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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해 글 1
몸지혜작업인 포커싱의 다음과정으로 융학파의 로버트 존슨의 '내면작업(꿈과 적극적 명상을 통한 자기탐색)"과 유진 젠들린의 번역원서 "네몸이꿈을 이해하게하기"에 대한 온라인 모임이 시작되었다. 무의식과 몸을 통한 내면작업이 의식의 변형에 큰 중요성을 갖고있다는 생각에 내면의 풍요로움을 경험하기 위한 작업이다.
일부 전문가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되는 이 영역이 일반인에게 실존적 의미가 있는 '더 풍성한 삶'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 일부 필요한 부분을 동료들과 나누고자 한다. 그 방법은 이 두 책을 읽어가며 진행자로서 다가온 주제를 글로 해서 나누는 것이다. 이 글은 꿈이해에 참여하는 참가자들의 이해를 돕고, 의식의 성장과 변화에 꿈의 가능성, 특히 두 사람이 펼치는 무의식의 상징적 실재에 대한 이해와 그 실재를 몸으로 경험하는 새로운 기법에 도움이 되기 위해 올리는 시리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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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우리가 모르는 우리를 찾아온다
― 융학파 로버트 존슨의 꿈, 상상력, 적극적 상상이 여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
우리는 자신을 꽤 잘 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왜 상처받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설명할 수 있다. 심리학의 언어도 익숙해졌다. 애착, 트라우마, 내면아이, 무의식 같은 말은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런데 자신에 대해 많이 아는 것과 자기 자신을 깊이 만나는 것은 같은 일일까.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했는데 일상의 삶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알면서 다시 화를 내고, 무엇이 두려운지 설명하면서도 같은 것을 피한다. 지성은 나를 훌륭하게 설명하지만 대부분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설명이 너무 정교해져서 아직 살아 움직이는 경험을 이미 알고 있는 것 속에 가두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서 꿈이 시작된다.
꿈은 내가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게 도착한 이야기이다
꿈의 독특함은 내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오늘 밤 어떤 꿈을 꾸겠다고 계획할 수 없다. 그런데 잠이 들면 낯선 사람이 나타나고,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 말을 걸고, 무너진 집과 끝없는 계단과 바다가 출현한다. 현실에서는 결코 하지 않을 일을 하고, 깨어 있는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래서 꿈 앞에서는 평소의 관계가 뒤집힌다. 평소에는 내가 나를 생각하지만, 꿈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내가 모르는 내가 나를 찾아온다.
꿈은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 발견되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도착한 무엇이다. 그렇기에 꿈을 만나는 첫 태도는 해석이 아니라 환대에 가깝다. 이 낯선 것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무엇을 보여주려는지 잠시 곁을 내어주는 것이다.
로버트 존슨의 내면작업은 루미의 시 ‘여인숙’처럼 이 낯선 방문자를 함부로 내쫓지 말라고 권한다. 꿈의 이미지를 곧바로 하나의 뜻으로 번역해 버리지도 말라. “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다는 무엇의 상징인가?”라고 너무 빨리 묻기 전에 조금 더 머물러 보라. 왜 하필 나의 꿈에, 지금, 그것이 나타났는가를 물어야 한다.
상징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연다
여기서 꿈의 상징(symbol)이 중요해진다.
상징을 암호처럼 생각하면 우리는 곧바로 정답을 찾으려 한다. ‘집은 자아’, ‘물은 무의식’, ‘죽음은 변화’와 같은 대응표를 만들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이 끝나는 순간 역설적으로 꿈의 생명력도 끝날 수 있다.
살아 있는 상징은 하나의 뜻으로 닫히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의식이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을 품은 채 우리를 앞으로 데려간다. 마치 불교도의 말처럼 (밝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을 상징은 한다. 자신을 넘어서서 더 높거나 깊은 것을 가리키며, 더 나은 방향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꿈속에서 닫힌 문이 나타났다고 하자. 그것은 단지 ‘막힘’을 뜻하지 않을 수 있다. 아직 열어보지 않은 삶, 두려워서 들어가지 못했던 관계, 내가 아직 살아보지 않은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을 수 있다. 꿈속에서 죽음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삶의 방식이 끝나고 다른 삶이 시작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미지일 수도 있다.
이것이 상징의 중요한 긍정성이다. 상징은 현재의 나를 단순히 진단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현재의 내가 아직 되지 않은 것, 그러나 되어갈 수 있는 것까지 암시한다. 따라서 꿈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내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만을 묻는 일이 아니다. 때로는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내 삶은 지금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내 영혼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자 하는가?”
꿈속의 이미지에는 과거의 상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도 있을 수 있다. 내가 잃어버린 생명력, 사용하지 않았던 능력, 두려워서 선택하지 않았던 길, 의식이 아직 상상하지 못했던 관계의 방식이 상징으로 먼저 나타날 수 있다.
열린 가능성으로서 꿈
그런 의미에서 꿈은 과거를 설명하는 자료인 동시에 미래를 향해 열린 잠재성의 공간이다.
다만 이것을 꿈이 미래를 예언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금의 의식이 보지 못하는 가능성을 이미지가 먼저 보여준다는 뜻에 가깝다. 꿈은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명령하기보다 “이런 삶도 가능하지 않은가?”라고 묻는다.
모호함의 가능성을 촉발하는 질문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상상력은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상상력(imagination)이다. 꿈은 잠재된 가능성을 촉발하는 이미지로 자신을 연다. 상상은 그 모호한 이미지의 잠재적 가능성을 의식으로 가져오는 접촉점을 만든다. 의식으로 현실화하는 것이다.
상상력이라고 하면 흔히 현실에 없는 것을 꾸며내는 능력을 생각한다. 그러나 내면작업에서 상상력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다. 말이 되기 이전의 경험, 아직 의식에 들어오지 못한 가능성이 이미지와 장면과 상징을 통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슬픔이라는 단어보다 텅 빈 방 하나가 내 슬픔을 더 정확하게 말해줄 때가 있다. ‘불안하다’는 설명보다 계속 문이 잠기지 않는 꿈이 내 상태를 더 생생하게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라. 어느 날 꿈속에서 황폐한 집 한편에 작은 창문이 생겼다고 하자. 그 창문으로 빛이 들어온다.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모름 속에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황폐한 집’으로만 이해했던 사람에게 꿈은 설명하지 않았던 작은 창 하나를 내놓는다. 의식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관점, 다른 관계,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이미지로 먼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능력이 아니다. 때로는 정반대이다.
현재의 현실만을 현실이라고 믿지 않게 하는 능력이다.
지금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며, 지금의 내가 최종적인 나도 아니라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인간에게 변화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삶을 먼저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에서 ‘적극적 상상’으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꿈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아이가 있었다고 하자. 꿈은 끝났지만 그 아이가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다. 평소의 우리는 “그 아이가 무엇을 상징하지?”라고 묻는다.
그러나 융학자 로버트 존슨의 적극적 상상(active imagination)은 조금 다른 길을 택한다.
그 아이를 다시 떠올려 보라. 얼굴을 바라보라. 가까이 가도 괜찮은지 물어보라. 그리고 묻는다.
“너는 왜 거기에 있었니?”
곧바로 대답을 만들어내지 말라. 기다려라. 판단을 내려놓고, 논리를 대기 전에 멈추어 기다려 듣고자 한다. 멈추어 기다림은 가장 우리가 배우기 어려운 작업 공간이다. 판단이 일어나기 전에 멈추어서 기다려 듣는 것은 인내를 요한다.
뜻밖의 말이 떠오를 수도 있고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릴 수도 있다. 갑자기 몸 어딘가가 답답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통제하던 마음이 잠시 뒤로 물러나 내가 알지 못했던 내면의 움직임과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단순한 공상과 적극적 상상의 중요한 차이이다. 나는 이미지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감독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무엇을 가져오는지 만나고 응답하는 참여자가 된다.
따라서 꿈–상상력–적극적 상상은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꿈은 이미지가 나를 찾아오는 사건이고, 상상력은 그 이미지 안에 담긴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알아보는 능력이며, 적극적 상상은 그 가능성과 깨어 있는 내가 관계를 계속해 가는 행위이다. 이것이 내면작업(inner work)이다.
냉담한 지성을 넘어
현대인은 지성을 통해 엄청난 것을 이루었다. 분석하고 분류하고 측정하고 설명한다. 문제는 지성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지성만을 신뢰하게 된 마음이다. 무엇인가를 이해하면 그것과의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한다. 슬픔의 원인을 알면 슬픔을 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분석하면 그 아이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설명보다 크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에게 죽음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애도를 대신할 수 없듯이, 자기 자신에 관한 정확한 지식도 자기 자신과의 만남을 대신할 수 없다. 꿈은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인의 냉담한 지성에 작은 균열을 낸다. 사유와 논리가 갖는 객관화와 동일성이 깨지는 그 속으로 들어간다.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변형을 만들어 낸다.
꿈 앞에서 우리는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 이런 꿈을 꾸었지?”
“저 사람은 누구지?”
“왜 이 장면만 마음에서 떠나지 않지?”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더할 수 있다.
“이 꿈은 내가 아직 보지 못하는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 질문에 즉시 답하지 않고 머물 수 있다면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능력 하나가 회복되기 시작한다.
지성은 모르는 것을 견디면서 듣는 능력이다.
이것은 지성을 버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성이 자신의 한계를 알고 더 깊은 인식에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현실이 더 크고, 내가 알고 있는 나보다 나 자신이 더 크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지성의 성숙(카이로스)이다.
온전한 자아는 아직 오지 않은 나까지 포함한다
그렇다면 꿈작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일까.
꿈을 잘 풀이하는 능력이 아닐 것이다. 꿈사전을 보지 않고도 상징을 멋지게 설명하는 능력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대하는 방식의 변화이다.
내 안에서 불편한 것이 나타나도 곧바로 제거하지 않는 사람, 이해되지 않는 감정에 성급히 이름 붙이지 않는 사람, 몸의 미세한 느낌과 꿈의 이상한 이미지 앞에서 조금 더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꿈작업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작업인 동시에 지금의 자신을 넘어설 가능성을 발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의식의 좁은 파편을 넘어 잠재된 의식의 모호함과 그 가능성이 새로운 의식속으로 들어온다. 그 받아들임을 통해 더 큰 의식이 열린다. 곧 온전성을 향한 길과 창문이 열리는 것이다.
온전함은 과거에 잃어버린 조각들을 되찾아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나, 아직 선택하지 않은 삶,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방식, 아직 사용하지 않은 생명력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온전한 자아는 이미 완성되어 어딘가에 숨어 있는 ‘진짜 나’라기보다, 내가 알던 나와 아직 알지 못하는 나 사이의 관계 속에서 계속 태어나는 존재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꿈은 우리에게 과거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돌려준다.
“너에게 이런 상처가 있었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러나 너에게는 아직 이런 삶의 가능성도 남아 있다”고 말한다.
물론 꿈이 그 길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 상징은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문을 보여준다. 그 문을 열 것인지는 깨어 있는 삶의 몫이다. 파머가 말했듯이 고통/꿈이 가슴위에 앉으면 부서져 열릴 것이가 아니면 부서져 닫혀질 것인가의 중대한, 그리고 익은 순간이 온다. 꿈이 그와 같다. 그리고 내면작업의 마지막 자리는 결국 현실이어야 한다.
꿈에게 물어라.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허락하라.
모르는 것을 너무 빨리 아는 것으로 바꾸지 말라.
그 상징이 내 삶의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가리키는지 기다려보라.
그리고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들어보라.
그 뒤에는 아주 작은 행동 하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것, 오래 미루었던 것을 시작하는 것, 거절해야 할 것을 거절하는 것, 창작하는 것, 쉬는 것, 용서하지 못했던 자신의 한 부분을 다시 바라보는 것. 그때 상징은 현실을 피하기 위한 환상이 아니라 더 나은 현실을 낳는 씨앗이 된다.
어쩌면 의식의 변화는 거창한 깨달음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어느 날 밤 이상한 꿈 하나가 찾아왔을 때,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밀어내지 않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순간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초절주의자 메리 올리버의 시중에 ‘괜찮아’란 시가 있다. 징그러운 작은 거미의 구멍을 통해 항구와 더 나아가 대양의 넘실거리는 바다와 넓은 세계가 열린다. 그리고 말한다. “열쇠구멍의 작은 거미야. 행운을 빈다. 살 수 있을 때까지 오래 살아라.” 희미하고 잿빛 가득한 하루가 ‘안녕과 행운’을 비는 실존의 풍요로움으로 바뀐다.
꿈은 그렇게 거미로 다가온다. “나는 아직 네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보겠다. 그리고 네가 보여주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을 내 삶에서 한번 살아보겠다.” 그 순간 꿈은 잠속에서 사라지는 영상이나 이상한 기억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나와 아직 알지 못하는 나 사이에 문이 열린다.
지금 존재하는 삶과 아직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삶 사이에도 문이 열린다.
내면작업은 바로 그 문 앞에서 시작된다. 메리 올리버처럼 징그럽지만 때로는 아름다운 초록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된다. 그리고 그 눈길의 손가락을 넘어 더 큰 달인 항구와 대양을 꿈꾼다. 더 나아가 징그러움과 고통을 넘어 안녕을 기원하는 삶으로 들어가게 된다.
꿈을 통해 성장과 변화를 맛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집중된 의식으로 생생히 사는 순간을 맛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