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니 숙소에서 멀리 떨어진 하나 밖에 없는 화장실에 일행들이 눈 속을 헤집고 열심히 드나들고 있는데 아마도 속들이 불편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숙소 안 가축우리에선 눈을 맞고 서서 그대로 잔 양과 소들이 깨어나 아침을 달라는 듯 울음소리를 낸다.
아침 식사를 하고 식사를 차려준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데 식사를 차려 준 두 분이 고부간인지 모녀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외국 손님들이나 자국민 등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로 장사를 한지 꽤 오래 된 것 같으나 아직도 얼굴에 순박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침을 먹고 이식쿨 호수로 출발한다. 이식쿨 호숫가에 있는 출폰 아타까지는 구글지도에서는 366㎞에 다섯 시간 반이 걸린다고 나온다.
숙소에서 국도로 나오는 비포장도로 주변 언덕에 작은 굴을 파서 그 안에 사는 마못이 아침식사를 하러 나왔는지 모래 언덕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고 있고 부지런한 목동은 말을 타고 양떼를 몰아 초원을 찾아 나서고 있다.
타쉬 라밧에서 국도로 들어서자 버스를 세우고 어제 우리가 지나왔던 텐산산맥과 국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다시 출발한다. 우측에 눈을 이고 있는 천산산맥이 계속 이어지고 그 산맥 아래 마을들이 군데군데 눈에 보인다. 일직선으로 쭉 곧게 뻗은 2차선의 아스팔트 길 양옆으로 드넓은 초원이 있고 그 옆으로 초록의 산이 길게 자리하고 그 산 허리에 흰 구름이 보였다가 비도 내리는 것 같다. 2차선 도로엔 중국을 넘나드는 대형 중국 트럭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고 있어 키르기스스탄의 높은 중국 의존도를 실감나게 한다. 물론 바다가 없는 키르기스스탄의 지리적 여건으로 많은 생필품을 이웃 나라를 통해 들여와야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중국이 경제적으로 키르기스스탄을 지배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초원 여기저기엔 수많은 양과 염소, 말,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목가적 풍경이 끝없이 이어진다. 초원에 날렵하게 생긴 말 떼가 보이는데 한혈마(汗血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 보이는 마을 옆엔 마을 규모에 비해 커 보이는 공동묘지가 보인다. 우리나라에선 묘지 특히 공동묘지는 마을에서 먼 산에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왜 이곳에선 마을 근처에 묘지가 있을까? 더구나 묘지 형태도 봉분이 아닌 집이나 이슬람사원처럼 화려하게 만들었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두 달 밖에 안 돼서 그런지 자꾸 묘지에 관심이 간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초원을 빠져 나오자 Kara Suu에서 At Bashy까지 계곡이 이어지고 긴 협곡을 한참 지나면 나린 주의 주도 나란 시가 나타난다. 협곡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어느덧 천산산맥을 이별하고 나린 주의 주도인 나린이라는 곳으로 가는데 30여분을 정신없이 내려간다. 이곳에서 키르기스스탄에 머물 동안 필요한 돈을 환전하는 곳이다.
키르기스스탄은 면적이 199,990km²로 남북한(22만㎢)을 합친 것보다 조금 적고 인구는 670만명(2022)이며, 2024년 IMF 통계기준으로 1인당 GDP가 1,930달러인 최빈국으로, 짐바브웨, 케냐, 라오스보다 낮고 에티오피아와 동급이다. 타지키스탄을 제외하면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인종은 키르기스인 68%, 우즈베크인 14%, 러시아인 9%로 구성되어 있으며 종교는 이슬람(75%), 러시아 정교(20%), 개신교 등 기타(5%)로 종교를 보면 이슬람이 지배했던 기간이 길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863년 제정 러시아에 정복당해서 병합이 되었다가 1922년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면서 1926년 키르기스 자치공화국으로 개칭하면서 구소련의 연방공화국이 되었다가,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1991년 8월 31일 독립하게 되었다. 고산이 많고 사막이 없는 천혜 환경을 지니고 있어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 불리지만, 민족이 조상대대로 목축을 하면서 살았던 민족이기 때문에, 천혜의 자연환경을 관광자원으로 아직 개발하지 못한 모양이다. 국민들이 유목민이기도 하고 지하자원도 빈약하다가 보니 경제개발이 어렵게 되고 그 결과 일인당 GDP가 말해 주듯이 아주 가난한 나라인 셈이다.(국경을 맞대고 있는 카자흐스탄은 일인당GDP가 9,139달러이다.)
나린은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천산산맥 아래 있는 교통 요지로 나린주(州)의 주도(州都)이고 인구는 30만 정도 되는 소도시로 나린 강이 도시를 관통하고 있고 이 강물은 우즈베키스탄까지 흘러간다. 여행자들의 이야기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환전만 하고 가는 도시일 뿐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키르기스스탄에서 머물 동안 쓸 돈을 환전해야 하는데 중앙아시아 대부분에서 달러가 통용이 되지 않는다.(관광지에서 상품을 살 때는 달러사용 가능) 여행사직원과 길잡이가 환전할 은행을 찾아보는데 휴일이라 문을 연 은행이 없어 인근 마트에서 환전을 한다. 은행에서 환전(1달러당 87.2솜)하는 것에 비해 약간 환율이 좋지 않지만(1달러 당 87솜) 적은 돈을 환전하기에 그냥 환전을 한다. 100달러를 환전했으니 20솜을 수수료로 준 셈이다. 잠시 후 마트 직원이 마트에 가지고 있는 현지 화폐가 적은지 기다리라고 하고 마트 사장이 인근 은행 ATM기기에 가 돈을 인출해 와 환전을 해 준다.
시간이 남아 거리를 둘러보는데 길에 보이는 사람들이 몽골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겨서 우리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구분은 가는 모습이다. 슬라브족인 소련이나 우크라니아 사람같은 모습을 한 백인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 나라도 국교가 이슬람교지만 오랫동안 러시아제국과 소련의 통치아래 있었기 때문에 남녀 불문하고 파키스탄처럼 무슬림 복장은 찾아 볼 수 없다. 길거리에서 보이는 수건을 머리에 두른 여자는 결혼한 여자임을 표시하는 것이라 한다. 아마도 이는 이 나라의 아래와 같은 결혼풍습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키르기스스탄에는 알라카추라는 풍습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알라카추는 '붙잡아서 뛰기'라는 뜻으로,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납치혼(拉致婚) 일종이다. 유목시절의 약탈혼 관습과 중동의 가부장적 문화를 배경으로 등장하였다고 한다. 실제 1년에 결혼하는 수가 54,000쌍인데 이중 50%가 알라카추에 의한 것이라고 키르기스스탄 정부에서 인정하였다고 한다. 대개는 양 집안의 합의하에 전통적인 퍼포먼스 정도로 행하고 있지만, 매년 1만명 이상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통이란 미명 아래 강제결혼의 피해자가 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강간, 폭행, 살인사건도 종종 발생하지만 경찰에서도 알라카추를 묵인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의 풍습이나 여성에 대한 인식(순결을 잃은 여성)으로 인해, 이런 강제결혼을 80%는 어쩔 수 없이 순응하며 사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한다.
나린 시를 벗어나자 이곳까지 오면서 내리던 비는 그치고 Dolon Pass(해발 3,030m)란 험준하고 가파른 고개가 나타난다.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는데 우리 일행과 캐리어를 실은 승합차가 무척 힘겨워 보인다.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초원으로 탁 트인 시원한 풍경이다. 초원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소박하게 피어 있는데 바람과 추위를 이겨내고 이곳에서 꽃을 피운 야생화의 강인함이 느껴진다.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보이는 경치들은 지금까지 봤던 경치들과는 다른 풍경으로 초원과 메마른 평야지대의 중간쯤으로 지루할 수도 있지만 보이는 산이나 들판 초원의 모습들이 다 달라 지루할 틈 없이 즐겁다.
12시 반 Kochkor란 도시 외곽 주유소에 정차해 편의점에서 빵과 음료수를 사 점심요기를 하고 화장실도 다녀온다. 이곳까지 오면서 도로 주변을 살펴보면 평지와 다름없는 넓은 땅에 잡초만 무성하고 작물을 재배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작지만 농사를 짓는 내가 바라보기엔 안타깝기 그지없다. 주변에 설산이 있어 눈녹은 물이 풍부한 저 넓은 땅에 정부나 지자체에서 정책적으로 밀이나, 감자, 옥수수 등을 심도록 장려하거나 태양광 설비를 설치해 전기를 생산하면 키르기스스탄 국민들 삶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대대로 목축 위주로 살아온 나라라고 하지만 1인당 GDP가 2,000달러 정도인 최빈국에서 벗어나려면 가진 자연환경을 잘 이용해 목축 위주의 산업을 농경과 2차 산업 위주로 전환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토르갓 패스를 넘어 이곳까지 오면서 벽돌공장 말고는 공장이라고 생긴 건 볼 수가 없었고 대형버스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정치인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정치에서 벗어나 국민들의 삶을 증진할 수 있는 정치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11시 반 나린에서 출발해 이식쿨 호수의 출폰 아타까지 260㎞를 세 시간 반을 달려서 도착한 시간이 오후 세시다. 촐폰 아타(Cholpon Ata)의 Cholpon은 금성(별), Ata는 연상의 남자를 칭하는 말로 우리말로 직역하면 '어르신'쯤 된다. 이식쿨호수의 최대 휴양시설이 밀집돼 있는 휴양도시로 기후가 좋고 한겨울에도 따듯하여 사계절 내내 많은 관광객들이 찾으며 여름 성수기에만 수백만 명 관광객이 찾는다. 또한 촐폰 아타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접근성이 뛰어난 암각화 유적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