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들밥
이영백
어렸을 때 경주분지의 끝자락에 살았다. 불국사기차역 앞 소한들이 있는 들판 가장자리이다. 형산강 남천지류인 시래 천변으로 논벌이 펼쳐져 있다. 사오월 농사철이면 부지깽이도 가만있지 못하게 바쁜 농촌이다.
오늘은 모내기 날이다. 새벽부터 아버지, 형님들, 큰 머슴, 중 머슴은 모판에 피사리하고 이제 모를 쩌 내었다. 모판의 여린 모를 모판바닥인 흙을 다잡아 모 뽑아 한 춤이 되면 짚 훼기로 단 묶는다. 논둑에는 아버지 담뱃불인 개쑥부쟁이로 묶어 만든 봉에서는 꺼질듯 말듯 아련히 흰 연기를 계속 피워내고 있다. 아버지는 다음 심을 논에다 써레질한다.
그 날 모내기는 못줄 한 번 넘어가고부터 연이어 그렇게 하면 논바닥에서는 모가 심겨진다. 동해남부선 부산 가는 증기관차가 기적소리를 낸다. 논바닥에서 엎디어 종일 모심으면 배가 절로 고파온다. 벌써 점심인 들밥이 누나, 형수, 엄마로부터 이고, 들고, 안고 줄을 잇는다.
송계댁 첫 모내기라 들밥준비에 심혈을 기울이었다. 흰 쌀밥, 들깨 갈아 넣은 미역국, 햇감자 캐다가 씻어 멸치 함께 볶은 것, 은 갈치 썰고 애호박 곁들여 찌진 것, 밥 위에서 얹어 만든 장떡, 어느 것 하나 밥과 반찬의 맛은 기가 찬다. 참비름나물에 깨소금 넣고 묻힌 기막힌 반찬도 있다.
힘들이어 모 심는 일꾼들 점심 잡수시라고 호각신호로 불러내었다. 들판 논둑길 가장자리에 즉석 들밥 만찬장이 차려졌다. 비록 흙바닥에 퍼질고 앉아 먹는 들밥이지만 그 맛은 어느 정찬보다 시장이 반찬이요,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는 최고이다. 이에 빠질 수 없는 막걸리 한 잔은 단연 최고의 피로회복과 기운을 돋운다. 들밥에 바람 불어 주어 더 맛 난다.
들판으로 가져다 놓은 들밥은 객식구도 따라 는다. 길 가던 동네어른도 숟가락 들고 거들게 된다. 송계댁은 넉넉한 인심을 이때 후하게 쓴다. 그냥 보내지 않고 길손들에게 점심 한 그릇 함께 먹는 것으로 대접한다.
농촌 첫 들밥은 그 해 농사기원의 의미도 있기에 푸짐하게 준비한 밥상이다. 일하다 먹는 들밥은 농사짓는 농부들에게 배부름이 으뜸이요, “농자천하지대본”깃발 세울 때 황금 들녘 바라보는 것이 보약이다. 오늘 들밥 먹는 첫날이다. 온통 들판 가장자리는 송계댁 첫 들밥이 사로잡는다.
첫댓글 엽서수필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