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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문제는 내가 직접 신과 소통한다>의 줄거리 :
선민인 이스라엘 광야 교회에 출애굽 이후 특이한 사건이 하나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모세 외에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생각을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조직화에 관한 생각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직접 소통의 통로를 모세 한 사람에서 여러 명의 중간 책임자들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모세 한 사람에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들로 채널이 늘어나는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기의 개별화를 위한 첫 단계를 밟는 셈입니다.
내 문제는 내가 직접 신과 소통한다
(출애굽기 18:13~27)
13. 이튿날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는지라
14.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백성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 이르되 네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찌 됨이냐 어찌하여 네가 홀로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곁에 서 있느냐
15. 모세가 그의 장인에게 대답하되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16.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쪽을 재판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17.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18.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우리가 읽은 18절 이후에는 모세가 이드로의 충고를 따라 중간 간부를 임명하여 이스라엘을 조직화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 어려운 일은 가져오고 작은 일은 스스로 재판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중심으로 ‘내 문제는 내가 직접 신과 소통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제목이 너무 길면 설교의 제목란에 다 들어가지 않기에 신이라고 줄여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신이란 당연히 유일하신 참 신이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의 연합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며 삶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과 직접 소통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불신앙이며 하나님이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를 위해 내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였다. 너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내 아들인 예수와 연합해야 한다. 너는 예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와서 나를 상대하라. 그리고 너에 관한 문제를 나에게 직접 들어라. 너의 문제를 나에게 묻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은 너와 대면하기 위해 내 아들을 희생시킨 너를 향한 나의 사랑 자체를 무시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우리는 내 개인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과 소통하여 대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을 통해 그 대답을 얻고자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후로는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조차도 은사를 받았다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응답을 부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특히 기도 응답으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받으러 가거나 예언하는 사람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모두 불신앙입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 가짜입니다.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차단하는 귀신 놀음이자 마귀의 작용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선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광야 교회는 200만이 넘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많다 보니 시시비비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모든 백성의 시시비비를 혼자 재판했고, 백성들은 은행 창구에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듯이 자기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은행에 창구가 하나만 있다면 가장 붐비는 시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릴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단체는 여느 단체와는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선민의 특징이란 직접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판결을 받는 단체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지금 연결되어서 직접 답을 얻는다는 이 사실이 빠진다면 선민이나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여느 단체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든 종교는 가짜 신을 믿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인들의 모임인 교회만이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통하여 연결이 됩니다.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나의 살아계신 인격적 주머니가 되시고, 지갑이 되시고, 모든 문제에 대한 응답의 창고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연결됨이 없다면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 한 사람에게 모든 백성이 몰려와서 재판을 받는 모습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닙니다. 백성이 이렇게 한 이유는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과 소통의 통로를 모세로 국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경험했던 기적들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모세를 찾아온 장인 이드로는 희한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삶에 문제가 발생한 모든 백성이 줄을 서서 모세의 판결만을 기다렸고, 모세는 이들에게 일일이 대응하느라 하루 종일을 소모했습니다. 은행 창구 하나에 수백 명이 줄을 선 것보다 수십 배는 더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이드로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중간에 세워서 작은 일들을 담당하게 하라고 충고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선민이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한 개별화 단계의 시작입니다. 중간 간부들이 세워지고 이제 성전이 생깁니다. 이로부터 선민은 삶에서 자기 문제에 대해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 속에서 직접 하나님과 소통하며 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성전은 예수님의 등장에 대한 예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연쇄 과정으로부터 하나님과 직접 소통의 개별화가 완전히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중간 간부들을 세우고 난 후에 모세의 일은 전적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 전체에 해당하는 일들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신 선민 각자에게서 일어난 일들은 중간 간부들이 맡게 됩니다. 중간 간부의 등장은 하나님과 직접 소통의 개별화까지 가기 위한 중간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직접 소통을 위하여 반드시 개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을 읽을 때 생기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모세는 조직화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이드로의 제안은 무척 상식적이었습니다. 모세가 상식이 없어서 조직화를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가 기록된 사도행전 7장 22절을 보면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왕자로서 애굽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체제와 조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애굽은 사법, 행정, 교육, 농사 등에서 체제를 잘 갖추고 있었고, 모세 또한 왕자로서 이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모세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200만 명이 넘는 백성의 시시비비를 직접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비효율적이었을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드로가 제안하기 전까지 모세가 조직화를 떠올리지 못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모세야말로 왕자로서 애굽의 선진 체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했던 이유는 백성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판결을 전해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장인 이드로가 중간 간부의 조직화 제안을 했을 때 모세는 이상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에 대한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넣어 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모세는 조직화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직하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장인 이드로가 조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모세의 마음에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린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로서도 무척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출애굽 후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모세에게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 관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모세 이외에 다른 소통의 통로를 만드신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드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얼마 되지 않은 신앙의 초보자입니다. 그런데 이드로가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뽑아서 효율적인 조직을 만들라고 조언하는데 모세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세 또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까지 하나님의 뜻이 없었기에 하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드로의 말에서 확신이 생겼고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장인의 말이라고 해서 따랐을 리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만 하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던 모세였기에, 하나님께서 ‘지금 너의 장인 이드로가 해주는 말이 나의 생각이다.’라는 확신을 주지 않으셨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러한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생각을 못했을 리도 없습니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 외에도 당신의 생각을 가르쳐 주시는 사람이 있구나!’라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드로에게 당신의 생각을 주신 것처럼, 사람들의 시시비비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말할 수 있는 중간 간부들을 세우셔서 그들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겠다.’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확신 아래에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모세는 하나님과의 유일한 소통의 채널이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채널을 다양화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이드로의 말에서 이에 대한 확신을 갖고 조직화를 시작합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소통 채널의 다양화는 시기하거나 질투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의 소통을 독점하려 했다면 자기 위치를 상실할 것을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도 모세를 통해 십계명과 율법을 비롯한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일이 벌어집니다. 이제 모세는 200만 선민 전체에게 해당하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기록하고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한편 모세가 이렇게 선민 전체가 공통으로 받아들여야 할 말씀과 계명과 율법을 기록하고 가르치는 일을 할 때, 중간 간부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에 입각해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백성들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판결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의 성격이 달라질 것임을 이해했고, 개인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는 중간 간부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조직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 사회 조직과 다른 점은 판결을 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과 소통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이라는 중간 간부의 등장은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기의 개별화를 향하는 첫걸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복음 사건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이러한 본문은 내 삶에 대한 문제는 내가 예수님을 붙잡고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 시대를 예견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 마음이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소통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21절을 보면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능력이 언급됩니다.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이 될 사람은 판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판결의 능력이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으로써 하나님과 소통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일반 사회에서 말하는 능력과는 차별화되는 개념입니다.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좋다고 여기는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는 힘을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의 단체에서 필요한 능력은 하나님과 소통을 위한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소통은 예수님 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 예수님과의 연합이란 하나님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능력임을 언급하는데 그 내용이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고, 두 번째는 불의한 이익을 미워함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능력,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능력이 있으면 하나님과 직접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앞에 있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생각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자가 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직접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란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하나님 경외란 하나님이 내게서 없어짐을 가장 두려운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기 위해 첫 번째로 가져야 할 능력입니다. 많은 기독교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주권자이심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마음에는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분명히 느낀다면 마음에서 무게가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감입니다. 이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습니다.
머리에서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것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도 마음에서 하나님이 살아있는 분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묵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상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상대자가 아니라면 하나님과 소통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장로님에게 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제 장로님은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과 소통하며 뜻을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돈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동안 돈 문제의 존재감은 점점 커지게 됩니다. 마치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제자들이 풍랑의 존재감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감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알았으나 마음에서는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있음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음에는 하나님 없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가족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든 마음에서 존재감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면, 풍랑 만난 배 위의 제자들처럼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은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이 상대자가 아니게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오직 마음에는 문제만 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이름은 머릿속에 갇혀 있고, 교리 속에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살아있는 분으로 믿는다면 마음에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마음에서 하나님이 상대자로 없음이 된 것입니다. 오직 문제만 있음입니다. 머릿속에 갇혀 있는 개념으로써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답을 구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름은 아무리 불러도 그 개념이 우리에게 뜻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에서 살아계셔야 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시며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만 생기면 문제가 마음에서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에서 멀어지다 못해 없음이 되어버립니다. 오직 머리와 입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만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없음이기에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문제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문제의 존재감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를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부활 승천의 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이 느껴지면서 상대자가 되시고 소통이 시작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한 모든 기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철야를 하는데 마음에서 돈 문제를 보고 있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돈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답을 가르쳐 주세요. 길을 보여주세요.’라고 아무리 기도할지라도 마음에서 돈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돈 문제의 존재감만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서 이미 상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없음이 되어버렸습니다. 오직 개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을 뿐입니다. 돈 문제에 쫓기는 다급함만 살아서 소리를 지르며 주여, 주여, 하면서 응답을 간구하지만 마음에서는 이미 하나님을 상대자의 자리에서 없애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란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내게서 없어짐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직접 소통의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또한 불의한 이익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이익이란 좋음이 보태지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불의한 이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불의한 이익을 미워함에는 다시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불의한 좋음이 내 속에서 유지될 수 없게 죽이는 것과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고 좋아하는 모든 것이 불의한 좋음입니다. 하나님 말고 돈을 좋아하고, 하나님 말고 건강을 좋아하고, 하나님 말고 가족의 형통을 좋아한다면 불의한 좋음입니다. 목사님이 하나님 말고 목회를 좋아한다면 그것도 불의한 좋음입니다. 사람들은 불의한 좋음일지라도 보태지는 방식이 정의로우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돈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돈을 얻는 방식이 정의롭고 공평하면 괜찮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시시비비를 가릴 판결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직접 소통이 가능해지려면 좋음에서 불의한 좋음은 없어져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불의한 좋음입니다. 불의한 좋음을 갖고 있다면 불의한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좋음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불의함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전에 유익하다고 여겼던 것은 불의한 좋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은 후에는 그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만을 좋음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을 좋음으로 여기는 사람과 돈을 좋음으로 여기는 불의한 좋음에 사로잡힌 사람이 돈 문제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린다면 판단이 같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공평하고 정의롭게 한다고 해도 판사 자신이 불의한 좋음을 좋아한다면 그 판결이 하나님의 판결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서 만나는 것들을 좋아하는 불의함 좋음 자체를 내 속에서 유지될 수 없게 죽이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만 좋아하는 동안 세상에 대한 불의한 좋음은 없어집니다. 그럴 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오게 됩니다.
내가 돈을 좋아한다면 돈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건강을 좋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건강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보내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좋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유일한 좋음인 입장에서 세상에 대한 뜻을 갖고 이끌어 가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유일한 좋음이다.’라는 입장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십니다. 이러한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의 판결을 듣고 소통할 사람이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보태지는 것이 이익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러한 이익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 좋아함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이 소통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돈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을까요? 돈 문제가 하나님의 존재감을 밀어낼 정도로 급박한 상황 자체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나는 돈은 잃어버려도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지 않겠다.’라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나에게 진짜 좋음은 돈 문제의 해결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시는 입장에서 돈 문제에 대한 뜻도 갖고 계십니다. 따라서 돈 문제가 해결됨을 좋다고 여기는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은 하나님과 직접 소통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두 가지 능력의 측면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나의 유일한 좋음이 되신다는 것을 아십니다. 내 마음으로 하나님의 존재감과 소망의 대상으로 가질 때에만 온전히 만족하고 좋을 수 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입장에서 내 삶에 대한 뜻을 갖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런데 나는 엉뚱하게 이 세상 것들이 내게 좋음이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에 문제가 생기면 이에 대해 하나님께 답을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통이 될 수 없는 불통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문제의 해결보다는 하나님 자신이 더 좋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어차피 이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이 문제를 계기로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못 박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문제 때문에 걱정하는 나를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좋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너의 유일한 좋음이다.’라고 전제하시고 나를 이끌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알려집니다. 그 뜻대로 하나님에 의해서 돈 문제를 해결하신다고 해도 해결된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나의 좋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한편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할 때 이 땅에서 얻게 되는 보너스가 있습니다. 우리는 소통을 계기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얻고,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전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지는 보너스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잘 되거나 못 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사도 바울은 전도하다 돌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기에 이익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도 아버지의 뜻대로만 된다면 좋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내게 보너스입니다. 내 삶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 눈에 나쁘게 보이더라도 그것은 내게 보너스입니다.’라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지 세상 사람들의 기준을 따라 잘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자들이 선민이고 교인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감이 사라져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불의한 좋음에 사로잡히는 죄의 체질을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소통의 능력을 갖추고 매사에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뜻대로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매일매일 만나가 내리듯이,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계속 이루어지는 보너스를 받으며 축적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과의 직접 소통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님을 붙잡는 모든 자들에게 허락하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통해 주어지는 특권을 누리며 오늘 하루의 삶 속에서도 아버지를 원금처럼 이익으로 붙잡고,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보너스로 가득 찬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