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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새 마음과 변한 인격으로 드리는 예배>의 줄거리:
마음은 새롭게 되고 인격은 변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가 영적인 예배를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이 영적인 예배란 바로, 내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내 몸이 가게 되고 있게 되는 모든 곳에서 드려야 하는 이 예배는 오직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야 가능합니다.
새 마음과 변한 인격으로 드리는 예배
(로마서 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새 마음과 변한 인격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새 마음과 변한 인격으로 드리는 예배”
우리는 예배를 드림으로써 새 마음을 갖게 되고 변한 인격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 마음과 변한 인격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구절은 1절 하반부의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될 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은 “전인적인 인격체” 다시 말해 “나 자신”을 가리킨다고 두루뭉술하게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몸이란 문자 그대로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살아야 될 사지백체로 이루어진 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삼라만상을 지으신 조물주이십니다. 이러하신 하나님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몸뿐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내용은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말과 행동은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몸은 삶의 내용을 채우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바로 이 삶의 유일한 수단인 몸을 하나님께 드리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물은 하나님의 몫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나의 몸이 나의 몫으로 있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몫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위는 몸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몸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행위란 단순한 움직임이 아닙니다. 반사신경이나 오장육부가 자율신경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행위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몸은 오로지 인격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따라서 말하고 행위합니다. 따라서 나의 몸을 하나님의 몫이 되도록 드린다는 것은 행위의 주체가 바뀜을 의미합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몸을 내 것이라고 여길지라도 내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삶이란 몸을 움직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말하고 행동하기 위한 수단인 몸을 나의 몫으로 두지 않고 하나님의 몫으로 둔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몸을 움직이는 행위의 주체를 나로부터 하나님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면 몸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만 움직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생각대로 너희의 몸을 움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본문의 “영적 예배”에서 “영적”이라는 부분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합당하다”라는 뜻의 로기켄(λογικὴν)입니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는 프뉴마티켄(πνευματικήν)이 떠오르지만, 본문에서는 “말씀”을 뜻하는 로고스(λογος)에서 파생된 단어인 로기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 예배”란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하게 여기시는 예배이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각에는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될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는 영적 예배란 예배당과 같은 정해진 장소에서 정기적으로 드리는 의식으로써의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될 진짜 예배는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몸은 삶을 사는 수단입니다. 삶은 말과 행동으로 채워지고 말과 행동은 몸이 살아있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합당한 예배는 몸이 거하는 모든 곳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집에 있기도 하고 거리에 있기도 하며 직장에 있기도 하며 버스나 지하철에 있기도 할 것입니다. 공원에 있을 때도 있고 극장에 있을 때도 있으며 산이나 들 혹은 강이나 바다에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는 예배가 드려질 수 있어야 합니다.
몸이 가는 모든 장소에서 삶은 말과 행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영적 예배란 말과 행동을 하는 수단인 몸을 하나님의 몫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예배는 몸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말과 행동은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이 말과 행동을 하는 몸을 하나님의 몫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말과 행동이 오직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마땅하게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몸을 드리는 것이 예배이기에 단체로 이루어져야 될 필요도 없습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삶의 수단을 드리는 것이고, 삶의 수단을 드린다는 것은 삶의 내용인 말과 행위가 하나님의 생각만을 따라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예배는 삶의 내용인 말과 행동이 오직 하나님의 생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직장, 가정, 시장, 학교 등에서 말과 행동은 오직 하나님의 생각으로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은 몸을 통해 나타납니다. 몸이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서만 움직이려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이것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말과 행동이 오직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삶에서 나타나는 말과 행동이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를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이에 대한 답이 2절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2절 하반부를 보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1절의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를 드리는 과정이 됩니다. 앞서 예배는 몸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몸이 직장에 있다면 직장에서도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직장에서 하나님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몸이 드려져야만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입니다.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오직 아버지의 생각을 따라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그 뜻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말과 행동이 이끌려지기 위해서는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아야 합니다. 엘리야 때에 바알에 무릎 꿇지 않았던 칠천 명과 같이 남은 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 즉 세상 풍조의 특징은 마음과 의식이 몸에 달라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채움과 만족과 기쁨을 위해 몸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피조물을 흡입하는 상태입니다. 이로부터 바알에 무릎 꿇는 세상 풍조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어 있는 상태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반드시 이 세대를 본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와 마음의 분리는 채움과 만족과 기쁨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짜 채움과 진짜 만족과 진짜 기쁨을 주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은 가짜 채움과 가짜 만족과 가짜 기쁨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 흐름에 절대로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가짜가 진짜처럼 느껴지는 것이야말로 이 세대를 본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가짜 채움과 가짜 만족과 가짜 기쁨을 진짜처럼 느낍니다. 이것을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천국에 살아계신 조물주 하나님 외에는 채움거리, 만족거리, 기쁨거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피조물 중에서 좋음이 느껴지고 가짜가 좋다고 느껴진다면 중독에 걸린 상태입니다. 이 중독에 걸린 상태를 깨닫고 가짜 채움과 가짜 만족과 가짜 기쁨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 세대의 모든 사람들은 돈을 추구합니다. 건강을 추구합니다. 그밖에도 이런저런 세상의 피조물을 좋다고 여기며 추구하고 바랍니다. 그것이 없으면 불행해하고 있으면 기뻐합니다. 우리는 채움과 만족과 기쁨을 정하는 일에 있어서 이 세대를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짜를 진짜로 여기는 이유는 마음이 몸에 붙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공백의 상태입니다.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항상 채워지고자 무엇인가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작용합니다. 마음을 상징하는 성전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둔 법궤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은 채워지기 위해 좋다고 여겨지는 피조물의 이름을 붙잡고 열망하게 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어떤 이름을 두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 세대는 마음의 지성소에 돈, 재물, 건강, 승진, 형통, 명품 등과 같은 이 세상 피조물의 이름을 붙잡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본받지 않으면 마음이 새롭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마음의 채움을 위하여 목표물을 정할 때 이름을 붙잡습니다. 이 땅에 있는 피조물의 이름을 붙잡는 한 새롭게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이 세대를 본받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이 땅에 있는 이름이 아닌 지금 하늘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때에 마음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새롭게”라고 번역된 원문을 보면 “갱신하다”라는 뜻의 아나케노시(ἀνακαινώσει)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비슷한 내용이 사도행전에도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장애인을 일으켜 세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적을 본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숭배하려고 하자 베드로는 이들을 만류하며 설교를 합니다. 3장 19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새롭게 되다”의 부분을 보면 아나푸시코(ἀναψύχω)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하늘을 향하여 호흡하다”라는 뜻입니다. 희망이나 소망 혹은 열망은 마음의 숨통 틔워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때에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새롭다, 유쾌하다는 뜻의 아나푸시코(ἀναψύχω)는 “위를 향하다”라는 뜻의 아나(ἀνα)와 “숨을 쉬다”라는 뜻의 푸시코(ψύχω)의 합성어입니다. 마음이 위를 향해 희망하고 소망할 때에 새롭게 되고 유쾌하게 되고 상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이 땅에 있는 피조물의 이름을 붙잡고 소원한다면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오직 피조물의 세계인 이 땅이 아닌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은 새롭게 되고 유쾌하게 되고 상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새롭게 될 때 나타나는 일이 변화입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 변화는 인격의 변화입니다. 소망이 바뀌면 인격이 바뀝니다. 소원이 바뀌면 인격이 바뀝니다. 바라는 내용이 바뀔 때 인격은 바뀌게 됩니다.
인격은 수련이나 수양을 통해 바뀌지 않습니다. 인격은 소망이 바뀌어야 바뀝니다. 열정적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인격은 바뀌게 됩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유일한 만족과 좋음과 채움과 기쁨으로 인정하고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바란다는 것은 하나님 이외의 일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기쁠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고 좋을 것도 없고 안 좋을 것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만 진정한 좋음이시기에 하나님이 없으면 나쁨입니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좋음도 될 수 없고 나쁨도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한다면 돈을 못 벌었다고 해서 나쁨이 될 수 없고, 반대로 돈을 벌었다고 해서 좋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좋음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것은 좋음이 될 수 없고 건강하지 못함도 나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좋음이시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만을 소망한다는 것은 이렇게 이 세상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좋음과 나쁨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면 아직 하나님을 소망하는 일에 대해서 온전히 십자가에서 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죽음을 간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온전해져서 지금 몸으로 만나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이 좋음도 아니고 나쁨도 아니게 해주시고, 온전히 아버지만이 유일한 좋음이 되셔서 아버지만을 소망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간구하면 됩니다.
이러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하나님을 소망하기가 지속됨과 동시에 인격이 변화됩니다. 인격은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사람을 관계하든 사물과 관계하든 관계를 통해 인격은 존재합니다. 소망의 대상이 바뀌어서 마음이 새롭게 되면 관계하는 대상에 대한 인격이 변화됩니다. 똑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다른 식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라는 사물을 대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소망이 바뀌어서 하나님만 유일한 좋음이고 유일한 채움이고 유일한 기쁨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돈에 대해서 좋음과 채움과 기쁨을 느끼려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기를 간구하게 됩니다. 그럴 때 돈을 대하는 마음이 점점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돈이 벌리면 웃고 안 벌리면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돈이 벌려도 안 벌려도 개의치 않게 됩니다. 인격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는 나의 마음이 비어있기에 육체로 만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 기쁨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혹은 이 사람이 나쁨을 줄까 따져가면서 관계를 해왔습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을 어제 온라인교회 모임에서 다루었습니다. 기쁨과 나쁨을 따지는 동안에는 진짜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 사람에게서 좋음이나 나쁨을 얻게 될 나를 보면서 관계를 끌어안기도 하고 내치기도 할 뿐입니다. 그 사람을 대할 때에 나의 좋음이나 나쁨의 관계가 없다고 여겨질 때야 진정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관계가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상태에서 사람을 만날 때에 그 사람이 하나님을 소망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모든 사람과 사물에 대한 관계에서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인격의 변화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가짜 좋음, 가짜 채움, 가짜 기쁨을 추구하지 않고 진짜이신 하나님을 추구할 때에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소망의 대상을 바꿈으로써 마음은 새롭게 되고 인격 전반에 걸쳐서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모든 관계에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관계하게 됩니다. 그 관계의 특성은 특별히 사람을 대할 때 긍휼히 여김으로 나타납니다. 진짜 기쁨이시고 진짜 채움이시고 진짜 좋음이시고 진짜 만족이신 유일한 하나님을 나처럼 소망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 사람도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엄청난 인격의 변화입니다.
이어지는 2절 하반부를 보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인격이 변한 사람은 하나님을 소망하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바탕에 깔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분별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되기 위하여 이 세대를 본받아서는 안 되고 가짜를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가짜를 추구하는 이유는 마음이 몸에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가짜 대신에 진짜 좋음, 진짜 채움, 진짜 기쁨이신 하나님을 소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소망해서 마음이 새롭게 되면 인격이 변화됩니다. 인격이 변해서 사람을 만날 때에 하나님을 소망하지 않으면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긍휼히 여김이 인격의 기본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긍휼히 여기는 상태에서 이 세상을 향해 무슨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분명하게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이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따라서 몸이 움직이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예배는 삶의 내용이 되는 말과 행동이 오로지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 절차와 형식을 따라서 진행되는 의식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서 절차와 형식에 얽매인 예배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삶의 내용을 채우는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예배입니다. 말과 행동은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 몸을 움직이는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위해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예배가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방법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이고 “나는 달라야 한다.”라는 생각을 갖고 구별해내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가짜에 달라붙고 있는 나의 마음이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죽음이 내 마음에서 세상의 다른 모든 대상들에 대해 작용할 수 있도록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소망의 대상을 바꾸어 새롭게 됩니다. 이 새롭게 됨이 조금씩 많아지고 지속되면서 여러분의 인격이 변하게 됩니다. 인격이 변하면 사물과 사람에 대한 관계가 변합니다.
전에는 돈을 좋아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만이 소망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돈은 기쁨도 아니고 나쁨도 아닌 상태가 되었을 때 돈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집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건강이 최고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뜻은 알려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붙잡고 건강이 좋다는 마음을 죽이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심을 고백하는 동안 인격은 변화됩니다. 이제 건강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하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집에 있을 때든지 직장에 있을 때든지 학교에 있을 때든지 몸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말하고 행동하는 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삶 전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고 인격이 변화된 상태가 되면 하나님의 뜻이 알려집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알려지면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렇게 진정한 예배자로 매일 매일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사도 바울이 아시고 실천하셨던 그 예배의 일상을 우리도 똑같이 배우고 답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이 새롭게 되고 인격이 변화됨으로써 아버지의 생각과 뜻을 분별하는 은총 가운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