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뒤주
김성문
우리나라 민속박물관에는 농경시대 때 만들어 활용한 나락뒤주가 있다. 1960년대 경산시 지역에서는 벼를 추수하고 남은 볏짚으로 엮어 둘러막고, 이엉으로 지붕을 덮은 뒤주가 대부분 있었다. 민속박물관에서 볏짚으로 만든 나락뒤주를 보는 순간 어린 시절 나락뒤주에 담긴 사연이 떠오른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경산시 지역 벼농사 농가에는 생산한 벼를 자기 집 마당에서 일꾼들이 탈곡했다. 탈곡하는 나락은 마당에 산등처럼 수북하게 쌓인다. 쌓인 나락은 집 마당에 볏짚으로 뒤주를 만들어 저장했다. 쌀이 필요할 때는 나락을 조금씩 들어내어 정미소에 가서 흰쌀로 만든다. 농촌에는 집 마당에 나락뒤주가 1개 또는 농사가 많은 가정은 3개 정도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주로 군것질이나 친구들과의 생활에서 용돈이 필요했다. 그 당시에는 경제 사정이 말이 아니라서 아예 용돈 자체가 없는 시절이었다. 그래서 부모 몰래 용돈을 장만하는 방법은 나락뒤주였다. 나락뒤주는 용돈이 부족한 우리에게 구세주가 됐다.
우리는 용돈 마련을 위해 자기 집에 있는 뒤주의 쌀을 퍼내거나 나락뒤주의 나락을 몰래 빼내어 현금으로 바꾸어 쓰는 경우가 있었다. 판매는 쌀이나 나락 등 곡식을 사러 동네를 돌아다니는 상인이 있었다. 곡식으로 용돈을 마련하지 않으면 주로 학용품값이나 참고서의 값에 웃돈을 조금 부풀려 받아서 용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나는 참고서의 값으로 용돈을 마련할 때는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나락뒤주가 3개나 있는 친구가 자기 집 뒤주에 있는 나락을 빼내어 용돈을 마련하는 데 가담하게 됐다. 나락뒤주는 주로 지름이 약 3m, 높이가 약 1.5m 정도라서 덮어 둔 지붕을 누구나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었다. 훔치기도 아주 쉬웠다.
친구 부모는 외출 중이었다. 친구 셋이서 한 사람은 대문에서 망을 보고, 나는 막대로 나락뒤주 지붕을 들어 올렸다. 친구는 가마니를 벌려 놓고 노란 나락을 퍼 담았다. 담은 나락을 셋이서 들고 친구 집을 나와 옆집에 두었다. 옆집 사람도 우리의 나쁜 행동을 알면서 눈감아 주었다.
며칠 후 나락을 퍼내 용돈을 마련한 우리는 마을에서 약 3km 떨어져 있는 면 소재지에서 공연하는 서커스를 구경하러 갔다. 중학교 시절 서커스를 처음 보는 상황이라 호기심이 하늘을 찔렀다. 몸에 딱 붙는 옷을 입은 소녀가 줄에 매달려 기량을 발휘하는 광경을 보는 순간, 숨이 멎을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서커스 단원들은 뼈가 없는 사람처럼 몸을 마음대로 구부리고 비꼬는 모습이 신기했다.
친구의 덕택으로 서커스 관람은 잘했다. 그렇지만 친구 집의 나락이 없어진 것을 나중에라도 친구 부모가 알면 꾸중 들을 일이 계속 머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튿날 친구 셋이서 의논했다. 한 친구는 부모에게 말하자는 의견이었다. 나락을 훔친 친구는 그대로 있자는 의견이다. 나도 가만히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나락을 훔친 죄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열흘이 지났다. 셋이서 친구 아버지께 찾아가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고백하고 용서받기로 했다. 친구 아버지 앞에 셋이 꿇어앉아 용기를 내어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뭐! 나락을 퍼냈다고, 이놈들이! ”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나쁜 짓을 안 하겠습니다.”
꿇어앉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노발대발하시던 친구 아버지는 노여움이 조금 가라앉았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계속 꿇어앉아 있었다.
“앞으로는 나쁜 행동을 하지 말아라.”
큰절을 하고 일어섰다. 나는 이 사실을 아버지께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가슴 조이며 이야기했다.
“네가 도둑질을 했다고?”
“친구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용서받았습니다. 앞으로는 조심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마음이 언짢으셨는지 말씀이 없으셨다.
한 달 후에 소재지의 서커스 공연 장소에 가설극장을 만들어 영화를 상영하는 일이 있었다. 영화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너무나 관람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그동안 조금 모아둔 용돈으로 친구 셋이서 영화를 관람하러 갔다. 가설극장 출입구에 도착하니 체육 선생님이 그 옆에서 학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였다.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극장 입장은 못 하고 체육 선생님 눈을 피해 저 멀리서 한참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체육 선생님은 가고, 출입구는 문이 닫혔다. 집으로 오려는 순간 가설극장 울타리 밑으로 누군가가 무료입장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순간 우리도 빨리 울타리 밑으로 기어서 들어가니 바로 상영장이었다. 관람객들은 영화 상영에 혼이 빼앗겼는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가설극장 상영을 마치는데 공짜로 구경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친구들과 집으로 오면서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봤다. 어두운 밤길을 친구와 같이 조그마한 산을 넘는 무서운 길을 서로가 생각에 잠겨서 말없이 왔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숨죽이고 방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라는 엄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 다.
“친구와 함께 면 소재지 가설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왔습니 다.”
엄마는 주무시지 않고 기다렸다. 내가 자식을 키워 보니까, 부모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날 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자식을 얼마나 걱정하며 기다렸을까?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의 사랑을 안다.’라는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
내가 자라는 시기에는 우리나라 경제가 열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모가 용돈을 마구 주는 환경은 아니었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경험했던 사실들이 모여 내 인생을 만들고 있다.
나락뒤주에서 나락을 훔쳐 용돈을 만든 추억을 뒤로 하고 민속박물관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