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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십자가에 죽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 2023년 7월 16일 주일 오후 예배
본문 / 사사기 16:23-31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꽉 차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자들입니다.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길에서도 내 안에 남아있는 나를 섬기고 싶은 자아숭배가 얼마나 강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정욕과 탐심으로 섬김을 받기 원하는 그 타락한 육체의 자아는 얼마나 강한지 죽은 것 같다가도 때를 만나면 벌떡 일어나 믿음을 흔들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도 그 육체의 자아가 때때로 살아나 믿음을 대적하며 흔드는데 믿음의 싸움을 하지 않는 성도들은 어떻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버젓이 자기 마음과 인생의 주인노릇을 하며 자신의 생각과 뜻과 감정대로 사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가 그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여도 타락한 인간의 자아는 호시탐탐 때를 엿보며 자신이 또 다시 주인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자신과 싸우는 그 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하여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제가 얼마 전 말씀을 전하면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자신과 죄와 치열하게 믿음의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는 겁니다.
사사 삼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모든 성도들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삼손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저렇게 믿음이 없을까? 분별력이 없을까? 어리석고 미련할까?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티는 금방 찾아도 내 자신의 큰 들보는 잘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고 그 구원을 이루어가는 길에서 삼손이 보여주는 그 불신앙이 내 안에 있는 들보인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도 죄를 끊지 못하고 저렇게 한심하게 살까?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의 사사답게 살지 못하는 삼손 안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삼손을 한심하다고 할 게 아니라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고 불쌍한 것입니다.
삼손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여자를 좋아했다는 겁니다. 들릴라는 자기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 들릴라에게 빠져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까? 삼손이 사랑하는 그 여자가 사사 삼손의 자리에서는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지만 인간 삼손의 자리에서는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자극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인간 삼손의 시각에서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나 세상을 사랑합니까? 돈을 얼마나 의지하고 두려워합니까? 육체의 정욕과 음란은 얼마나 강하고 끈질깁니까? 결국 세상을 끊을 수 없었던 삼손은 세상을 대표하는 블레셋에게 팔려 노예가 돼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사람들의 노리개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하나님의 사사가 즉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기는 자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게 된 것입니다. 이미 삼손은 눈이 뽑혔고 쇠사슬에 매여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말씀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눈이 뽑힌 삼손, 그도 빛이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눈이 먼 사울처럼 영적으로 소경이었던 겁니다. 사울도 삼손도 눈을 뜨고 있을 때에는 자신이 영적으로는 소경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눈이 멀고 눈이 뽑히고 나서야 사울도 삼손도 믿음의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정말 미련합니다. 그 마음과 영이 자기 자신으로 꽉 차 있으면 아무리 눈이 밝아 세상을 잘 보아도 사실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영적인 소경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차라리 너희가 소경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은 주님의 은혜로 눈을 떴지만 우리는 본다고 하는 그 사람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진짜 소경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기는 세상 사람의 노예가 되어 재주를 부리는 삼손의 그 비참한 몰골이 지금 내 모습은 아닌지 말입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 같습니까? 더 안타까운 것은 이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못하고 타락한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섬기기 위해 세상 앞에서 재주를 부리며 사는 것이 이제는 하나도 부끄럽지도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거리끼는 것도 없이 익숙하게 재주를 부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말씀한 것입니다.
세상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세상을 못 박은 것이기 때문에 곧 보이는 세상으로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섬기는 나를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나도 죽는 그 회개와 거듭남이 없이는 우리는 세상을 버릴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당장 보이는 게 세상이고 그 세상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데 어떻게 세상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또 다시 세상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자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맥없이 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어떻게 세상을 이기셨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나와 따로 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고 타락한 모든 인간들이 그 타락한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숭배하는 곳입니다. 자아숭배의 제단과 제사가 드려지는 곳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곳은 마귀가 권세를 잡은 곳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은 마귀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이며 그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죄, 자아숭배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영혼을 팔아서라도 자신의 자아를 숭배하는 것이 그들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믿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알아도 쉽지가 않다는 것이 문제인 겁니다. 그만큼 육체의 정욕과 탐심으로 내 자아를 숭배하기 원하는 욕망은 크고 강한 것입니다. 삼손이 그 욕망을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눈까지 뽑혀 비참하게 맷돌을 돌리는 노예가 되어 웃음거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할 때 받게 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비참한 것입니다.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때에 나오는 능력과 평안과 기쁨과 만족이 있는 것처럼 자신이 원치 않게 세상에 즉 마귀 앞에 재주를 부리는 자가 되었을 때 받게 되는 비참한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삼손은 오죽했을까요? 사람의 몸에서 눈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것을 알기에 블레셋은 삼손을 잡자마자 눈부터 뽑았습니다. 사슬에 묶여 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원수를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웃음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 원수들이 자신의 재주를 보며 좋아하고 조롱하고 웃을 때 어땠을까요?
삼손은 고통을 받으며 정신을 차린 겁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알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삼손은 회개하였습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삼손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죽기를 두려워했을 겁니다. 블레셋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지 안했을 겁니다. 죽을 때까지 맷돌을 돌리며 재주를 부리고 살면서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도 죽이지 않고 살려줘서 다행이라고 여겼을 겁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과 세상을,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두 주인으로 섬기면서 세상과 마귀 앞에서 재주를 부리면서 살다가 자기 인생을 마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죽을 때까지 아무 일 없이 사는 것에 만족하며 사는 것입니다.
삼손은 자기 목숨을 걸고 생명을 버리는 회개를 하였지만 이 시대의 삼손들은 끝까지 세상과 마귀 앞에서 재주를 부리며 아무 일 없이 사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만 겉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하고 있지만 그 속은 자아를 숭배하는 마귀의 자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삽니까?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에 십자가에 나를 부인하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뜻을 받듭니까? 믿음으로 한번 살아 보려고 마음을 다하고 있습니까?
저는 너무 괴로울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종답게 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잡고 이제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이 살아야지 결단해도 얼마 가지를 못하고 육체의 정욕과 음란에 넘어지기 일쑤였습니다. 내 안에는 세상에 대한 탐욕도 너무 많았습니다.
나는 왜 안 될까? 나는 왜 이렇게 안 되는 사람인가? 나는 택함을 받지 못한 자인가?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종까지 되었지만 믿는척하다가 지옥에 가는 것 아닌가? 왜 그렇게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 안 되는지 말입니다. 내 안에 있는 내가 살아나면 그것은 내가 도저히 이길 수 없이 강했습니다.
그렇다고 빈번하게 넘어진다고 아예 죄에게 문을 열고 친구가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이루어가는 길에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또 다시 타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아도 택함을 입는 자들은 적다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어느 목사님이 교도소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할 때 재소자 중에서 얼굴이 정말 해같이 빛나는 사람을 만났다는 겁니다. 정말 얼굴이 빛이 나더랍니다. 그래서 한 눈에 알아본 것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빛나는 얼굴이 이런 교도소에 있을까 말입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교도소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회개하고 거듭난 것입니다. 세수하고 얼굴을 가꾸어서 나는 빛이겠습니까? 성경을 다 암송할 정도를 읽은 겁니다. 자신이 어디까지 암송하는지 끝까지 해보지 않아서 모른다고 하는 겁니다.
다른 재소자들을 섬기는 겁니다. 자기가 먹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다른 재소자가 춥다고 하면 그 발을 자기 겨드랑이에 넣고 자는 사람이었습니다. 얼굴이 빛이 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출소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 이 목사님이 다른 교도소에 말씀을 전하러 갔을 때 그곳에 있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의 얼굴은 정말 범죄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둡고 우울하고 불안하고 화가 난 얼굴이었습니다.
왜 여기에 와 있느냐고 묻자 출소한 후에 종의 길을 가려고 하였지만 전과자를 받아주는 교회는 없었나 봅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공사판에 가게 되었고 처음에는 술을 권해도 거절했지만 일이 힘들고 어렵게 되자 한 잔만 마실까 시작한 것이 두 잔이 되고 나중에는 절제할 수가 없게 되었고 결국에는 또 과거에 짓던 죄에까지 손을 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빛이 나던 그 얼굴이 다시 죄 아래로 떨어지자 빛을 잃은 것입니다. 얼굴의 빛은 그 마음과 영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타락으로 하나님이 떠나고 내가 있자 어둠만이 나온 것입니다.
정말 구원을 이루어가는 그 길은 십자가의 좁은 길이며 선한 싸움만이 가능하게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신이 하는 집회에 오면 평생 가는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직까지 한 번 충전으로 평생 사용한다는 밧데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승리하는 그 길은 십자가에 날마다 죽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죽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날마다 십자가에 죽다보면 시간이 흐르면 더 쉽게 더 빨리 죽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싸우면 날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십자가에 나를 못을 박는 것이 회개하고 거듭난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싸우지도 않고 승리하는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싸우고 날마다 승리하는 십자가의 용사는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날마다 선한 싸움을 통해서 믿음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에 죽으면 날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실 수 있고 그 주님과 함께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을 만난다면 그 주님과 함께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떠나는 순간 또 다시 죄에 붙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무기력하게 살고 있다면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내 생명을 다하여 십자가를 붙들고 말씀을 의지하며 기도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신과 싸우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좁은 길이 어렵고 힘들지만 그것보다 내 마음이 평안하고 내 영혼이 만족하는 길은 없습니다. 회개와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과 순종을 통해 반드시 구원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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