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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게 알려오신 뜻, 내가 알고 싶은 뜻>의 줄거리 :
마음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는 중에 하나님이 내게 알려오시는 뜻이 있습니다. 반면에 내 마음이 영광의 이 세상 것을 보고 있는 중에 세상 것을 위하여 내가 알고 싶은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전자가 믿음이고 후자는 미신입니다. 이 세상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로 그것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지 말고 그런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먼저 마음을 다해서 좋아해야 합니다. 그러면 뜻을 알려오십니다.
내게 알려오신 뜻, 내가 알고 싶은 뜻
(창세기 15:1~6)
1.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알려오신 뜻이 있고, 내가 알고 싶은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과 나와의 관계는 알려오신 뜻이어야지 내가 알고 싶은 뜻이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처럼 마음에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것을 평생이자 일상의 유일한 과제와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수수께끼이고 감추어져 있는 암호와도 같습니다.
마음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당신이 갖고 계신 뜻을 알려오십니다. 반면에 마음이 영광의 세상 것을 보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보고 있고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세상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갖고 계시는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태도는 내 마음이 지금 보고 있는 이 세상 것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가는 이유는 신의 뜻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마음에 담고 있는 영광된 세상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배우자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사업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자녀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미래의 문제나 결혼 문제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에서 영광되게 바라보고 있는 우선적인 관심사에 대한 신의 뜻을 알기 위해 무당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그 마음을 자세히 보면 마음이 영광된 세상 것들을 바라봅니다. 세상 것들만을 궁극적인 관심사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럴 때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궁금해하면서 자꾸 묻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제법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꾸 세상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궁금해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당 취급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의아해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기독교 종교 생활을 해오던 언어 체계가 완전히 허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 말이 너무 낯설고 듣기가 거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그저 악한 것도 아니고 아주 악질적이라고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이유는 아브라함을 살펴보는 동안 이 문제에 확실히 마침표를 찍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 잘못된 습관은 끝나야 합니다.
우리의 매일매일의 사명은 마음이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봄을 끊기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마음에서 세상 것들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의식하고 있다면 자기를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마음이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봄을 유일한 사명으로 생각할 수 없다면 세상 것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자녀를 염두에 두고, 아내가 남편을 염두에 두고, 사장님이 사업을 염두에 두는 것과 같은 일들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 것들을 염두에 둔 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을 등졌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등졌기 때문에 마음이 영광의 세상 것들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입니다. 우리 또한 이제까지 그렇게 살았고 그것이 잘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인류는 모두 이러한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마음이 영광의 세상 것을 바라보면서 신의 뜻을 묻고자 하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시편 37편 4절을 보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백 번도 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악질적이라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함이란 먼저 마음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내 자신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는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대해서는 마음이 끊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세상에 대한 소원이 나타난다면 하나님이 뜻을 알려오시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소원은 무조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습니다. 먼저 세상 것을 밝히 보며 세상 것에 대한 소원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서 그것들을 이루고자 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비로소 기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13절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룰 것을 요청합니다. 마음이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고 이 세상 것을 영광 중에 바라보게 될까 두렵고 떨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나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이루었다면 이제부터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소원을 주시는 방식으로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로 물을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음이 끊기지 않는다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라는 말씀처럼 이 세상에 대한 소원이 생기고 하나님이 행하시게 됩니다.
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봄을 평생이자 일상의 유일한 과제와 일로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사람이었기에 그 삶의 모습은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들여보내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삶의 터전에 대한 선택권을 조카에게 양보하는 무골호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조카 롯을 4개국 연합군으로부터 구하는 영웅호걸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모습의 스펙트럼은 우리가 종잡을 수 없고 일관되게 한정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이 도대체 무슨 두려움을 가졌다는 것일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손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늙어가고 있었고 아내 사라도 경수가 끊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이루지 않으시니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저도 늙어가고 아내도 늙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실 조짐은 보이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집사 엘리에셀이 저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전개를 보자면 아브라함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을지도 궁금하지만, 집사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고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일종의 월권이자 불신앙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전혀 나무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아브라함에게 별처럼 많은 후손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대화는 6절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기존의 언어 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당장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질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진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두려움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처럼 많아지게 할 것이다.’라고 이루실 뜻을 먼저 알려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미래를 바라보면서 그 미래에 마음을 다 빼앗긴 채 ‘하나님! 나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되겠습니까? 알려주시옵소서.’라고 물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이 알려오신 뜻을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가 나이가 많았던 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후손을 주신다는 약속은 받았지만, 자기로부터 후손이 나올 조짐은 현상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로부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의 정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했으므로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 점에 주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 주석들은 이 부분을 아브라함의 불신앙으로 해석합니다. 아브라함이 4개국 연합군에게 복수 당할 것을 두려워했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자손의 번성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초조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너무나 표면적입니다. 학자라도 마음이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는 것을 날마다 과제로 삼을 수 없다면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약속하신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현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아브라함의 두려움의 계기가 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두려워한 것은 자기에게서 후손의 번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약속대로 이루어질 조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신 것은 아닌지 두려웠습니다. 자기와 아내가 늙어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드리자면 ‘아무리 늙어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자기를 특권의식과 예외 의식 안에 둔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잘못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아내도 늙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75세에 약속을 받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 약속이 이루어질 조짐은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 안 있어 아브라함은 100세가 될 것이고 사라는 90세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혹시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더 이상 나와 함께하실 수 없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약속의 조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자손이 없어도 상관이 없지만 약속이 이루어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서 떠나셨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내게서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는 어떤 잘못이나 더러움이나 부패함을 보신 것은 아닌가?’라고 두려움을 가질만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오셨고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한 후사를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소중함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에서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이 사라지는 상황을 두려워합니다. 가장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잃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집 앞에 내놓은 쓰레기를 누가 가져갈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쓰지도 않는 물건을 달라고 할 때 아까워할 사람도 없습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소중한 것의 상실과 이어집니다. 아브라함은 소중한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대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마음에서 소중히 여기던 하나님을 절대 잃게 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이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지극히 큰 보물이 되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잃는 것을 두려워한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것은 아닐까?’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방패가 되신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큰 상급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보물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보물이며 너를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듣고 안심하며 하나님께 제안합니다. 다시 3절을 보면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늙었습니다. 저의 집안의 집사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세우셔도 괜찮습니다. 굳이 저의 아들이 아니어도 상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가졌으니 다른 무엇을 더 얻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지 않으신다는데 더 바랄 것은 없습니다.’라고 하는 셈입니다. 당시 상속자가 없는 상황에서는 집안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종을 상속자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도 아무렇지 않다는 마음가짐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주권자 하나님 앞에서 이런 제안을 한다는 자체는 월권행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월권행위처럼 보이는 아브라함의 말을 듣기 싫다고 여기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는 말씀을 듣고 안심하고 기뻐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계시면 됩니다. 상속자에 대해서는 제 아들이 아니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십니다. 쉽게 말해 ‘약속의 성취 여부보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렇게 좋으냐? 나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느냐?’라고 웃으시며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애정이 흘러넘쳐서 누가 봤다면 닭살 돋겠다고 할 정도의 대화가 오고 가는 상황입니다.
믿음이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좋아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지금 이 장면 속에서 나와 관련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서 나와 연관된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궁금하시다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뜻을 알려오셨습니다. ‘네 마음을 빼앗기는 세상일에 대해 내 아들 독생자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함이 분명하다면 알려오신 그 뜻을 붙잡고 십자가에서 죽으면 될 일입니다. 내가 관심을 둔 일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궁금해하며 하나님께 묻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 몸이 이 땅에서 몇 년을 살지, 얼마나 건강하게 지낼지, 내 몸 때문에 생긴 관계 안에 있는 가족들이나 사람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내가 궁금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계속 궁금하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면 다른 것에 대해서는 궁금할 수 없습니다.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여기며 마음을 다 드려본 적이 있다면 이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매일 바뀌기에 우리의 마음도 매일 씨름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여겨본 경험이 있다면 다른 일이 궁금할 새가 없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궁금하지 않기에 뜻을 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끌어가실 것은 분명합니다. 내가 세상일 앞에서 취해야 하는 태도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임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란 마음에서 세상일이 보일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마음은 세상일이 아닌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이러한 뜻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궁금하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할 때 저절로 알려집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알려오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의 모습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 중에 올바른 것은 ‘하나님을 많이 갖고 싶다’라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이로부터 요구되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곧 세상 좋음에 대한 죽음입니다. 내 마음에서 영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세상 것들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뜻을 알려오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알려오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될 뿐입니다. 내가 행동해야 할 뜻이라면 행동하면 되고, 아브라함의 자손 같은 문제는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버려 두면 될 뿐입니다. 내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해야 할 일은 마음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것뿐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악질적인 것이라고 말씀드린 이유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그렇게 악질적으로 믿음 생활을 해왔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 중에 탑 클래스의 믿음을 가졌다는 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영광의 세상 것을 보면서 그와 관련된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합니다. 이것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당으로 취급하는 악질적인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일이 궁금할 리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시편 37절 4절의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와 일치합니다. 사도 바울 또한 빌립보서 2장 12~13절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가운데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상태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성경은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멋대로 마음이 영광의 세상 것을 보면서 그것이 잘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알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악질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영광의 세상 것을 보면서 그것을 위해 뜻과 계획을 세우며 살아가는 것은 악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마음에서는 영광의 세상 것을 보면서 그것이 잘 되게 하기 위해, 실수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평범한 악이 아닌 하나님을 무당으로 취급하는 심각한 악질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세상 것의 앞날을 가르쳐주는 무당이 아닙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봐야지 영광의 세상 것을 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향한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 돈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궁금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뜻은 첫 번째로 ‘돈 문제에 대해 십자가에서 내 아들 독생자 예수와 함께 죽으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돈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 없이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는 상태가 되고, 그 상태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유지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고 알려주실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알려주시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처리해 나가실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를 지나서 알려질 수 있는 세 번째 뜻을 당장 알고 싶어서 구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아야 할 뜻과 계획을 다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무당으로 취급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혹은 세상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문제의 영역에 속한 전문가를 찾아가서 상담비 내고 해답을 듣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상담비 내면 해답을 주시는 분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세상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면 세상 것을 좋아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상담받고 예배당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을 상담비로 내려는 것은 믿음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문가나 상담사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애인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지극히 큰 상급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알려오신 뜻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상 모든 문제 앞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그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을 보며 기뻐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주관하시든지 무조건 범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 정해져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알려오신 뜻을 이루려 하지 않았습니다. 새삼스럽게 무슨 뜻을 알겠다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합니다. 건강이 안 좋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당으로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일개 전문가나 상담사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보다 더 하나님을 서글프게 하는 일은 달리 없습니다. 하나님을 볼 생각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좋아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러기 위해 십자가를 붙잡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 것을 밝히 보며 세상 것을 좋아하면서 하나님께 ‘하나님! 내가 좋아하는 세상 것을 실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전지전능한 뜻을 가르쳐주셔서 내가 좋아하는 세상 것에 영원무궁이 실패하지 않고 잘 나가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악질입니다.
제가 악질이라는 험악한 단어를 쓴 이유는 위기의식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번제 시즌3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만나 아브라함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다 지나가기 전에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강하게 각인될 수 있기 위하여 악질이라는 말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모든 세상일에 대해 알려주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영광의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일에 대해 우리가 몸으로 행할 일이 있으면 소원의 형태로 알려주실 것이고, 우리가 행할 필요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나가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알려주시는 뜻만을 따라 살게 해 주시고 내가 알고 싶은 뜻을 좇아가는 악함을 중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