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를 주라 함이 왜 성령받은 증거일까?>의 줄거리:
성령의 은사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다양한 성령의 은사와 그 의미를 말씀하시기 전에 사도 바울은 성령 그 자체가 가장 크고 절대적인 선물임을 밝혀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큰 본래의 선물인 성령 자신을 우리가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저주 받은 자로 여겨지지 않고 그 예수님에게 노예가 되고 싶다면 성령 받은 증거라는 겁니다.
예수를 주라 함이 왜 성령 받은 증거일까?
(고린도전서 12:1~3)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 말 못 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를 주라 함이 왜 성령 받은 증거일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를 주라 함이 왜 성령 받은 증거일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성령께서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하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12장에서부터 14장에 걸쳐 성령님의 은사에 대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답변해줍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질문은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12~14장의 내용을 미루어보자면 그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앞서 고린도 교인들은 여자들이 예배를 드릴 때 머리에 너울을 쓰는 문제와 결혼과 이혼의 문제를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방언에 관한 문제를 질문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질문을 했던 이유는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방언을 받은 사람들이 형제를 배려하는 마음을 보이지 못하고 방언을 받지 못한 자들을 업신여겼고 그리하여 분열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방언이 구원의 표징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을 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여기는 일까지도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방언으로 인해 벌어진 논쟁을 계기로 삼아서 아예 성령의 은사 전반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을 베풀어줍니다. 특히 앞으로 살펴보게 될 14장에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가르침의 결론으로써 방언에 대해 집중적인 조명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방언보다 예언이 더 유익한 은사임을 밝혀 줍니다.
본문에서는 다양한 성령의 은사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다만 다양한 은사를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방언을 받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구원조차도 의심하는 상황에 대한 책망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을 못 하는 사람이 성령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서 먼저 확고한 답을 내려줍니다.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언급하기 전에 은사가 구원받음의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해주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반드시 어떤 특정한 은사가 하나쯤 나타나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양한 은사를 말씀하시기 전에 예수를 믿는 모든 교인에게 공통적인 사항을 알려주십니다. 즉, 성령의 은사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은사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령 자체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로 구원받았음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성령 자체가 오셔야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셨음을 알 수 있는 증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성령의 은사보다도 더 근원적이고 더 크고 더 우선적인 선물은 성령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 이러한 내용의 답을 가르쳐줍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이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을 구원받지 못했다거나 믿음이 없다고 의심하는 일을 불식시켜줍니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았으면 반드시 그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1~3절까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4절부터는 본격적으로 “신령한 것”이라고 언급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져 나갑니다.
말씀드렸듯이 1~3절까지의 내용은 은사와 상관없이 성령을 받아야 하며 성령을 받았다면 그 증거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2~3절입니다. 2절을 보면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 말 못 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므로”라는 말과 함께 3절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표현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풀어보자면 “우리가 이전에는 말 못 하는 우상이 끄는 그대로 끌려갔으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하였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면서 저주할 자가 아니라 축복받은 자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들어오셔서 하는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말 못 하는 우상에게 끌려가는 상태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저주할 자로 여기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면서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스스로를 예수님의 노예라 여깁니다. 그렇기에 평생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말 못 하는 우상에게 끌려간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면 이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렇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성령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신령한 것”이 언급됩니다. 이는 곧 영적인 것, 성령 자체나 성령과 연관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신령한 것”은 우리 안에 잠재돼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교육은 학생 속에 잠재돼있는 능력을 밖으로 끄집어내고 활성화시키고 열매 맺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은 안에 잠재된 소질이나 특성이나 가능성이 아니기에 교육으로 활성화될 수가 없는 완전히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신령한 것”이 나타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외부로부터 주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개 꼬리 삼 년 묻어도 황모 못 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황모는 붓을 만들 때 쓰는 족제비의 꼬리털입니다. 개 꼬리는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좋은 붓을 만들기 위한 족제비 털처럼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우리에게서 신령한 것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말 못 하는 우상이 끄는 그대로 끌리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 못 하는 우상이 대체 무슨 능력으로 우리를 끌어간다는 것일까요? 사실 말 못 하는 우상은 우리를 끌 능력이 없습니다. 앞에서 사도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과 관련하여 10장 20절에서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우상의 배후에는 귀신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상숭배의 본성은 다른 신을 섬김에 뒤따르는 절차입니다. 다른 신이란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좋은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기는 방식은 재물을 섬길 때나 하나님을 섬길 때나 똑같습니다. 재물을 다른 신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면 먼저 재물을 좋아하고 가지고 싶어 하여 열망합니다. 그러면 재물을 가지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추구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에 재물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방식 중의 하나가 우상숭배였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불상 앞에 가서 절을 합니다. 그렇다고 불상을 좋아해서 절을 하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아무도 없습니다. 불상에 절을 할 때 내뱉는 소원이 무엇인지를 봐야 합니다. 그 소원 속에서 그 사람이 섬기는 다른 신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불상에 절을 하면서 “남편이 하는 사업이 잘 되게 해주세요.”라고 한다면 성공과 형통과 돈이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또 “자식이 잘되게 해주세요.”라고 한다면 자식의 형통이 다른 신이 된 것이고, “건강하게 해주세요.”라고 한다면 건강이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가졌으면 좋겠다,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이 다른 신입니다. 불상은 이런 다른 신을 가지기 위하여 추구할 때에 동원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입니다. 당시에는 다른 신을 가지고 싶어서 추구할 때에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방식이 우상숭배였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를 우리 시대로 환원시키면 다른 신을 갖기 위하여 추구하는 과정이 전부 우상숭배입니다. 다른 신은 돈, 건강, 승진 혹은 출세나 형통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을 가지고 싶고 이루고 싶은 모든 것이 다른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아해서 이루고 싶은 것이 있으면 추구하게 됩니다. 이 추구하는 과정 전체를 성경은 우상숭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말 못 하는 우상이 우리를 끌어가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가지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이 다른 신으로 정해지면 그것을 이루려고 추구하게 됩니다. 이 추구함은 자발적 노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자발적 노력의 상태를 끌려감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신이란 “지금 마음에서 가지면 좋겠다! 이루어지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대상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할 공백이 있습니다. 그 공백의 자리에서 생기는 끌어당기는 힘이 좋아함입니다. 그리고 본래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좋아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좋아함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빈번한 이야기이며 24시간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좋아해야 되는 마음으로 돈을 좋아할 때 돈을 하나님처럼 여기고 신격화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좋아해야 되는 마음으로 자식을 좋아할 때 자식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좋아해야 되는 마음으로 명품 옷을 좋아한다면 지금 현재는 그 옷을 신격화하게 된 것입니다. 크든 작든 좋아함은 본래 모조리 하나님께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작은 좋아함이라도 하나님 이외에 다른 대상을 향하게 된다면 그것을 하나님처럼 여기고 신격화하여 다른 신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이 생기면 그것을 실제로 가지기 위해 질주하게 됩니다. 다만 이것에는 배후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귀신이 다른 신의 가면을 쓰고 우리를 끌어가는 것이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을 정해놓고 그것을 얻으려고 질주합니다. 지구의 77억 인구가 오늘도 전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달려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신의 배후에 있는 귀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은 세상의 대상들을 좋아하도록 가면을 쓰고 다른 신의 배후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좋은 것들을 향해 뛰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에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서 예외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귀신은 다른 신의 가면을 쓰고 우상숭배의 과정을 추구하도록 유인하여 끌고 가고자 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이끌림을 받아 끌려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예수님은 회피해야 될 대상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지고 싶고 좋아하는 다른 신을 향하여 질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은 질주하는 것이 아니고 끌려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깨달을 수 없기에 스스로 질주한다고 여기면서 십자가 예수님을 싫어하고 저주할 자라 여깁니다.
예수님을 저주한다는 것은 꼭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노려보면서 “나는 예수를 저주한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멀리하고, 등지고, 무관하게 살고 싶어 하며,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면 이미 예수님을 저주할 자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의 77억 인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귀신은 다른 신의 가면을 쓰고 뒤에 숨어서 “네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라.”고 사람들을 세상으로 이끌어갑니다. 이러한 이끌림을 스스로 추구함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십자가는 저주받은 것이고, 회피하고 우회하고 등지고 잊어버리고 무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저주할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아야 될 축복이자 기쁨의 소식으로 여깁니다. 저주와 반대로 생각합니다. 앞서 “신령한 것”은 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육은 안에 있는 소질을 꺼내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예수님을 저주할 자로 생각하지 않고 사도 바울처럼 자랑거리로 여기고 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축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교육을 받아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만을 좋아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에 이 땅에서 사는 사람으로서는 좋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 땅에서 좋아해도 될 유일한 대상으로 제시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을 붙잡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것은 귀신에게 이끌려가는 중에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힘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안에 있는 소질이나 가능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외부로부터 들어온 무언가에 의해서 귀신의 이끌림은 끊어지게 됩니다. 거센 물살이 흐르는 소용돌이에 빠지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물살이 끄는 그대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유일한 축복으로 붙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안에 있는 어떤 기질이나 소질을 꺼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축복으로 여긴다면 성령이 들어와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3절의 마지막에서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는 엄청난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입으로 예수님을 주시라 하면 성령이 들어와 계시다는 증거이다.”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그 말에 담겨있는 뜻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한 것에는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2000년 전에 노예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 취급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자식도 노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주인과 노예가 동일한 생활권에 살던 시대상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런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예가 자기의 주인을 향하여 “주님”이라고 부를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노예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노예는 노예로 있는 한 주인을 따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을 따르는 것만이 노예에게 주어진 유일한 사명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처럼 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가 다 저처럼 말씀만 전하는 목사가 되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면서 대통령이 될 수도 있으며 택배기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빠가 될 수도 있고 남편과 아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어떤 신분과 위치에 있든지 그에 앞서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향하여 “나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노예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주인을 따릅니다. 주인이 죽을 때 같이 죽습니다. 주인이 부활하셨기에 노예도 부활합니다. 주인이 승천하셨으니 따라서 승천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의미입니다.
3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과 “성령”을 각각 언급하고 있습니다. 의미적으로는 같은데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구분하여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해 “나는 당신의 노예입니다. 당신을 따르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사명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좋음을 느끼는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온갖 다른 신들이 가득합니다. 지금 가지고 싶고 이루고 싶고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한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예수님을 따름은 저주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모습은 세상에 대한 죽으심이었고 하늘을 살기 위한 부활과 승천이라는 과정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주받은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에 대해 노예의 입장에서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귀신에 이끌리는 세상 사람들 눈에는 저주받은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딴에는 자발적으로 세상을 추구하며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력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저주받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굳이 입으로 저주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가까이하기 싫어하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노예가 주인을 따라가듯이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죄 사함을 위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등 뒤로 돌리고 교리의 곳간 안에 넣어둡니다. 그리고 사순절 때라든지 필요할 때에만 잠깐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습니다. 그것도 설교 중에 잠깐 언급할 뿐이고 생활 속으로 들어가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예 잊히고 맙니다. 한 번도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축복이라면 그렇게 무관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말은 하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저주받은 것이라 여기고 있고 이 세상 것들을 다른 신으로 갖는 것이야말로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 잊고 삽니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으로 생각하고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을 향하여 질주합니다. 이것이 귀신에게 이끌려가는 모습입니다. 귀신에게 이끌리기 때문에 십자가를 도외시합니다.
귀신에게 이끌림은 모든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야말로 이 세상에서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능력이나 재주나 잠재력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외부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들어왔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러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마음에서 잊어버린다면 저주할 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을 진짜 복덩어리라고 생각한다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 마음이 예수님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채움을 위하여 좋아할 대상이 필요한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정말 복덩어리라고 여겨진다면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바란다면 세상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특이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성령께서 들어와 계십니까? 아니면 입으로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살펴보시고 지금 어떠한 위치에 와있는지 점검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들어오셨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이 세상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복덩어리로 느껴지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느꼈기에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세상의 어떤 대상도 다른 신으로 좋아하지 않는 상태를 자랑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는 상태가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여러분들이 직접 경험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안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잠재력을 끄집어내거나 이미 드러난 어떤 능력을 발휘해서라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복덩어리로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런 죄악 된 내가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십자가만 생각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기만을 소원한다면 이는 온전히 바깥에 계시던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와 계심을 알고 감사에 감사를 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늘도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만을 나의 유일한 복덩어리로 붙잡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