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 오랜 준비끝에 떠나는 일본여행
그 일본여행의 파트너는....군 제대후
36년을 치고, 받으면서도 끈끈한 전우애?를 과시하고 있는 군대 동기들
군대동기 모임은 6명이지만
이번 여행에는 약간의 곡절속에 4명 부부만 동행
어쨌거나 회장이 추진하는 계획대로
패키지 여행으로 오사카주변 2박3일의 빡쎈 일정중 첫번째로 찿은곳이 오사카성
직접 눈으로는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사진으로 수없이 눈도장을 찍어 두었던 오사카성
1467년 "오닌의난"으로 시작되는 130년간의 일본 영주들의 크고,작은 전쟁 "전국시대의 3대영웅"
"오다노부나가"의 후계자 "도요토미히데요시"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두가문 역사의 중심에 서있는 오사카성
역시 오사카성은 화려한 사꾸라가 바람에 흩날려야 그들의 역사와 더더욱 어울릴듯 싶다
전국시대 일본통일을 눈앞에 두고 부하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한
오다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도요토미히데요시는.....
1583년 수운이 편리한 우에마치 대지에 천하쟁취의 거점을 마련하려 오사카성을 축성하였고
1585년에는 5층8단 검은옻칠의 판자와 금박기와,금장식을 붙인 호화로운 망루, 천수각을 완성하여
히데요시는 천하의 권력을 만끽한다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을 축성할때 지배하의 의 지방 영주들에게
시간을 정해 놓고 필요한 돌과 자재 그리고 돈의 조달을 명령한다
대부분의 지방 영주들은 히데요시의 명령대로 시간내에 필요한 물목을 진상했지만
몇몇 영주들의 지방 사정상 늦게 오사카성 신축 현장에 도착한 바위들은 성안에 입성시키지 않고 입구에 늘어 놓았다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태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천하를 지배하고 통치권을 행사할 군주가 될 신분이 아니었으나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꾸미고 돋보이게 하였다
히데요시는 일본 국내가 통일되자 그동안 어떤 통치자도 시도하지 못했던
중국 대륙을 정복하여 오다 노부나가에 집중된 국민들의 존경심과 평가가 자신에게 쏠릴 것을 기대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교류가 있는
대마도 영주에게 명하여 조선에 명나라 정복을 위한 협조를 요청하였다
조선과 일본은 이 문제로 교섭을 진행하면서
조선 정부는 일본의 상황과 풍신수길의 의도를 살피기 위하여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을 통신사로 일본에 보낸다.
풍신수길을 만나고 돌아온 정사와 부사가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자
조정은 당파에 따라 의견이 갈리고, 결국 동인 김성일의 의견을 좇아 외침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한다
이렇듯 4년 동안의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1592년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나고야에 지휘부를 차린 히데요시는 출정군을 9개로 나누어
20만 명이 넘는 수군과 육군을 선두로 부산포를 공격하면서
서울에서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몰아부쳤다
승전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중국 정벌의 꿈에 부풀게 되었고....중국 정복 이후의 계획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서 전쟁의 어려움이 가중되었고
명나라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화교섭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로인해 이듬해인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키지만 고전을 거듭하였고 국력만 소모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유재란 중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후시미성에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도요토미가 죽은후 오사카성은
측실인 요노도모와 인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도요토미 56살)에 태어난 히데요리에게 넘어간다
잡설에 의하면 도요토미는 여자를 밝히기로 유명했고
또 정실인 네네 사이에서 자식이 없자 후계자를 낳기 위해
도요토마는 15명 이상의 측실을 두었는데 요도도노 외에 자식을 낳은 부인이 없었다
히데요시가 오미국 나가하마 영주였을 때
10년만에 처음으로 맞이한 첫번째 첩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히데요시 사이에서 낳은 자식인지 데려온 자식인지는 불분명하고....
다른 측실들도 출산 경험이 있는 재혼녀가 5명이 있어서
그냥 기록만 봐서는 히데요시는 무정자증이고 요노도노가 바람펴서 낳은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도요토미가 죽은후 오랜 새월을 참고 견뎌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의 시대를 열기 위해 칼을 빼든다
흔히 일본 전구시대 3대 영웅들의 성격을 표현할때....
"저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 버려라" - 오다 노부나가
"저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게 하라"-도요토미 히데요시
"저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때까지 기다려라"-도쿠가와 이에야스
유년시절 치욕적인 인질생활을 견디며 성장한 이에야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그의 비호 아래 자신의 세력을 키워왔다
혼노지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한때 히데요시와 대치하지만
자신의 불리한 현재위치를 냉철히 파단해 히데요시에게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런저런 핑계로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온 이에야스
히데요시가 죽자 1600년 9월 일본의 패권을 놓고
일본 내전의 최대 전쟁 "세키가하라 전투"를 벌인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로 일본 패권을 손에 쥔 도코가와는
도요토미가 주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오다의 아들을 제거했듯이....
1615년 겨울 도요토미의 분신인 오사카성을 공격했지만
2중으로 설치된 헤자를 넘지 못해 실패하였고
그 이듬해 여름 2차공격때 히데요리와 어머니 요노도요가 자살하면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하면서
일본 전국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후 일본은 260년간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막부 쇼군시대를 맞이한다
에도 막부 정권 시기에는 그 이전의 사무라이 전국시대와 많은 차이를 보였다
에도에 설치된 막부는 전국의 다이묘 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정책을 하였고.....
전국 각지의 군사적 요충지와 상업지역, 무역항구 등을
직할지로 삼아 전 열도를 중앙에서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에도 막부 정권을 "중앙집권적 봉건시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본 패권의 상징인 오사카성을
제2대 도쿠가와 쇼군 히데타다는 오사카 성의 재건축으로
오사카성을 더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1665년 새로 쌓은 주탑은 벼락을 맞고 사라졌다
이후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던 내전 동안
성의 대부분은 전소해 버렸고, 도쿠가와 시대도 막을 내렸다
2차세계대전때 오사카 성의 동쪽에
무기 공장이 지어지면서 미군의 집중 폭격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당시 오사카는 여덟 차례 대규모 공습을 포함해
총 50차례가 넘는 공습으로 말미암아 시가지 대부분이 폐허로 변하는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오사카성 천수각은 별다른 공습의 피해 없이 기적적으로 남았다
1948년 오사카성 일대는 사적 공원으로 지정되어
시민들을 위한 도시공원으로 정비되었고 천수각 건물은 시립박물관으로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