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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주권과 내 몸의 연합>의 줄거리 :
내 마음은 반드시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과 좋음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땅에 남아 있는 내 지정의의 몸과 하나님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연합 상태에서 벌어진 가장 전형적인 사건이 바로 골리앗과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땅에서 이루어지는 연합 상태에서 과연 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이런 연합이 이루어지는 순간 나는 이 세상 속에 있는 나를 어떤 존재로 보게 될까요?
하나님 주권과 내 몸의 연합
(사무엘상 21:10~15)
10. 그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본문 중심으로 <하나님 주권과 내 몸의 연합>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우리 마음이 하늘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먹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지정의 기능이 있는 몸이 연합합니다. 하늘에서는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하고, 땅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지정의 몸이 연합한다는 뜻입니다.
본문을 보면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블레셋으로 도피합니다. 블레셋에는 다섯 성읍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가드였고, 골리앗의 고향이었습니다. 가드는 블레셋의 다섯 성읍 중에서도 다윗에 대해서 가장 이를 갈며 죽이지 못해 안달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블레셋 땅 중에서도 하필이면 가드로 갔고, 가드 왕 아기스를 두려워하여 미친 척을 하며 비굴하고도 굴욕적인 모습으로 목숨을 건집니다.
그런데 성경은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영광과 굴욕을 대비합니다. 앞서 다윗이 진설병을 먹고 난 후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무기가 없냐고 물었을 때 아히멜렉은 다윗이 죽인 골리앗의 칼을 내줍니다. 이 칼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긴 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표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다시 도피하여 골리앗의 고향인 블레셋의 가드 땅에 이릅니다. 이때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보고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래하던 주인공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역시 골리앗과의 대결 장면을 연상시켰습니다. 이처럼 골리앗과 연관된 모든 것은 다윗에게 영광의 순간을 기억하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칼을 얻었고, 골리앗의 고향으로 도피했으며, 골리앗을 무찔렀을 때 이스라엘이 부르던 노래까지 등장합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영광의 순간을 배경으로 깔아놓고, 다윗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미친 척을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를 두려워하여 대문짝에 그적거리고, 침을 수염에 흘리고, 중얼대며 미친 척을 해서 목숨을 부지합니다. 이 영광과 굴욕의 대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결국 다윗이 블레셋으로 도망간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다윗은 성소로 도피했을 때 도엑이라는 사울의 목자장을 보았습니다. 도엑은 다윗이 도피하여 아히멜렉 제사장의 도움을 받았음을 사울에게 보고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다윗은 이스라엘 경계 안에서는 어디를 가든 사울의 눈이 작동하고 있을 것임이 뻔했기에 갈 곳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들어갔는데 이 부분에서 많은 오해가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위급함을 느끼고 두려움에 휩싸여 불신앙적인 결단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도피 생활 자체는 다윗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하심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피 생활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다윗을 전적으로 장악하시고 인도하신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도피한 것은 불신앙적인 결정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하심으로 블레셋 안에서도 다윗을 향해 가장 이를 갈던 가드로 가서 왕 앞에 서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마주하여 대결할 때와 똑같은 상황이 되도록 이번에는 다윗을 가드 왕 앞에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 섰을 때는 당당했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관용구는 인류 역사 3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용될 정도로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렇게 위대한 사건을 배경으로 깔고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척을 하며 너무나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도적으로 영광의 순간을 배경으로 하여 다윗의 굴욕과 수치를 더욱 부각해서 보여주십니다.
14~15절을 보면 다윗을 본 아기스 왕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아기스 왕의 말에는 굉장히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가장 우선적이고 악한 원수였습니다. 블레셋의 입장에서도 이스라엘은 원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다윗은 제거 대상 0순위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왕궁 한가운데로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다윗을 블레셋의 왕궁까지 끌어들이셨던 것입니다. 아기스 왕의 입장에서는 원수가 제 발로 굴러들어 온 셈이었습니다. 다윗은 현상금을 걸어 추격하고 암살자를 보내 죽여야 마땅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제 발로 들어와서 왕 앞에 섰으니 그 자리에서 죽여 마땅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죽음의 위기 앞에서 돌변합니다. 갑자기 미친 짓을 하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실감이 났는지 왕과 신하들이 다윗인 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갑니다. “이 미친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라는 아기스 왕의 말에는 더는 다윗을 죽일 필요조차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아기스 왕에게 다윗은 제거 대상 0순위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미친 척이 얼마나 실감이 났는지 죽일 필요도 없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수가 죽일 필요도 없다고 여길 정도로 다윗의 존재값이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가끔 과일 껍질을 놔두면 금세 날벌레들이 생기고 파리가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자꾸 몸에 붙고 식탁에 붙으면 파리채로 죽입니다. 또 잘 때 모기가 있으면 귀찮아서라도 꼭 죽여야만 합니다. 모기에게 잔치가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드 왕 아기스가 느끼는 다윗의 존재감이란 파리나 모기만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아기스 왕의 입장에서 다윗은 원수 중의 원수였기에 바로 죽여야 마땅했습니다. 다윗이 파리나 모기만큼의 존재감이라도 있었다면 아기스 왕은 다윗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스 왕은 다윗을 죽이지 않습니다. 다윗을 죽여봤자 귀찮은 파리나 모기 한 마리를 죽이는 것보다도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정도로 존재값이 제로였습니다. 원수가 죽일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존재값이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본문은 영광의 순간을 여러 가지 소재를 통해서 재현해 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광의 순간을 배경으로 다윗의 인생에서 있을 수 없는 뇌리에 박힐 굴욕과 수치스러운 현장을 만듭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의도에서 다윗을 영광과 굴욕이 대비되는 현장에 집어넣으시면서 우리 앞에 제시하시는 것일까요? 앞에서의 내용을 떠올려 봅니다. 도피 생활은 안식 기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안식 기간이란 삶의 모든 것을 다 끊고 하나님만을 마주하여 하나님을 먹는 기간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먹으면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생각, 감정, 의지의 기능이 작용함이란 혼(목숨)이 살아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먹으면, 살아 있는 몸과 하나님의 주권이 연합하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밝혀주십니다.
본문을 볼 때 다윗이 미친 척을 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서 불신앙을 드러냈다고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의도를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을 죽이지 않았음에 초점을 맞춰서 본문을 봐야 합니다. 다윗을 죽일 필요가 없는 존재로 느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문을 보면서 다윗에 대해 오해합니다. ‘미친 척을 하며 비굴하게 목숨을 보존한 것은 이스라엘 선민의 나라를 떠난 불신앙적 결정으로 인한 불행한 결과였다. 사울 왕과 사람들의 눈이 아무리 두려웠더라도 이스라엘을 떠나면 당연히 안 되는 일이었다.’라고 여기는 것은 오해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다윗은 하나님의 의도하심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도피 생활로 들어간 것이고, 하나님이 다윗의 발걸음을 인도하셔서 블레셋의 가드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놓친다면 다윗을 볼 때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현장처럼 살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믿음으로 담대하고 용기 있게 골리앗과 같은 삶의 문제나 대적들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신본주의적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 다윗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다윗에게 집중됩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은 담대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잘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은 분명히 믿음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다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이 그런 믿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도움으로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었다.’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 타령을 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 상태를 본다면 오해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는 이유는 실제 삶에서 내 몸이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한 상태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다윗, 다윗, 다윗 노래를 부르면서 골리앗과의 대결 장면만 보고 해석하고 이해합니다. 한 번이라도 이 땅에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몸의 연합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에서 다윗에게 초점을 맞출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먹는 안식의 상태에서 이 땅에서는 지정의 작용이 돌아가는 내 몸과 하나님의 주권이 연합을 합니다. 그 연합의 상태에서 다윗의 존재값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 상태에서 다윗의 존재값을 알려면 골리앗과의 대결 장면에서 하나님에 대한 부분을 빼면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 상태에서 하나님을 뺐을 때의 다윗의 존재값이란 본문에 나오는 모습대로입니다. 미친 척함으로써 아기스 왕이 죽일 필요조차 없겠다고 느낀 것입니다. 아기스 왕은 다윗을 살려두나 죽이나 아무 차이가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모습이었고 다윗은 바로 그 모습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존재값이란 원수가 죽일 필요조차 없다고 느낄 정도의 비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비중 제로의 존재값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되어 있을 때 17장 45절에서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한 다윗에게 골리앗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하나님을 훌륭하게 믿고 하나님과 관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 속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원수가 파리를 죽일지언정 다윗을 죽일 필요가 없다고 느낄 정도로 아무런 비중이 없는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먹어야 합니다. 그럴 때 땅에는 내 몸이 남습니다. 내 몸은 오감과 연동하여 지정의가 움직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내 몸과 하나님의 주권이 연합한 상태에서 나의 위치와 존재값이 본래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내 존재값은 다윗처럼 용도 제로, 능력 제로, 역할 제로, 원수가 죽일 필요조차 없는 값어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내 몸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게 조금이라도 자존감이나 자존심이 있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다윗이 미친 척을 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림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친 척을 한 다윗의 마음 상태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내가 골리앗을 물리치던 현장을 기억하면서 나를 굉장히 담대하고 용기 있고 싸움에 능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당신들 나라에 큰 위협이 될 줄로 안다. 그러나 아니다. 골리앗을 물리칠 때 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하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본래 나의 존재값이란 제로였다. 이제 그것을 알려줄 테니 잘 보아라.’라는 심정으로 미친 척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미친 척은 아기스 왕과 신하들에게 ‘나는 죽일 필요조차도 없는 존재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골리앗과의 대결 장면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다. 나는 본래 죽일 필요조차 없는 존재다.’라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선택한 몸의 언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억울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본래 그렇게 잘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죽여서 득을 볼만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을 무찌를 때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 상태를 들여다보면, 다윗의 존재값은 제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다윗에게서 나타난 일들만을 보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을 죽여야 나라가 편안할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미친 척을 한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죽일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당신들이 알고 있던 나 다윗의 본래 존재값이다. 만약 당신들이 겉으로 드러난 골리앗을 무찌른 모습만을 보고 나를 죽인다면 무고한 피를 흘리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한 상태에서 용도 제로, 능력 제로, 역할 제로였다. 그렇기에 나를 죽인다면 내가 하지 않은 일로 오해를 받아 죽는 것이다. 나는 당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전혀 죽일 필요조차 없는 존재다. 나를 죽이느니 차라리 파리를 죽여라. 그것이 당신들에게 더 이득이 될 것이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미친 척을 한 이유입니다.
다윗의 미친 척은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미친 척은 몸으로 표현된 언어였습니다. ‘당신들이 애써서 죽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의 존재값은 제로다.’라는 것을 가장 빠른 시간에 설득하기 위하여 선택한 몸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아기스 왕과 신하들은 다윗의 미친 척에 설득되어서 ‘이 자는 죽일 필요도 없다. 그냥 내보내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소년 시절부터 자기의 존재값을 제로로 가지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일까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다윗이 한 말을 다시 한번 봅니다. 17장 45절을 보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만군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체바오트(צבאות)는 단순히 사람의 군대를 뜻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체바오트는 하늘의 일월성신과 만물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분이시고, 만물은 스스로 있는 분에 의해 있게 된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 있게 된 모든 것들의 주권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주권자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으로서 당신이 있게 하신 우리의 머리털 하나, 참새 한 마리로부터 시작하여 나라와 민족과 별들까지 전부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있게 하신 대상들 하나하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면서,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주권자의 의미입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있게 하신 것들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면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키던 양은 참새 한 마리와 비견될 수 있습니다. 그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하나님이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있게 하시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실감한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나 한 사람이나 어떤 대상을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대상을 하나님이 있게 하셨고, 지금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시고,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다윗은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향하여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실감하는 의식 작용이 반복되면서, 이 세상에서 자기처럼 불필요한 존재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몸으로 만나는 모든 대상에 대하여 나는 생각하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하고, 계획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손을 대면서 이루려는 시도조차 못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있게 되었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다스리시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따로 손을 대야 할 대상은 없습니다. 자식을 앞에 놓고, 배우자를 앞에 놓고, 다윗처럼 양을 앞에 놓고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세상 안에서는 내 몸이 아직 살아 있지만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몸으로 만나는 모든 대상은 하나님이 있게 하셨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의 자아의식은 바뀌어 갑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있지? 나는 이 세상에 아무 필요가 없다. 내가 없다 한들 하나님의 주권은 멈추지 않는다. 이제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로부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전폭적으로 다 쏟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한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나는 필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살려두십니다. 그러한 내가 세상에서 아무짝에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어떤 대상을 만나든지 이 땅에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내 몸이 연합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의 주체성은 온통 하늘로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일에 다 쏟습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 존재값이 제로인 나의 몸은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합니다. 눈앞에 어떤 골리앗이 나타나더라도 그 골리앗을 향해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계획이 그대로 발사되어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늘 의식하면서 생활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보좌 우편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내가 진정으로 예수님과 연합하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증거는 자아의식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지금 없어진다고 해도 세상이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없어진다고 해도 세상에 안 이루어질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보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못 보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자존심과 자존감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자존심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의 값을 올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면, 자존감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나를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내가 판단하고, 생각하고, 시도하고, 계획하고, 추진하고, 이루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실감합니다. ‘도대체 내가 뭘 해야 하지?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있게 하심, 보고 계심, 알고 계심, 다스리심 이외에는 내가 마주하는 대상에게 필요한 것이 없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 보태야 할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자녀를 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녀를 있게 하셨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전지전능하심으로 다스리시는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더 보태야 할 것은 없습니다. 배우자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아무 소용이 없는 자임을 실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몸에 대해서조차 마찬가지입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뛰어넘어서 무엇을 보탤 수가 없습니다.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평소에 조금이라도 자존심과 자존감과 삶에 대한 주체성을 가지고, 삶을 바라보고 계획하고 추진하였다면 미친 척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대신 아기스 왕 앞에서 변명을 하거나 변호를 했을 것입니다. 혹은 아기스 왕이 혹할 수 있는 거래를 제안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동시에 ‘저 자는 완전히 미쳤다.’라고 느낄 정도로 미친 척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미친 척은 평소에 다윗이 자기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런 역할도, 기능도, 능력도, 용도 제로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다윗은 용도 제로인 자기 존재값을 어떻게 해야 가장 빨리 설득할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애써서 죽일 필요도 없는 자’라는 것을 생각해서 선택한 일이 미친 척이라고 하는 제스처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평소에 자기의 존재값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골리앗과의 대결을 보면서 다윗, 다윗, 다윗을 찾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을 죽일 때 다윗의 실제 존재값은 역할, 기능, 능력, 모든 면에서 우리와 비교해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골리앗과 같은 문제를 대할 때 스스로를 다윗과 비교하면서 ‘나에게는 다윗 같은 훌륭한 믿음이 없다. 다윗 같은 담대함과 용기가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다윗보다 자신을 백 배, 천 배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다윗은 아마 예수님 다음으로 자기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낮게 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낮은 자로 보았기에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이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본문을 보는 관점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연합을 해본 사람은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상황에 대해 ‘다윗의 믿음이 좋았다! 얼마나 믿음이 좋았으면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역사하셨을까!’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파리보다 못한 자로 여겼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윗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로 불필요하고 무용한 존재로 봤는가를 본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 오늘도 우리 마음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아버지를 향해 하늘로 달려갑니다. 그래도 괜찮은 것은 아버지의 주권이 물 샐 틈 없이 땅에 내려오기 때문임을 믿고 고백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주권과 지정의 몸이 온전히 결합하는 다윗의 낮음을 주님 안에서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