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의 원수, 종교심을 파헤친다>의 줄거리 :
종교심은 십자가 복음 신앙을 말살합니다. 이 둘의 너무나도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종교심과 신앙이 혼돈 속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이 '신앙'이라는 단어를 종교심이 도둑질해 버렸습니다. ‘신앙’을 되찾아 와야 합니다. 그러려면 종교심의 정체를 명확하게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현행하는 종교 전체와 한판 싸움을 벌일 필요는 없습니다. 나 한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종교심을 잡으면 됩니다. 십자가와 종교심은 상극입니다. 종교심의 뿌리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꽂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 종교심을 파헤친다
(사사기 18:1~31)
1.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2.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그들의 가족 가운데 용맹스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고 살피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 그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니라
3. 그들이 미가의 집에 있을 때에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리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하니
4.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나를 고용하여 나를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 하니라
5.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6.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본문 중심으로 <십자가의 원수, 종교심을 파헤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제 나름의 지식에서 보자면 본문의 내용은 종교학 총론과도 같다고 여겨집니다. 종교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속속들이 파헤쳐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종교심과 신앙심이 어떻게 다른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내용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본문은 종교가 무엇이며 신앙과 어떻게 다른가를 깊고 정확하게 알려주십니다. 이러한 본문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올라타 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신가를 다시 한번 확인해 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단 지파가 아직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만 단 지파는 유다 지파 위쪽으로 지중해 연안의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단 지파의 오른쪽에는 베냐민 지파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단 지파는 땅을 분배받았지만 새로운 땅을 찾습니다. 단 지파가 얻을 땅 북쪽에는 납달리 지파와 잇사갈 지파가 있었습니다. 단 지파는 이스라엘 북쪽 경계 바깥에서 단이라는 곳을 얻어서 정주하게 됩니다. 이곳은 분배가 끝난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땅을 분배받지 못했기 때문에 다섯 명의 정탐꾼이 발견한 땅은 이스라엘 경계 바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경계 안쪽은 지파별로 분배가 다 이루어졌기에, 단 지파는 경계 바깥쪽에 있는 라이스라는 장소를 발견하여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제비뽑기가 이루어진 후의 일입니다. 단 지파는 라이스를 점령한 후 자기 지파의 이름을 붙여 단으로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이 머무는 지역으로 말하자면 최북단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아직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다는 것은 단 지파 사람들의 입장에서 기록한 내용입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땅을 분배받았으나 이들의 경계 안에는 아모리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앞서 본 사사기 1장 34절을 보면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이 살고 있는 곳을 기업으로 할당받았고, 하나님께서는 단 지파가 아모리 족속의 땅을 정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각 지파에 땅이 분배될 때는 가나안 족속들이 없는 땅만 분배된 것이 아닙니다. 각 지파별로 분배받은 경계 안에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중부와 남부와 북부의 거점 정복은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그저 여호수아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각 지파별로 정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의도를 따라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도에 올라탈 수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각 지파별로 ‘여호수아만 따라가며 땅을 정복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에 올라타서 스스로 정복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분배받은 땅에는 여전히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지 않는다면 가나안 정복 자체를 시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각 지파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밀착해서 하나님의 의도에 올라탈 수 있어야 했습니다. 각 지파의 지도자만이라도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 지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단 지파가 하나님과 마음을 밀착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서 자신들에게 할당된 지역의 아모리 족속을 몰아내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에게 꼼짝 못 하였고, 가나안 족속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자리를 잡다 보니 안주할 수 있는 땅은 너무 좁았습니다. 앞서 등장한 삼손도 단 지파 사람으로서 이후에도 단 지파는 블레셋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 지파는 이러한 이유에서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 가서 거주할 땅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이 바로 종교심의 출발점입니다. 단 지파는 다른 땅을 알아보기 위해 정탐꾼 다섯 명을 보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단 지파를 향해 갖고 계셨던 계획과 의도에는 전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분배가 끝난 이스라엘의 경계 바깥의 땅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심의 출발점입니다. 단 지파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해 있었다면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고 아모리 사람들을 쫓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과 밀착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밀착함으로써 하나님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을 보면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벗이란 친밀한 관계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과 결별하려면 세상과 친밀하면 됩니다. 세상과 친밀함이란 마음이 세상과 붙어서 세상에 있는 어떤 대상들로부터 직접 좋음과 나쁨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좋음을 느낍니다. 하나님께는 나쁨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는 상황에서 나쁨이란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뿐입니다. 반면 종교심의 시작은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하지 않고 세상과 밀착하여 세상에서 좋음과 나쁨을 직접 느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세상의 좋음과 나쁨을 직접 느끼는 동안 나쁨을 피하고 좋음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계획하고 의도를 갖게 됩니다. 이처럼 스스로 세운 뜻과 계획을 따라 의도를 갖고 내 몸이 움직이는 상태가 종교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공통된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의 출발점은 어떨까요? 마음이 세상에 밀착하여 좋음과 나쁨을 느끼는 상황을 인지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은 안 된다.’라고 여겨서 이 상황을 부인하는 것이 신앙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종교의 첫 번째 단계가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마음이 세상과 밀착한 상태를 묵인하는 것이라면, 신앙의 첫 단계는 세상과 내 마음이 밀착해서 좋음과 나쁨을 직접 느끼는 상태를 인지합니다. 세상일에서 기분이 좋거나 나쁜 것을 인지하여 그 상태를 부인하는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신앙은 시작합니다. 복음 신앙은 마음이 세상과 밀착한 상태를 인지하여 부인함으로부터 시작하고, 종교심은 세상과 밀착한 상태를 묵인하면서 시작한다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출발점부터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심의 두 번째 단계는 신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과는 아무 상관 없이, 마음이 세상에 밀착해서 직접 좋음과 나쁨을 느낍니다. 스스로 나쁨을 피하고 좋음을 얻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몸으로 계획을 실천하게 됩니다. 실천하는 과정에서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종교심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이것이 신앙과는 너무나 다른 면입니다.
단 지파의 다섯 명의 정탐꾼은 땅을 알아보기 위해 출발하여 첫 번째로 들른 곳이 바로 미가의 집입니다. 미가의 집에는 신당이 있었기에 동네 사람들이 다 신당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그 신당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 은으로 부어만든 신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봇과 드라빔이 있어서 말 못 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상이 갖고 있는 뜻을 대신 전해준다고 믿었습니다. 그 말을 전달해 주는 제사장도 있었습니다. 미가의 신당은 작지만 지역의 예배당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 지파의 다섯 명의 정탐꾼은 미가의 집을 들른 후에 이 상황을 무척 인상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정탐 길이 편안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빌어주기를 부탁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줄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이 요청을 들은 제사장은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라고 축복을 해줍니다. 이것이 종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모습입니다.
이 사건에서 파악할 수 있는 문제가 무엇일까요? 단 지파가 자기들이 살 땅을 찾기 위해 가는 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단 지파를 향해서 갖고 계시는 계획과 의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길을 자기들이 결정해서 형통을 바라며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종교 지도자가 등장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본래 의도와 뜻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을 계획하고 뜻하여 실천하고 있는데, 그 길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길이고 하나님이 그 길을 형통하게 해줄 것이라 축복하고 약속을 해줍니다. 이것이 신앙과 구분되는 종교의 모습입니다.
일찍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은 아론을 중심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은을 부어만든 신상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훗날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분열할 때도 북 왕국의 첫 번째 왕 여로보암 1세가 최남단인 벧엘과 최북단인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남 왕국 유다에 있던 성전으로 갈 필요가 없게 합니다.
선민은 어떠한 이유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려는 유혹을 받게 된 것일까요? 말 못 하고, 생각 못 하고, 뜻도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가짐의 핵심은 자기 소견이 없는 신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심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신은 스스로 말이 없고, 판단이 없고, 의견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못할 것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는 전지전능한 신이라야 합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 의견과 판단이 없으나 전지전능한 신을 부리고 싶어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세상에 밀착한 마음이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것은 내 몫입니다. 어떤 일을 원하여 뜻하고 계획하고 실천할 때 자기 소견과 판단이 없는 신이 나타나서 전지전능한 힘으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돕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죄와 저주에 찌든 모든 인간의 로망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신의 형태는 전지전능하지만 자기 의견이 없어야 합니다. 반드시 내 의견을 따라야 합니다. 기도를 하든 제사를 드리든 신은 내 의견을 따라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붙은 상태에서 내 소원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신을 갖고 싶은 마음이 자꾸 여호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지 않더라도 종교심은 발동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밀착할 때 종교심이 발동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자기 소견 없이 나를 도와주는 신이야말로 최고의 신입니다. 이것이 종교심이 찾는 신입니다.
종교심의 발현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뒤집는 일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아담과 하와는 기쁨의 동산에서 살았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나는 판단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종교심은 이것을 뒤집습니다. 하나님은 판단하면 안 되고 내가 좋음과 나쁨을 판단합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 무엇이고 나쁜 일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찾게 되는 하나님이란 전지전능하시지만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내 판단에 따라서 나쁨은 제거해 주고 좋음은 쌓아주면 됩니다. 이처럼 타락하기 이전 에덴의 상태를 뒤집은 것이 바로 종교심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신을 관계하는 방식은 에덴에서의 삶의 방식을 뒤집음으로써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판단은 내가 한다. 하나님은 내 판단만 따르면 된다.’라는 것입니다.
종교심의 세 번째 단계는 축복에 대한 요청과 수락입니다. 종교심으로 찾는 신은 말 못 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신입니다. 이로부터 제사장으로 대표되는 종교 지도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종교와 종교 지도자들의 특징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축복을 해줍니다. 축복은 종교에서 바라는 제사장의 가장 큰 기능이자 대중을 향한 가장 중요한 기능입니다.
그러나 본래 축복이란 하나님이 원하셔서 자발적으로 인간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입니다. 강요된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애초에 강요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은 한 인간을 그 인간 자신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인간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능가할 수 없고, 하나님의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구하는 축복은 언제나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나에게 주시려는 축복보다 수준이 낮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를 하나님보다 모릅니다. 내가 나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나에게 필요한 것을 축복해달라고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축복이란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축복을 주시려고 합니다. 문제는 내가 축복을 내 수준에서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나, 내가 느끼는 필요, 내가 나에 대한 사랑을 기준으로 축복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종교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나를 향한 광대무변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식 안으로 뛰어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향해 축복을 요구하는 마음 자체를 죽여야 합니다. 축복을 요구함이란 내가 받을 축복을 굉장히 수준 낮게 강등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종교심의 상태에서는 축복하는 제사장이나 축복을 원하는 사람이나 어느 쪽도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본래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축복을 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심의 경우 하나님의 뜻은 이미 축복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결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축복을 요구합니다. 제사장에게 축복을 요청한 단 지파의 정탐꾼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나는 이 정탐 길에서 형통하고 싶다. 내가 이 길에서 형통하도록 축복을 해달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은 그 말을 받아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희를 축복하노니, 너희가 정탐하러 가는 길에서 형통하리로다.’라는 말을 해줍니다. 이것이 종교 지도자가 해주는 축복의 내막입니다.
종교 지도자에게는 축복이 어렵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은 축복을 바라는 사람이 다 결정해 놓고 기다립니다. 에봇과 드라빔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았다고 남발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래라면 하나님의 뜻을 들어야 될 사람들이 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축복을 원하는 자가 제사장 입에서 나와야 될 하나님의 뜻을 다 결정해 놓고 요구합니다. ‘나는 지금 이러이러한 것이 필요하다. 이러이러한 성공과 형통이 필요하다.’라고 제사장에게 알려주면,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원하는 형통과 성공을 이루어 주시리라. 다만 충성하고 봉사하고 바쳐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이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지만 정작 마음은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마음은 하나님과 완전히 결별한 상태입니다. 세상일에 대하여 좋음과 나쁨을 직접 느끼면서 걱정하거나 우울해한다면 마음이 세상에 붙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밀착해 있기에 세상으로부터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 보면서 하나님으로부터만 좋음의 느낌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마음이 세상에 밀착한 상태를 인지하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마음에 꼭 붙잡고 세상에서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문제를 대하든, 마음이 세상의 문제나 사랑하는 대상에 붙지 않도록 십자가를 기억하여 십자가로 분리해야 합니다. 마음이 세상과 분리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신앙심이고 복음 신앙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땅에서 몸은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탈 수 있습니다.
내 몸에는 생각, 감정, 의지, 말, 행동이라는 다섯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님 의도의 손가락이 내 지정의언행의 기능을 장갑으로 끼시고 움직여 가시면서 삶은 이루어집니다. 그 삶의 내용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루어져 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환경미화원은 청소를 하고,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의 일을 할 것이고, 회사원은 회사에서 일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반면 종교의 삶이란 신앙의 삶과는 완전히 반대 길로 가는 것입니다.
종교심의 네 번째 단계는 실효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는 종교의 힘을 강조하거나 드러내거나 광고하고, 종교심을 가진 사람들은 종교의 실효성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단계가 이루어집니다. 내가 지금 선택한 종교나 종교 지도자가 실효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검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섯 명의 정탐꾼은 제사장에게 축복을 받고 길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경계가 끝나는 최북단에서 라이스라는 지역을 발견했는데 그곳의 환경이 매우 좋았습니다. 원주민들을 보니 아모리 족속처럼 군사력을 갖추지도 않았습니다. 눈먼 땅을 발견한 정탐꾼들은 돌아왔고, 단 지파 사람들은 이들의 말을 따라 정복에 나섭니다. 다섯 명의 정탐꾼이 라이스 땅을 발견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이들은 미지의 세계를 정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이스라는 곳을 보니 100% 자기들이 원하던 바로 그 땅입니다. 이들은 출발할 때 미가의 신당에서 제사장은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라는 축복을 했습니다. 이 길 자체는 하나님께서 애초에 단 지파를 향해 갖고 계셨던 의도 바깥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라이스를 정복하기 위해서 단 지파는 육백 명의 장정을 선발대로 보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 일이 특이합니다. 이들은 미가를 협박하여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강탈하고 레위인 청년 제사장을 스카우트합니다. 19절을 보면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라고 했습니다. 레위인 청년 제사장은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미가의 집에 있던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다 들고 단 지파 사람들을 따라나섭니다.
이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3300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지금 대한민국 개신교 종교의 상황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교를 잘한다는 목회자들의 마음이 다 세상에 붙어 있습니다. 천국을 이야기해도 실상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여 안정된 마음으로 세상을 살려는 의도입니다. 내 마음이 지금이라도 예수님을 따라가고 싶어서 천국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이 있는데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 그러니까 사는 동안에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돼서 살아라. 마음을 다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라.’라고 말하며 종교적 구색을 갖추느라고 천국을 언급할 뿐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목사님이 설교 잘하는 목사님이라고 소문이 납니다. 교인들의 마음은 세상과 밀착하여 나쁨을 피하고 좋음을 추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마음에 희망을 불어넣는 목사님은 인기가 높습니다.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옵니다. 교인들은 예배당에서 발생하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보면 체험적으로 목사는 이래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를 데려올 때 스카우트 조건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종교의 실효성의 단계를 거치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마음은 세상에 밀착하여 세상에서 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에 대하여 종교나 종교 지도자가 이걸 잘 해내느냐는 것을 관찰하는 단계가 됩니다. 그런데 성공을 한다면 어떨까요? 본문에서처럼 제사장이 말해준 대로 잘 되는 경우입니다. 제사장은 여호와 하나님이 길을 형통하게 할 것이라고 말해주는데 확률은 50대 50입니다. 말하면 절반은 맞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도 다 절반은 맞습니다. 종교를 안 가져도 내가 하는 일이 잘될 것이냐 못될 것이냐 확률은 반반입니다. 문제는 내가 부릴 수 있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대변해 주는 제사장이 세트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을 붙이고 있는 이 세상일이 안정적인 미래로 갈지 말지 불안하기에 뭐라도 붙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단 지파는 성공적으로 라이스를 정복했고 미가의 신당에 있던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은 단 지파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자판기처럼 남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뜻과는 상관없는 일을 자기들 멋대로 하는데, 제사장은 거기에 희망을 주고 확신과 하나님의 축복을 불어넣어 줍니다. 훗날 단은 금송아지 숭배의 본거지가 됩니다. 그리고 남북 왕국이 분열된 뒤로 200여 년 만에 북 왕국을 구성하고 있던 선민 열 지파는 이 지구상에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이 사건은 종교의 효용성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계속 종교심을 유지해 나갈 때 어떠한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선민의 이름을 적은 하나님의 명부에서 완전히 지워지게 됩니다.
종교심은 예수님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종교심과 신앙심은 내 마음이 세상에 밀착된 죄와 저주에 찌든 결과의 상태에서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길로 갈라지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에 붙어서 직접 좋음과 나쁨을 느끼며 걱정 근심하거나 희희낙락하고 있다면 종교심으로 발전할 것이지만, 이것을 인지하여 부인함으로써 신앙으로 발전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세상에 밀착한 상태는 종교심의 뿌리입니다. 이 종교심의 뿌리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꽂아서 죽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멸망의 길과 생명의 길은 내 마음이 세상에 밀착하는가 십자가에서 죽는가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이제는 한 발짝도 더 이상 종교심으로 걷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하나님 아버지!
감사 감사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제사하면
찬양 부르면
예배 흉내를 내며 아 멘 하면서
경 배 함이 없이
세상과 벗 한 자로 모여 입을 열어도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 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는
거짓 말 앞에 듣기 좋다고 아멘 하며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우리들
어리석고 악한 우리들을 용서해주심을
감사감사 감사드립니다
포기하지 않고 변찮는 사랑품에 품어 살리려
뒤쫓아오신 은혜 감사감사감사 드립니다
이 귀한 은혜길을 알려주시는 태승철 목사님
입술열어 주의 말씀선포 할때마다
위장 포장되지 않은 말씀들려지는곳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자들이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찬양이
곳곳에서 울려 퍼지게 하옵시고
영광 홀로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사님 감사합니다
죄로 오염되지않은 생명말씀의 은혜
아낌없이 흘려보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욱 강건하십시요
해남 바닷가에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