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영화는 내가 상처 입지 않으면서 타인의 아픔을 경험하게 해주니 좋다.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된다. 그들의 슬픔에 비하면 내 눈물은 얼마나 싱거운가. 그들의 아픔에 비하면 내 쓰라림은 얼마나 가소로운가. 내게 닥친 고통을 견뎌낼 만한 면역력을 키워주면서, 정말 슬픈 영화는 그렇게 기묘한 치유의 ‘약발’을 발휘한다. 오랜만에 약발 센 슬픈 영화를 제대로 만났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더 리더>)다.
열다섯 살 소년 마이클(데이비드 크로스)이 서른여섯 살 여자 한나(케이트 윈슬릿)를 만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만날 때마다 여자는 책을 읽어달라 졸랐고, 소년은 품을 내어달라 졸랐다. 다시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뜨겁게 사랑했지만 여자는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그로부터 8년 뒤, 열다섯 살 때만큼 누구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법대생 마이클이 재판을 참관하다가 피고인석에 앉은 한나를 발견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했다는 게 죄목. 나치 문서를 해독할 줄 모르는 ‘문맹’임을 밝히면 처벌 수위를 낮출 수 있으련만, 그녀는 ‘무지한 여자’라는 오명을 쓰는 대신 ‘잔인한 여자’라는 누명을 쓰기로 결심한다.
자, 마이클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가 감추고 싶은 비밀을 대신 밝혀 누명을 벗길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침묵해 그녀의 비밀을 지켜줄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간 과거를 먼저 용서한 다음 얘기다. 이 남자는, 8년 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남긴 채 떠나버린 이 여자를 용서하는 것부터 쉽지 않으니까.
<더 리더>는 베스트셀러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가 원작이다.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자신의 고등학교 선생님을 기억하며 책을 썼다고 고백했다. 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스탕달· 디킨스를 영어로 읽게 한 멋진 선생님이 알고 보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비밀경찰 ‘게슈타포’와 관련된 인물이었다는 사실. 어린 나이에 받은 마음의 상처가, 다 큰 어른이 되어 집필에 영감을 주었다.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나치 전범이라는 걸 알았을 때, 당신이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독일 국민에게 이 소설이 던진 질문은 대단히 현실적인 딜레마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등에 업혀 역사라는 거센 물살을 건너가는 원작의 힘겨운 발걸음은, 집채만 한 애증을 짊어진 채 평생을 휘청거리는 한 남자의 안쓰러운 발걸음으로, 그러니까 좀더 ‘멜로스럽게’ 각색되었다. 그게 ‘나치 전범에게 면죄부를 준다’고 욕먹는 이유가 됐지만, ‘심금을 울리는 사랑 이야기’로 갈채받으며 상을 받은 근거이기도 했다.
좋은 배우와 좋은 감독의 행복한 만남
이 영화는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과연 케이트 윈슬릿이 보여준 연기는 밤새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다시 침이 고이길 기다렸다가 다음 날 아침부터 반나절을 꼬박 더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각색상·촬영상 후보에도 올랐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빌리 엘리어트>(2000)를 선물하고, <디 아워스>(2002)를 질문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 원작의 논쟁적 주제를 끝까지 놓치지 않으면서 결국 격조와 품격이 있는 사랑 이야기로 완성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책 한 권이 이렇게 많은 감정을 담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오프라 윈프리가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를 소개하며 시청자에게 이렇게 물었단다. 영화도 그렇다. 사랑·동경·배신·애증·용서·연민·동정·후회…. 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영화. 좋은 배우가 좋은 감독과 만난다고 늘 이렇게 멋진 영화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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