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속적 고통(Vicarious suffering)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것은 “죽음을 통하여 사망의 세력 잡은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사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사람을 놓아주려 함이었다”(히2:14,15). 주님은 죄를 단순히 허용하시지는 않았다. 주님은 죄와 싸우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가 결정적으로 사탄을 물리치신 것은 가장 깊은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희생을 시사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셨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 받은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 만에 살아나셨다”(눅9:22, 17:25 24:26; 마16:21; 막8:31). 악과의 싸움으로 인하여 고통이 필요하게 되었다. 더구나 메시야적 예언은 그것을 요구했다. 부활하신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하리라”(눅24:46)하고 설명하셨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을 미리 말씀하셨다고 언명했다. 베드로의 말을 청취한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부지중에 그 예언 성취의 한 원인이 되었다(행3:18). 선지자들 스스로가 그 시기와 그들이 기록한 고난을 당하는 자(메시야)에 대하여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벧전1:11). 베드로는 나타날 영광에 대한 증인으로서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서 기록을 계속하고 있다(벧전5:1).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유대인의 성경에 의거하여 설명하고 증명했다(행17:3, 26:23).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뇌의 대속적 성격을 강조했으며(히2:9),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이 신약에서는 자주 언급되고 있다. 더우기 구원의 선구자로서 예수는 고난을 통하여 완전케 되셨다(히2:10). 그는 시험을 받았으므로 시험받는 자를 도우실 수 있었다(히2:18). 그는 거듭해서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단번에 그렇게 하셨다(히9:26). 희생 제물이 진영 밖에서 불태워진 것같이 예수께서는 “그 자신의 피로서 사람들을 거룩케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히13:12). 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한분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사람들은 영원한 고뇌에서 구원을 받는다. 고통에 대한 스토익(Stoic)주의자들의 어떠한 부인도 우리들의 죄성(罪性)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분개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들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속박되어 있는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우리는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한다.
4. 증거적 고통(Testimonial suffering)
그러나 내적 고뇌는 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에 성실하게 헌신하겠다는 정신적인 자세에서 기인한다. 비록 신자들은 새로운 성품을 받지만 그들의 옛 성품은 근절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육체를 섬기려는 유혹과 싸워야 한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기쁨을 위하는 것만은 아니다.
죄렌 키에르케고르(Sὅren Kierkegaard)가 주장한 바와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지 미적(美的) 실존만이 아니다. 단순한 윤리적 실존은 기독교적 실존이 아니다. 진실한 신앙생활이란 끊임없는 회개와 지속적인 헌신의 생활이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이상에 도달하려고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서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자기 자신을 던져 버린다. 따라서, 에드워드 죤 카넬( Edward John Carnell)이 “죄렌 키에르케고르의 짐”(The burden of Sὅren Kierkegaard)에서 설명한 바와같이 내적 고통이란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든 축복에 이르는 관문이다. 삶의 진정한 만족은 고통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지 방종이나 쾌락에 있지 않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고통은 죄에 대한 심판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헌신을 증거한다.
악한 세상에서 의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역시 외부에서 오는 고통을 기대해야 한다. 구세주를 위한 봉사는 이 세상의 권력에 대한 열망과는 반대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위하여”(빌1:29), “의를 위하여”(벧전3:14),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살후1:5), “복음을 위하여”(딤후2:9), “사단에 저항하기 위하여”(벧전5:9), “그리스도인으로서”(벧전4:16), “그 이름을 위하여”(행5:41) 고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박해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거나 함께 짐을 지는 것을 가리킨다(고후1:5, 벧전4:13).
욥은 격렬한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그의 성실한 믿음을 증거했다. 사단은 욥의 신앙은 일시적으로 받은 은혜에 달려 있었다고 참소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으로 하여금 욥이 소유한 모든 것과(욥1:9-12) 건강까지도(2:4-6) 빼앗으므로써 욥의 충성을 시험하게 하셨다. 욥의 경우에 있어서 재앙은 어떤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었다. 그의 “위로자들”에게는 욥이 틀림없이 위선자이며 거짓말쟁이 같이 보였는지 모르나 그의 곤경은 형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거로서 그의 성실성의 한 시험이었다. 예수의 제자들 역시 모든 병은 어떤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들은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바라보고 나서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의 죄로 인하여 그렇습니까? 그의 부모로 인하여 그렇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는 그들의 질문에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2,3)하고 대답하셨다. 나면서 소경된 자의 고통스런 생활을 끝내게 한 그 사람의 병 고침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중요한 증인이 되게 했다.
우리가 위선이 없이 주님을 신뢰한다는 증거로서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나타낼 적절한 응답은 무었일가? 고난을 참으신 그리스도의 모본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그의 자취를 따라가야 할 것이다(벧전2:21). 우리는 “조롱거리가 되고 채찍에 맞으며 쇠고랑에 채이며 감옥에서 고통을 겪은 신앙의 주인공들을” 결코 잊어서는 않된다. 그들은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히11:36-38). 모세처럼 우리는 애굽의 보화보다 더 위대한 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통을 더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다(히11:26).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필요한 고통을 끝내게 될 것이며(골1:24), 그것이 장차 올 영광을 보장해주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벧전4:13). 현재 잠시 받는 고통은 영원한 영광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도 경미한 것이다(롬8:18; 고후4:17).
[출처= 「성서대백과사전」 제1권 pp.350~355 기독지혜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