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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외모도, 직업도, 자라온 환경도, 현재 처한 삶의 조건도 각기 다르다. 공통분모는 하나다. 성남시에 거주 중인 올해 만 24살을 맞은 청년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만으로 이들은 성남시에서 수십만원어치 지역상품권을 받았다.
성남시는 올해부터 ‘청년배당’ 정책을 시작했다. 성남시에 3년 이상 거주한 만 24살 청년들에게 1년에 네 차례로 나눠서 50만원 상당의 지역화폐(성남사랑상품권)를 지급한다. 누구나, 조건 없이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기본소득이라 할 수 있다. 만 24살이라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본인의 소득이나 부모의 자산 등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원해준다. 지원받은 돈(상품권)을 어디에 쓸지도 묻지 않는다. 다만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현금 대신 지역화폐를 지급한다.
<한겨레21>은 제1129호에서 예고한 대로 다음카카오 스토리펀딩을 통해 ‘기본소득 월 135만원 받으실래요?’ 프로젝트(storyfunding.daum.net/project/9578)를 진행 중이다. 시민들이 힘을 모아 한국 사회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기본소득을 실험해보자는 제안이다.
취업, 결혼, 꿈 포기하는 청년들
펀딩 금액 1천만원이 모이면, 지원 대상자 1명에게 6개월간 월 135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한다. 지원 대상자는 펀딩 후원자 가운데 무작위로 추첨할 계획이다. 다만 회차별로 추첨 대상군은 제한한다. 1차 지급 대상자는 ‘청년’ 중에서 뽑는다.
왜 하필 청년인가? 이 시대 청년들은 한국 사회에 내재된 온갖 불평등과 불합리, 모순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세대다. 취업도 어렵고, 운 좋게 직장에 들어간다 해도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를 만난다.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자연스레 포기한다. 앞으로는 나아질까? 현재보다 미래가 더 절망스럽다. 희망을 품지도, 꿈을 꾸지도 못하는 탓이다. 성남시의 청년배당, 서울시의 청년수당(청년활동지원비) 등 청년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지원정책이 계속 나오는 까닭이다. 지금 누구보다 꿈을 꿀 수 있는 ‘멍석’을 깔아줘야 할 집단은 청년층이다.
<한겨레21>의 기본소득 프로젝트에선 기본소득을 받을 청년의 나이를 만 18~34살로 정했다. 최근 국회에서 발의되는 여러 청년기본법과 청년고용촉진특별법, 고용노동부의 청년구직수당 등에서 규정한 ‘청년’ 기준을 참고했다. 나이 이외에 직업, 성별, 소득, 지역 등은 따지지 않는다.
1차 지급 이후로는 문화예술인·농민·가정주부(여성)·장애인·노인 등 소외계층을 우선 추첨 대상으로 정해, 차례로 해당 집단 안에서 무작위 추첨을 진행할 계획이다.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지급한다는 기본소득의 원칙에는 다소 어긋나지만, 모든 계층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실제 한국 사회에 기본소득을 ‘어떤 방식으로 도입할 것인가’라는 경로의 문제를 두고, 아동·청년·노인 등에 부분적 기본소득을 우선 도입한 뒤 모든 국민으로 확대하자는 입장도 있다.
성남시의 만 24살 청년들은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을 처음으로 맛본 집단이다. 청년배당은 한국 사회에서 이제 막 움트는 기본소득 논쟁의 ‘작은 싹’이다. 청년배당을 받은 청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본소득 도입이 한국 사회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미리 가늠해봤다. 이들의 이야기는 인터뷰를 바탕으로 기자가 지원서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기본소득 스토리펀딩 프로젝트 지원서
2) 나이 만 24살
3) 성별 남성
4) 직업 중소기업 회사원
5) 거주 지역 경기도 성남
6) 내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방황이 길었다. 그것도 아주 ‘세게’ 방황했다. 이러저런 사고를 많이 쳐서 부모님 속도 어지간히 썩였다. 스무 살 이후로는 ‘이러다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살았던 것 같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어릴 때부터 화가를 꿈꿨다. 자라면서 자동차 디자이너, 게임그래픽 디자이너, 캘리그래피 디자이너 등 구체적인 희망 직업이 달라지긴 했지만 ‘환쟁이’란 꿈은 바뀐 적이 없다. 고운 햇살이 환하게 비쳐드는 집에 앉아 그림 그리는 내 모습을 가끔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맏아들의 꿈을 밀어줬다. 돈이 없어 여동생이 학원을 못 다닐 때도, 내 학원비는 밀린 적이 없다.
여동생이 집에서 차별받았다면, 나는 학원에서 차별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꼈다. 내가 20년째 살고 있는 곳은 성남시 구시가지다. 이른바 분당·판교 같은 신시가지가 아니다. “어디 살아요?” “성남이오.” “아, 분당?” “아니요, 분당 말고 성남이오.” 같은 성남시 안에 있지만, 성남 구시가지와 분당은 전혀 다른 동네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분당에 있는 미술학원을 다녔을 때의 일이다. “성남 애구나. 거긴 안 쳐줘.” 같이 학원 다니는 처지인데, 동급생들이 대놓고 무시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처음엔 짜증이었고, 다음에는 혐오가 됐다. 차별, 빈부격차, 불평등과 같은 단어들 말이다. 차별과 무시를 견디며 그래도 3년간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공부를 잘하진 못했지만, 서울에 있는 4년제 미술대학교는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수학능력시험을 보는 날, 인생이 꼬였다. 2009년 11월, 신종플루가 대유행했다. 감기몸살 기운인 줄 알았는데, 시험장에서 열을 재보더니 3명만 따로 격리해놓고 시험을 보라고 했다. 신종플루에 걸렸는데 시험을 잘 봤을 턱이 있나. 그 뒤로 한 달 동안 이불 속에만 누워 있었다.
수능시험은 망쳤어도 실기시험 100%로 신입생을 뽑는 대학교도 있으니 어떻게든 입학할 자신은 있었다. 그런데 한 달 만에 다시 미술학원에 나가보니 그 짧은 기간 사이에 실력 차가 엄청나게 벌어져 있는 거다. 하루 6장씩 그림을 그리는데, 4주 동안이나 못 그렸으니…. 노력했지만 못 따라갔다. 그 뒤 자연스럽게 학원을 그만뒀다. 포기, 아니 실패였다.
미대 입시는 치르지도 못하고 엄마가 등 떠밀어 전문대 정보통신학과에 입학했는데, 한 학기 만에 자퇴했다. 그때만 해도 미술로 대학교에 진학할 꿈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술학원비를 대달라는 부탁을 엄마는 단칼에 거절했다. 미술학원 다닐 돈과 재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첫 알바는 호프집 서빙이었다. 낮에는 학원에서 그림 그리고, 저녁에는 호프집에서 일했는데 한 달 만에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나는 불안한 미래의 가능성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을 선택했다. 이후 ‘주주야야휴휴’ 교대제로 순찰 도는 보안회사 비정규직, 해충 퇴치하는 회사 등 이러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많으면 월 170만원을 벌기도 했지만, 나이 먹어도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늘 불안했다.
그러다 군대를 갔고, 그 뒤로도 꼬인 인생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2013년 제대하고 나서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조차 먹어지지 않았다. 늘 울컥했다. 교통사고를 냈고, 주먹다짐도 오갔다. 합의금을 내기 위해 높은 이자를 감당하며 대부업체에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눈꼬리만큼 대출했던 금액이 매달 이자만 갚다보면 어느새 눈덩이처럼 수백만원대로 불어나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거냐?” 강한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가 눈물을 보였다.
그제야 방황이 끝났다. 지난해 12월 중소기업 수습사원으로 입사했다. 컴퓨터 학원도 다녀야했는데, 수습사원 월급으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침 그때 성남시에서 청년배당을 지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역상품권을 받아, 엄마한테 현금으로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그 돈으로 학원비를 보태고, 공부할 책을 샀다. 월급으로는 그동안의 빚을 갚는 상황이라, 월 4만원 남짓에 불과한 청년배당이 더더욱 단비처럼 느껴졌다.
사실 돈의 액수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청년배당을 받으면서, 나는 돈보다 더 소중한 자신감을 얻었다. 한참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기였다. 그런데 사회가 처음으로 나라는 존재를 돌아봐줬다. 청년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가 차별 없이 나에게 복지를 제공해주는구나, 처음으로 마음에 와닿는 정책을 만났다. 내가 성남 구시가지에 사는지, 분당에 사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성남시에 사는 청년은 다 똑같구나.’ 미술학원에서 느꼈던 차별의 응어리가 이제야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복지라는 게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라는 것도 알았다.
‘기본소득’이라는 단어는 솔직히 처음 들었다. 하지만 청년배당과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조건 없이 지원해주는 정책이라면 지지하고 싶다.
가만히 되돌아본다. 만약 내가 전문대를 자퇴하고 다시 미대 입시를 준비하려 했던 2010년 스무 살의 내게 기본소득이 있었다면, 내 삶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고정 소득이 뒷받침됐다면, 나는 고운 햇살을 받으며 그림 그리기에만 집중할 수 있지 않았을까? 기본소득이 내 인생에 ‘구원의 손길’이 돼줬을 텐데….
다시 가만히 상상해본다. 지금 나에게 월 135만원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미술을 시작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2016년 스물다섯 살의 나는 이미 늦어버린 것만 같다. 긴 방황 끝에 자리잡은 직장을 박차고, 다시 새로운 미래를 처음부터 그리기엔 두렵다. 스무 살 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나는 불안하다. 미래가 불확실한 탓이다. 기본소득을 받게 된다면, 미래를 위해 저축부터 하고 싶다.
그리고 국민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것에도 찬성한다. 재원이 필요하다면, 세금을 더 낼 용의도 있다.
기본소득 스토리펀딩 프로젝트 지원서
1) 이름 김성구
2) 나이 만 24살
3) 성별 남성
4) 직업 방송제작사 조명 프리랜서
5) 거주 지역 경기도 성남
6) 내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내 왼쪽 손목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다. 2011년 오토바이를 타고 퇴근하다가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떨어질 때 팔을 잘못 짚어, 왼쪽 손목이 으스러졌다. 손목에 철심을 박아넣는 수술을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영구장애 판정을 받았다. 허리도 아팠다. 7개월 꼬박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때 몸무게가 40kg 늘었다. 병원 생활은 정말 답답했다.
병실보다 나를 더 답답하게 하는 것은 불안한 미래였다. 1년 가까이 일했던 회사에서는 ‘자발적 퇴사’를 강요받았다. 어차피 출근할 수도 없었지만, 재활치료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왼쪽 손목으로 인터넷강의를 촬영·편집하기엔 무리였다. 왼손으로 촬영 카메라 렌즈를 돌려 ‘줌 인-아웃’도 할 수 없다니! 방송예술 전문 교육기관에서 방송 제작을 배우다가 휴학하고 아르바이트할 때였다. 교통사고는 ‘카메라’ 대신 ‘조명’을 선택한 계기가 됐다.
지금 하는 일은 방송이나 광고를 찍을 때 조명을 쏴주는 스태프다. 같이 일하는 조명감독 밑에는 나 같은 프리랜서 스태프가 네댓 명 있다. “내일 나올래?” 보통 촬영 일정은 하루이틀 전에 결정된다. 최대 18시간까지 서서 일해야 하는 고된 일이지만, 한번 나갈 때 10만원 이상 일당을 받을 수 있고 조명감독도 좋은 분이라 지금 하는 일에는 만족한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여전하다. 수억원짜리 장비를 구입해 운영하는 조명감독이 되어야 하나, 아니면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하나, 고민 중이다.
교통사고 때문에 나는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갔다. 공익근무를 하다가 지난 8월 제대했는데, 공익 월급이 30만원 안팎이다. 금전적으로 가장 어려울 때 청년배당으로 25만원어치 상품권을 받았다. 한마디로 감동받았다. 국가가 청년들을 생각해준다는 마음이 고마웠다.
상품권은 다 생활비로 쓰시라고 부모님께 드렸다. 누군가한테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도와준다’는 느낌을 줄 수만 있다면 내가 청년배당을 받았듯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기본소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국민 5천만 명이 세금 조금씩만 더 내면 가능한 일 아닌가. 지난 대선 때는 투표도 안 했지만, 다음 대선에는 좋은 복지 공약을 내놓는 후보를 찍고 싶다.
지금 나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져서 여윳돈이 생긴다면, 실용음악학원에서 취미로 보컬 수업을 듣고 싶다. 월 30만~40만원 되는 학원비가 비싸서 알아만 보다가 포기했다. 아무리 기본소득을 월 100만원 넘게 준다고 해도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려면 어떻게 ‘게으른 베짱이’가 가능하겠나?
물고기를 나눌 때
기본소득이 일할 의욕을 저하시켜 ‘게으른 베짱이’로 만들거나, 사회 의존성을 심화해 ‘무임승차자’로 살게 하는 것은 아닐까? 기본소득을 비판할 때, 주로 나오는 걱정 가운데 하나다. “지금은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줄 때가 아니라, 물고기를 줘야 할 때”(제임스 퍼거슨 미국 스탠퍼드대학 인류학과 교수)다. 고용 없는 성장 시대에 필요한 답은 물고기를 더 많이 잡는 ‘생산’보다 물고기를 나눠주는 ‘분배’라는 주장이다.
기본소득이 바로 ‘물고기’다. 실제로 ‘물고기’(청년배당)를 먹어본 성남시 청년들은 예전보다 ‘물고기를 나누는 일’(분배와 복지)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한겨레21>이 만난 청년 2명 가운데 1명은 지난 대통령선거 때 투표하지 않았고, 1명은 박근혜 대통령을 뽑았다. 기본적으로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청년들이었다.
그랬던 이들이 청년배당을 말할 때는 적극적이 됐다. 이들의 변화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바로 경험이다. <한겨레21>이 기본소득을 실제 지급해보는 실험을 기획한 이유기도 하다. ‘경험’이 기본소득을 지급받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의식 지형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궁금하다.
일찍 결혼해 가정을 꾸린 청년들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청년배당 또는 기본소득이 더 절실하다. 7살, 6살, 4살 세 아이의 아빠인 성남시 청년 이진영(가명)씨가 그랬다. 그의 이야기는 다음호에 이어진다.
성남=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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