이 있다.
1592년(69세) 2월에 조산대부를 제수 받고 제용남첨정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4월에 왜적이 육지에 올라와 주와 군을 이어서 함락시켰다고 들었다. 이때에 장군과 병사들은 갑옷을 버리고, 수령들은 달아남으로써 시골구석의 사민이 거의 다 쥐처럼 달아나 숨었으나 월천은 홀로 서당에 사셨다.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현의 관리들을 불러 성을 비워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써 가르치셨다. 또한 고을 원에게도 고한 것을 전하도록 하여 이 성읍이 온전함을 얻었다.
5월에 왜적이 경성을 핍박해 오니, 양궁이 서행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월천이 광현에 올라가 북쪽을 향해 통곡하셨다. 병사와 군량을 모을 것을 의논하셨다. 향중의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서로 상의하여 식량을 모으고 병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였다. 김해로서 그 일을 통솔하게 했다.
1593년(70세) 4월에는 봉선암에 가서 외증조의 묘를 살폈다. 8월에 임금님의 수레가 막 도읍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들과 대궐 아래로 나아갈 것을 의논했다. 월천이 비암에 가서 금응협, 금난수, 금응훈을 맞아 서로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모두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나 임금님의 수레를 따라가지 못했고, 이제 임금님의 수레가 돌아온다는 기약을 듣고 서로 더불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도읍에 다달아 다시 천자의 남은 빛을 보게 된다면 곧 죽어도 또한 한이 없다.”
라고 했다. 출발에 임해서 마침 병으로 가지 못했다. 시를 지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금님의 수레가 서쪽으로부터 돌아 왔다는 소식을 기쁘게 들으니
종묘와 사직 2년간 거듭 편안 하도다
영외의 미천한 신하의 몸이 늙고 병들어
마음에 걸려 임금님의 얼굴을
바라볼 길이 없구나
9월에 청음석을 유람했다. 시 한 수를 지었다.
붉은 잎 누런 꽃이 눈 가득히 가을인데
푸른 시내 푸른 산봉우리가 둘린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시름겹게 하도다
변방의 티끌 쓸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한이 많도다
해를 바라보며 임금을 생각하여 몇 번이나 머리를 들었네
임진왜란 후 항상 시내와 산 사이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경치가 비록 좋으나, 시사가 이와 같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슬픈 느낌을 이기지 못할 따름이다.”
라고 했다.
1594년(71세) 6월에 역동서원에 깃들어 살았다. 제생과 더불어 [심경]을 강론했다. 9월에 흡곡 현령에 제수되었다. 10월에는 도읍에 다달아 군자감 주부를 제수 받고 은혜에 감사하고 상소했다.
1595년(72세) 2월에 교지가 있어 달려 나아가 진소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월에 양양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임금님께서 본도에 명하시어 먹을 물건을 내리셨다. {고경중마방}을 손수 베꼈다. 월천이 그 후기를 지었는데 거기에 “존경하는 선사 퇴도 선생께서 평소에 손수 초록하셔서 날마다 깊이 닦는 것으로 삼았다.” 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일찍이 내어서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사망하신 20년 후에 도산서원에서 얻어 보고 마음으로 몹시 그것을 사랑했다. 곧 기록하여 전하라고 하셨다. 이에 날마다 읊고 익히며 그만두지 않았다. 9월에 장악원정에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퇴계선생 지문을 손수 쓰셨다. 12월에 사섬시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6년(73세) 체찰사 이원익이 내방했다. 조묘를 살폈다. 참판공묘가 불에 탔다. 다달아 곡을 하고 석달을 소복했다. 한식날 제사 지낸 후 어린 종이 향불을 삼가지 못하여 참판공의 묘가 불타는데 미쳤다. 윤 8월에 퇴계월천 묘에 모여서 전을 올렸다. 지석을 묻고 고문이 있다. [주역]의 구결 표지를 고쳤다. 이보다 앞서 구결의 의심스러운 곳을 월천께서 참작해서 그것을 고쳤다.
1597년(74세) 정월 8월에 범씨의 [심잠]을 외웠다. 이날 월천이 새벽에 앉아 외우기를 여러 번 하시고, 인하여 주시를 읊으며 배외하여 시, 서, 악을 싫어하지 않았다. 마음 속 깊이 사무치게 느끼어 충효심 두 구를 잊기 어려워 세 번 거듭 눈물을 흘리며 곧 말씀하시기를,
“나이가 늙고 기력이 쇠하여 때가 위태롭고 세상이 어려우니 일에 닿아 슬픈 느낌이 들도다. 탄식하고 탄식하도다!”
라고 했다. 정승 서애 류성룡에게 답하는 글에서 화의의 잘못됨을 논했다. 9월에는 향인들과 함께 태조대왕 상에 왜란으로 손이 땅에 닿도록 머리를 숙여 공손하게 절했다. 이때 태조대왕의 상이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경주로부터 현동 백동 서당에 옮겼다. 이에 이르러 조정에서 예관을 보내어 강릉으로 받들어 옮겼다.
1598년(75세) 8월에 예천 선조 묘에 가서 성묘를 드렸다. 12월에는 낙동강에 눈이 내리는 것을 완상했다. 시도 짓고 서도 썼다. 1599년(76세) 정월에 도산서원 묘를 배알했다. 고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금님의 성광이 몹시 성을 내어 그치 아니하여
해적이 스스로 숨고 국가에 복이 있어
왕세자의 맏아들이 출생하셨으니 보통 기쁜 것이 아닙니다.
더 큰 경사가 없습니다.
고 하고 가묘에 고했다. 7월에 백운동 서원을 유람했다. 여러 생도들과 더불어 월천 서당에서 강학했다. 제생이 월천이라 부르면 곧 반드시 엄한 말로 그것을 거듭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월천을 도둑질함이 있었는데, 내 평생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 한 것이 많도다. 지금의 월천이라 부르니, 이러함을 없애라! 나를 부르는 것은 월천옹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라고 하였다. 1600년(77세) 5월에 퇴계 문집 간행을 마쳤다. 동문들과 제생들이 도산서원에 모여 사당을 참배하고, 퇴계 문집을 완성했음을 아뢰었다. 고문이 있다. 7월에 의인왕후 상을 들었다. 현의 관에 임하여 곡했다. 상복을 입고서 물러났다. 1601년(78세) 정월에 사재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는 대의 바위에 천연대라는 큰 글자 석자를 새기고 사당에 고했다.
고유문이 있다. 11월에 청량산을 유람했다.
1602년(79세) 2월에 상의원정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예빈시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윤 2월에 특별히 절충장군의흥위부호군으로 등급을 올려 주었다. 통정대부 공조참의의 벼슬을 받았다. 4월에 은혜에 사례하고 길을 나서 영천에 이르러 병이 났다는 글을 드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7월에 교정청당상으로서 교지가 있어 달려가서 병이 났다는 글을 드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교정청당상으로서 교지가 있어 달려가서 병이 났다는 글을 드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교지가 있어 달려가서 병이 났다는 글을 드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1603년(80세) 정월에 도산서원과 역동서원 두 사당을 참배했다. 매년 정월 5일이면 동지들과 학생들을 거느리고 도산 사당을 참배했다. 그리고 역동사당도 참배했다. 기력이 이미 쇠한 후에도 또한 그만 두지 않았다. 2월에 도산에서 향사에 참여했다. 9월에 아들 석붕이 생원회시에 합격했다. 왜란을 피하는데 이르러서 숲과 나무 사이에 살면서도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게을리 하지 않았다.
1604년(81세) 정월에 도산서원과 역동서원 사당을 참배했다. 2월에 봉화의 금난수를 사별하고, 조문했다. 금난수는 월천의 매부이다. 3월에 도산서원에 유숙했다. 7월에는 특별히 가선대부 용양위 부호군으로 등급을 올려 주었다. 윤 9월에 부용정사를 완성했다. 월천이 어릴 때부터 경영에 뜻이 있어 서식할 곳을 만들고자 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했다. 퇴계시에 다음처럼 언급되어 있다.
구름에 반이 묻힌 저 남녘 봉우리는
부용이 푸르러라 그 이름 아름답네
주인 또한 연하여 성벽이 있는 자라
모동의 깊은 생각 오래도록 못 이뤘네
이 해의 가을에 8칸을 지었다. 두 개의 재는 정관재, 수약재이다. 헌의 이름은 고명헌이다. 못은 군자못이라고 했다. 못 가운데 큰 돌이 있으니 미견으로써 이름을 지었다. 집 북쪽에 대를 쌓아 미고라고 불렀다. 이는 퇴계가 일찍이 유람하셨던 곳이다. 그리고 도산이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까닭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고의 아래에는 음롱대가 있다. 동쪽 기슭에 두 누대가 있는데, 위의 것은 청원대이며, 아래에 있는 것은 광제대라고 한다. 퇴계께서 주신 시를 난간 벽에 걸어 놓았다.
1605년(82세) 정월에 도산서원의 사당을 참배했다. 고질병이 깊어 낫지 않은 채 해를 넘겼다. 2월에 선대를 추증하는 직첩이 내려 왔다. 9월에 병든 몸으로 본현전패에서 은혜에 사례했다. 1606년(83세) 정월에 도산서원 사당을 참배했다. 8월에 외조의 기제를 행했다. 당시 병을 몸에 지닌 것이 이미 32년째였다. 자제들이 제사에 참여 하시지 말 것을 청하니 월천은 다음처럼 언급했다.
“내가 병이 들어 제사에 행할 날이 많지 않다. 또한 내가 죽은 후에 자손이 한 사람도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으니, 어찌 남으로 하여금 그것을 행하게 하겠는가?”
드디어 고생이 참고 어려운 일을 버티어 나아가 제사를 행하니, 기운이 더욱 고르지 못했다. 10월 미시에 마침내 운명했다. 문인들이 막 초상을 치르고자 하자, 집에는 베 한 자, 곡식 한 말도 없었다. 이웃 사람들이 도와 겨우 장사를 치렀다. 조정에서는 11월에 월천이 죽었다는 부음을 들었다. 제사를 내리도록 명하셨다. 이 때에 유생 이윤우 등이 쌍청동에 모여서 곡했다. 조정의 재상들이 모두 조문을 짓고, 부조를 했다.
1607년 정월에 부용산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서북쪽에 자리해서 동남간방을 향한 언덕에 월천서당과 50여보 떨어져 있다. 1614년 11월에 월천의 위패를 도산서원에 종향하기를 임금님께 청했다. 1615년 정월에 예천 유생 등이 퇴계를 도산서원에 봉안하고, 또한 월천을 종향하고 또 봉화 창해서원에도 종향했다.
1673년에 예안의 유생들이 본도 감사 윤휘에게 글을 올려 참판 조목으로 도산서원에 종향할 것을 청해 감사에게 글을 올렸다. 예조에서 임금님의 재가를 받았다.
1614년 11월에 도산서원에 종향하기를 임금님께 청했다. 1615년 정월에 조정에서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했다. 예관을 예조 정랑 남복규였다. 이해 8월에 예천 유생 등이 도산서원에 퇴계를 봉안하고, 또 월천으로서 봉안하고 또 봉화 창해서원에 종향했다.
사진 출처 : 박약회 대구관역시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