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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주>
이 설교는 참빛교회에서 설교자(오광만 목사)가 행한 빌립보서 시리즈 설교 중 하나인데, 이 설교만 나중에 [Knowing the Times], vol. 20(2023년 2월): 58-92에 실렸습니다.
설교가 무척 깁니다. (원래 설교는 귀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만 설교자의 말투 감정을 상상하시면서) 찬찬히 음미하며 읽으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3:1-6
“주 안에서” 기뻐하라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흔히들 빌립보서를 기쁨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기뻐하라”는 어구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빌립보서가 기쁨 주제를 담은 책인 것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이렇게 이해하면 마치 바울이 어느 상황에도 기뻐하고 웃으라는 의미로 교회에 교훈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언젠가 인천의 어느 교회에서 설교할 때였습니다. 예배당 뒤쪽에 계신 한 부인이 설교 도중에 자주 웃고 설교 중에 격하게 반응하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예배 후에 그분이 바로 담임목사님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모님은 제게 자신을 “웃음 치료사” 또는 “웃음 전도사”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주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가급적이면 크개) 웃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연방 소리 내어 웃으시고, 심지어 박수까지 쳐가며 하하하 웃으셨습니다. 이렇게 웃다 보면, 힘든 일도, 어려운 일도 기쁜 일로 바뀐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교훈도 이런 식의 웃음 기쁨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빌립보서에 자주 등장하는 “기뻐하라”는 표현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바울이 말하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설마 바울이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늘 웃으라고 말했겠습니까? 웃음의 문으로 온갖 복이 들어온다는 한자 성어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처럼, 웃음이 만복의 근원이라는 의미로 이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에서 “기뻐하라”가 사용된 예
사실 바울이 기쁨을 언급한 것은 역설적인 상황에서였습니다. 빌립보서 1:18에서 바울은 고민이 되는 상황에서 기뻐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는 옥에 있는 바울을 괴롭게 할 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반인들 같으면 속이 쓰릴 만할 행위인) 불손한 의도로 한 경쟁자들의 행동에 바울은 전혀 개의치 않고, 복음이 일단 널리 전파되기만 한다면 그들의 행위를 자신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가 옥에 있음으로써 실행하지 못하는 복음 전파가 그들로 인해 실행되고 있다면, 그로서는 어떻게든지 복음이 널리 전파고 있다는 결과만 생각하고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2:17-18에는 이보다 더 악한 상황에서 바울이 기뻐한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고생하고 고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은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될 지경에 놓였습니다. 그는 설령 그러한 상황에서라도 그의 섬김과 수고로 빌립보 교회가 어그러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서 세상에 빛을 비출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무사히 그리스도의 날에 바울의 자랑이 될 수 있게 성장한다면, 자신도 기뻐하고 교회와 함께 기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난 중에서,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 있으면서, 그가 빌립보 교회에게 권면한 것이 이루어진다면 기뻐하겠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처한 상황은 매우 심각합니다. 바울은 지금 전제와 같이 부어진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목숨을 제사 때 제물에 부어져 병에 포도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비유한 벗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자신은 기뻐할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고, 빌립보 교회도 그 기쁨에 동참하라고 권합니다.
기쁨과 관련한 빌립보서의 유명한 본문인 빌립보서 4:4에서 바울은 서로 경쟁하는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같은 생각을 하라고 권한 후에, 3:1과 같이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합니다. 여기서는 “항상”이라는 말을 추가하여 “주 안에서 기뻐함”이 늘 있기를 강조합니다.
이 세 본문 사이에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빌립보서 3:1이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4의 내용을 권면하기에 앞서, 그리고 빌립보서의 두 번째 단락인 3:1-3을 시작하면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 등장하는 “기뻐하라”는 교훈에는 앞의 두 본문(빌 1:18; 2:17-18)에서 기쁨을 권한 것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 기쁨의 대상(또는 환경)을 “주 안에서”라고 추가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3:1에서 강조점은 “기뻐하라”가 아니라 “주 안에서”에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는 “주 안에서”가 아닌 다른 상황과 대조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바울의 여기서 말하는 본뜻을 잘 알려면 본문에서 바울이 다루는 문제와 그 문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다루는 문제(쟁점)
바울은 지금까지 빌립보 교회의 내부 문제에 집중하여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교훈을 베풀었습니다. 이제 문제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바꿔 새로운 쟁점으로 관심을 옮깁니다.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협하는 대적자들이 주장하는 바를 소개하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그간 바울이 교회에 전했던 복음과 얼마나 다른지를 밝힙니다. 제가 “대적자들”이라고 표현한 그 사람들은 유대인 출신으로서 교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나 바울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빌립보의 첫 신자들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유대인 신분이나, 율법을 잘 지키며 사는 것이 참 하나님의 백성 됨의 표라고 주장했습니다. 순진한 빌립보 교인들은 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바울은 그들이 교회 안에서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장에서 유대인 출신의 신자들이 하나님의 참 백성 됨의 표징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행해야 할 종교행위들을 복음과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신약교회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빌립보 교회에게 참된 교인의 자격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야겠다고 판단합니다.
본문(빌 3:1-6)에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이 우리말 성경에 너무 간략히 언급되었고, 거기에 사용되는 용어도 낯설기에 이 본문을 슬썩 읽어서는 바울이 말하려는 의미를 제대로 간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몇몇 학자들의 도움과 다른 번역 성경을 이용하여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을 조금 설명하면서 다시 번역해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1절) 자 그러니(Well then 또는 And so),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하지만 제게는 당신들에게 꼭 상기시키고 싶은 문제가 있습니다.] 당신들에게 같은 내용을 다시 쓰는 것이 제게는 전혀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에게 안전장치입니다.
(2절) [그러니 제게는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신경 쓰일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영적으로 순결하다고 주장하지만 부정한] 개들을 경계하며 살펴보셔야 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선한 것이 아니라 ]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종교적인 행위들]은 신체 절단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몸에 할례를 행하라는 그들의 주장은 말하자면 일종의 변태적인 행위이고 복음에 역행하는 행위입니다.]
(3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마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예배하는 우리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참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참 백성인]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며, 육체를 전혀 신뢰하지 않습니다.
(4절)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게는 [저 사람들이 제시하는 대로 말하자면] 육체를 신뢰할 이유와 근거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다른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육체를 신뢰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제게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5절) 저는 태어난 지 팔 일만에 [엄격한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고,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이며,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저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저는 전에 율법 해석과 관련해서 바리새인이었으며,
(6절) 교회를 박해하는 것으로써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제 열심을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유대인들의 법에서 제시한 의와 관련하여 [저는 매우 사려 깊은 사람이라서] 흠 하나 찾을 수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주를 기뻐하라”는 뜻이다.
이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본문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강설의 제목에 나와 있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내용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말 번역 성경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어구의 표현상 “주 안에서 기뻐하라”(rejoice in the Lord)가 “육체 안에서 자랑하다”(boast in the flesh)와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다시 “육체를 신뢰하다”(trust in the flesh)와도 대조를 이룹니다. 원어상 이 어구는 대칭되는 어구(동사 + in the 명사를 사용하기에 영어 표현이 그나마 그리스어의 해당 어구를 제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의도적으로, 자랑하다, 기뻐하다, 신뢰하다는 동사를 사용하고, 반대로 “주 안에서”를 “육체 안에서”와 대조하면서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자랑하며, 무엇을 신뢰하는지를 대조하면서 교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언어적 구성을 고려한다면, “육체 안에서 자랑한다”는 말을 “육체를 자랑한다”고 바꿔 쓰면 이해하기가 훨씬 쉽듯이,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은 “주를 기뻐하라”고 바꿔 쓸 수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어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냥 막연히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 즉 “주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를 기뻐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울은 왜 이 말을 사용할까요?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이 말을 하는 것이니, 우리는 그 대답을 우선적으로 그리고 반드시 빌립보서에서 찾아야 합니다. 바로 3장 앞, 즉 빌립보서 2장에서 주님에 대해 소개한 바로 그 본문(빌 2:5-11)이 바울의 이 권면(“주를 기뻐하라”)을 이해할 수 있는 첫 번째 문맥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라고 부른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고, 종이 되어 십자가에 죽기에 이를 정도로 하나님께 복종한 것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똑같으신 분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신분인 종의 태도를 취한 것과 가창 치욕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택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신 것이 그분이 “주(主)”가 되시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자신을 낮췄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즉 황제에게나 붙일 수 있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주”(퀴리오스)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빌 2:9, 11).
이 교훈은 빌립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실제적인 문제를 교정하는 교훈을 베푸는 맥락에서 나왔습니다(빌 2:1-4). 그들 사이에 있는 다툼과 경쟁, 그리고 시기심으로 남보다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려는 문맥에서 진정 높아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교훈하는 맥락에서입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이 그리스도가 자신을 낮춘 것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주”가 되게 하셨다고 설명했을 때, 빌립보 교회는 그들 사이에 쟁점으로 다투고 있는 우월함, 높아짐이 복종(인간이 되시고 종이 되신 예수님)과 낮아짐(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매우 밀접히 연관되었다는 것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바울에게서 받은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기뻐하라”는 말은 다른 어떤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 “주님”이 되신 그분만을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기쁨은 오직 그 주님하고만 관련이 있는 기쁨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로 인식되고, 그 예수가 세상에 가져온 변화와 영향력의 가치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 그분을 자랑하고 기뻐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비천한 사람, 루저(loser) 같은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고, 가장 치욕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으로만 인정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라고 권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권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어떤 근거에서 주를 기뻐하라고 권할까요?
주를 기뻐해야 하는 이유와 근거
바울이 “주를 기뻐하라”고 권하면서 이와 대조하기 위해 택한 말은 “육체”입니다. 여기서 “육체”는 아무 생각 없이 이 단어의 뜻을 생각하는 우리 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의 편지 여러 곳에서 사용한 “육체”나 “육신”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주”이신 것을 모르거나, 그렇게 고백하기를 거절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과 그들이 하는 종교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교회에 위협을 가하는 상대방을 생각하면서 “육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육신은 로마서 8장에서 “성령”과 대조하기 위해 사용한 “육신”이라는 단어(롬 8:3-8)와 갈라디아서 3장에서 “믿음”과 대조하기 위해 사용한 “육체”라는 단어(갈 3:2-3, 23-25; 5:16-24)와 같은 뜻을 지닌, 구속사의 옛 시대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 언급된 “육체”도 예외가 아닙니다. 특히 3-4절에는 “육체를 신뢰하다”라는 어구가 세 번 등장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혼란을 야기하는 대적자들이 육체를 신뢰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그들이 내세우는 “육체를 자랑하고 신뢰하는 것”과 대조하기 위해 “주를 기뻐하라”고 먼저 운을 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우치려고 자신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까지 “육체”를 신뢰한다면, 사실 바울에게도 (그들 못지않게,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맞받아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대응은 그들이 신뢰하고 있는 육체가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밝히려는 바울의 작전에 속합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주를 기뻐하라”와 대조하는 “육체를 자랑하다”와 “육체를 신뢰하다”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면, 또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누구이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자랑하고 신뢰하는지 알려면 4-6절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알면, 아마도 본문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고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고 신뢰하는 “육체”의 구체적인 내용들
바울은 그 육체가 바로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유대인으로서의 신분과 관련이 있고, 그 후 유대교에 충실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종교적 열심과 율법 지키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바울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과거의 신분과 종교적 열심히 설명하는 육체에 속한 내용들은 전체 일곱 가지인데, 앞의 4개는 그가 출생을 통해 얻은 특권에 속하는 것들이고, 뒤의 3개는 그가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추구하던 탁월한 종교적 업적들입니다.
첫째, 바울은 자신이 태어난 지 팔 일만에 [엄격한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다고 운을 뗍니다. 이 말로써 바울은 이교도에서 행하던 부당한 방식으로 할례를 받았거나 이방인으로 있다가 중간에 유대교로 개종하여 할례를 받은 사람과 자신을 구별합니다. 자신이 지금 유대인 됨을 주장하는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은 모태 신앙인이고 3대째, 4대째 예수를 믿어온 집안 출신이며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바울은 자신이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당시 이방인 출신에서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과 비해서도 그런 유대인과도 구별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혈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셋째, 바울은 자신이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고 밝힙니다. 이 말은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이라도 그 나라의 비천한 지역이나 부족들, 또는 혼혈인에서 나오는 사람들, 심지어 근본이 없는 잡것들과 달리, 바울은 초대 왕 사울이 속했던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고 가문의 탁월함으로 자신의 출신 배경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경주 김(金) 씨 중에서도 왕족이 되는 진골에 속하는 것을 넘어, 왕이 될 수 있는 성골에 속하는 김 씨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넷째, 바울은 자신이 [한 마디로 말해서]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고 내세웁니다. 이 말은 빌립보 교회에게 유대교의 특권, 유대인으로서 그들이 행하는 종교행위를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나보다 더 유대인인 사람이 있느냐?”라고 공격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대 히브리인의 모델이며, 표본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내용은 유대인 됨, 즉 유대인의 신분과 관련하여 바울의 우월함을 내세우는 내용입니다.
다섯째, 이제 바울은 출생의 특권에 더하여 자신의 종교적인 업적과 자발적으로 추구하던 종교적 우월함을 통해 빌립보 교회 안에서 자신들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사람들을 반박합니다. 앞의 네 가지 요소가 바울의 출생의 생득적 특권을 말하는 것이라면, 뒤의 세 가지는 바울이 의지적으로 노력하여 얻은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들입니다. 그 첫 번째가 “나는 율법 해석에 대해서는 바리새인이었다”는 어구입니다. 이 말은 그가 조상들의 전통에 충실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만 이 말에는 이보다 더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는 말은 바울이 단지 율법의 각종 계명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율법 조문들 하나하나가 무슨 뜻인지를 알며, 생활의 여러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해석할 수 있는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내용을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이라면 이상적으로 추구했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최대한 율법을 삶의 모든 부분에서 실제로 지키고 실천했다는 말입니다. 율법과 관련한 바울의 입장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바울은 삶의 표준인 율법을 해석하고 지킴에 있어 왕도를 걸은 사람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주일성수, 정확한 십일조를 실현했고, 술 담배 금지를 잘 실천했다는 뜻입니다.
여섯째.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는 것으로 내 열심을 입증했다”고 말합니다. 그가 교회를 박해하는 것으로 율법과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입증했다는 것은 당대 교회에게는 충격이었겠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충분히 수긍할 만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열심과 열정을 하나님의 율법과 율법에서 명기한 제도들의 가치를 폄하하는 교회를 박해하는 것으로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에게 호의를 얻고, 동료들에게 열심이 있는 신자임을 입증하여 유대교에 충실하다는 것을 교회를 박해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행동에 바울이 유대교와 율법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나타납니다. 말이 필요 없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가 스데반을 죽일 때 증인으로 함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 후 다메섹에까지 가서 교회를 박해하려 한 것을 보면 실제로 그가 율법에 진정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바울은 교회에게는 나쁜 사람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유대교의 전통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율법에 충성하는 참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행함으로써 율법대로 사는 삶이 이방인으로 인해 더럽혀지는 것을 철저히 막았고, 하나님과 율법에 헌신하는 백성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제 제자 중에 초등학교에 세워진 단군상을 도끼로 부숴버린 것 때문에 옥살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를 돌면서 같은 일을 여러 차례 수행하다가 어느 날 발각되어 옥살이까지 했습니다. 옥에서 나온 후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한 행동이 십계명 1, 2계명에 충실한 행동,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으로서 한 행동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일곱째. 바울은 “우리 유대인들의 법에서 제시한 의에 대해 [저는 매우 세심해서] 흠 하나 찾을 수 없던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시점에서 이전의 삶에 비춰 자신에게서는 죄 되는 것은 하나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율법에 대한 충성은 율법조문 하나하나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비록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참조. 롬 3:9-18, 20), 자신은 의식적으로 눈에 보이게 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이 모든 것이 누가 보기에도 완벽한 유대교에 충실한 증표라고 판단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자랑거리를 제시한 목적은 분명합니다. 이런 요소들에 근거하여 유대교의 우월함을 주장하면서 빌립보 교인들보다 자신들이 더 탁월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들을 본받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랑하고 신뢰하는 것이라면 바울 자신도 과거에 얼마든지 갖추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자랑하고 신뢰하는 것은 “육체를 자랑하는 것”과 “육체를 신뢰하는 것”인데, 이것이 이제 얼마나 가치가 없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어 대적자들이 제시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자신의 예를 소개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바울과 같은 조건을 가졌다면 더 위세당당하게 자신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조건을 구비하여 하나님의 백성 됨의 신분을 주장하고 이런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이고 경건함이나 충실함의 표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것 자체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려고 합니다. 바울이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율법에서 나오는 의를 얻으려는 것에 대한 가치평가
빌립보서 3장 7-9절에서 바울은 이것이 바로 율법에서 나오는 의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고 대적자들에게 알립니다. 지금 바울은 일반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들으라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유대인 출신의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교인들 중에서도 여전히 육체에 속한 것을 근거로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근거로 이런 요소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당대의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보다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할뿐더러 이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이 신자가 되는 증표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지금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유대교에서 가치 있게 여기는 이런 내용들이 다 “육체”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런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을 육체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가위 유대인들과 유대교 출신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엄청 충격을 받았을 만한 선언입니다.
이에 더하여 바울은 7-8절에서 자신은 이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는 데 있어 해(害)가 될뿐더러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폭탄 선언합니다. 그런데 지금 빌립보 교회 안에서 이런 것을 신뢰하는 사람이 있고, 이런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려 다른 교인들에게도 이것을 보유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은 분노를 폭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전한 복음에 위배되며, 사실 복음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누구나 놀랄 만한 이런 평가를 바울이 내리게 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메시아)이시고,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였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그가 유대교에 있을 때 신뢰하던 것이 이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 인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이런 것들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울이 가치매김 한 핵심 내용입니다. 그리스도를 마주하기 전에 신뢰하고 자랑하던 것이 그분을 마주하고 그분이 그리스도(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해로 여기게 되고 배설물로 여기게 된 보잘 것 없는 것들임이 판명된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그가 빌립보서 3:7-9에서 설명할 “하나님의 의”를 얻는 문제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에 상응하는 내용이냐 그렇지 않으냐와 관련이 있는 심각한 문제라는 말입니다.
육체를 자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의 정체
이런 내용을 내다보면서, 바울은 3장 2-3절에서 이같이 육체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밝힙니다.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째, 육체를 자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개”입니다. 개는 유대교에서 더럽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식탐이 있고 배회하는 동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개는 비록 율법에 명기되지는 않았지만 부정한 동물이기에 개고기는 부정한 음식이기에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먹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파생되어, 이방인들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이방인을 개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헬라인인 수로보니게(페니키아 도시 출신의) 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 들렸다고 예수님께 찾아와 귀신을 쫓아내주시기를 간청할 때,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져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막 7:2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자녀는 이스라엘 사람을, 개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개가 불결한 짐승으로서 제의상 불결한 사람들인 이방인과 실제로 동일시되었고 예수님 당대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대적자들(즉, 유대인 출신의 교인들)이 비록 할례도 받고 율법을 잘 지키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더라도, 바울 입장에서 그들은 이방인에 해당한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할례가 없는 교인을 이방인 수준에 머문다고 판단하는 유대인 출신의 교인에게 바울은 오히려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가치매김 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역설적 선언이지요!
둘째, 육체를 자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선한 것이고 의롭고 경건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바울의 복음에 비춰 보면 그들이 행하는 율법 행위들은 악한 행위라는 겁니다. 이러한 평가는 그들이 살인, 간음, 도적질, 탐심 등의 행위를 자행했고 그런 행동을 지적하면서 그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그릇되거나 악한 동기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들의 (율법에 근거한) “행위”를 의존한다는, 즉 자신들의 행위로써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 하고 이에 근거하여 이방인들에게도 자기들처럼 율법을 행하라고 강요한다는 점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에 속한 것을 신뢰했습니다.
율법을 의지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님
로마서 9:30-10:4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저버린 유대인들이 오랜 전통과 과거에 오래 의지해온 율법과 할례를 중요시하느라 그리스도가 가져오신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의지했다고 비난합니다.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롬 9:32). 바울은 그들이 부딪칠 돌에 부딪쳤으며,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자신의 종교행위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이상,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들과 똑같은 입장에서 율법을 행하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꽤나 경건해 보이는 종교 행위로 평가를 받는 것일지라도, 율법 행위는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는 종교행위이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의지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에 너무도 충실한 그 사람을 자신의 힘으로 의를 얻는 행위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만 나오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율법)행위를 의지한다는 바울의 평가는 곧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바울이 그들이 행하는 악한 행위라는 것은 사실 율법의 규율들을 실천하는 행위들입니다. 수세기 동안 유대교 안에서 율법의 규율들을 실천한다는 것을 겉으로 보이고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게 하는 표지는 안식일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정결례를 실천하며, 코셔 음식(정결한 음식)을 가려 먹어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하는 행위입니다. 대한민국의 교회에서 신앙인임을 표시할 수 있는 잣대로 표현하자면, 신자 됨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엄격하게 주일성수하기, 술 마시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행위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당대에 이처럼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의 표시로 인식하던 사람들 중에는 이것이 악한 행동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대로 행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신앙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이 행위들을 바울이 “악행”이라고 단정한 것은 유대인들 모두에게 그리고 (유대인들의 영향을 받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위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런 것들이 여전히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로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 들어온 유대인 출신의 교인들은 여전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바울은 그것은 유대교에 속한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기에 폐기처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누구의 의견이 옳을까요? 어느 것이 복음적인 입장일까요?
현 교회에서 자행되는 율법을 의지하는 행위들
바울이 그들이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율법을 의지한 것을 악행이라고 단정한 것이 1세기만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그 후 교회에서도 발견되어 우리도 고민해야 할 문제일까요? 우리는 교회에서 성경에 규정된 계명 이외에 다른 종교 행위를 만들 수 있느냐를 두고 16세기의 유명한 두 종교개혁자들인 루터와 칼뱅이 보인 태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루터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금지한 것이 아니라면 허용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루터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처럼 온갖 교회 절기가 많고 성례가 많습니다. 사순절, 주현절 또는 대강림절 등을 만들고 부활절, 성탄절, 맥추절, 추수감사절을 제정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용품, 예배 중에 가운 입기 등 현재 실시하는 종교 행사의 대부분을 루터교는 보유했고, 오늘날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도 이런 종교적인 외형을 따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게 다 루터교에서 온 예전이라는 사실을 도대체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반면에 칼뱅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허용한 것이 아니라면 금지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도 폐지된 마당에 다른 절기를 또 만들면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성탄절,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들 말입니다. 지금도 극단적 칼빈주의를 따르는 교회들 중에는 교회력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칼뱅을 따르는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실시하던 일곱 성례 중 세례와 성만찬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폐지했습니다. 그러면서 삶에서 검소함과 경건함을 실천하기를 가르쳤습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오랫동안 칼뱅이 금지한 것대로 금욕주의를 경건의 표준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술 담배 금지를 선언하자 그것이 마치 복음인 양 전파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교인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으레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기, 술 담배 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술 담배는 몸을 해롭게 하기에 주의 몸을 정결하게 유지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이것뿐인가요? 새벽기도 역시 한국 교회가 신주단지 모시듯이 붙잡고 있는 교인됨의 표시로 삼고 있는 종교 행위입니다. 잠을 덜 자고, 새벽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열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고,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그들만이 보유하고 있는 이 새벽기도를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정상적인 교회라면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습니다. 기도는 그 자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녀가 아버지와 친근하게 대화하고 의지하며 그것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듯이, 신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시시때때로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새벽기도는 일반적인 기도보다 더 우수한 기도이며, 경건의 표준이라고 인식하면서 그 기도를 권하며 권하는 것을 넘어 강요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는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낸 의식입니다. 불교의 새벽 예불이 기독교의 새벽 기도로 변한 것임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니 개인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사실이 그렇다고 밝히면서 새벽기도에 대해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교단 차원에서 돌출되는 행동하여 눈 밖에 나는 것이 두려워 그냥 자신이 속한 교단의 여러 교회가 하는 대로 새벽기도를 시행하고, 실제로 해보니 나쁘지 않고 경건해지는 듯하고 시간을 활용하는 면에서도 좋으니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으로 자리 잡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온 것이지요.
한국교회사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새벽기도는 1907년 평양 대부흥회 이후 신자들이 교회에 자주 모여 기도하며 회개 자복함으로써 한국교회에 일대 부흥이 일어나자, 1909년 여름 무렵 길선주 목사가 새벽에 이처럼 모여 기도하는 것이 교회 부흥에 유익하다고, 이 모임으로 그치지 말고 지속적인 교회 모임으로 하자고 제안했고, 교회는 길 목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국교회에 새벽기도가 이어져 왔습니다. 일전에 불교에 심취하여 예불을 드리던 길선주 목사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더욱 열심을 내어 기도하는 것이 바르다고 주장한 것도 새벽기도를 도입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목소리가 크기로 유명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가 생각한 것을 관철시키기로 유명했던 영향력이 큰 길선주 목사의 영향으로 그렇게 해서 전례 없던 새벽기도라는 제도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사가 증언하는 내용이니 어느 정도 객관적 사실입니다. 아무튼지 한국교회는 그 후에도 새벽기도의 성경적 근거를 검토도 하지 않은 채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이라고 답습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고 나서 “새벽을 깨우리로다”와 같은 새벽이 등장하는 몇몇 본문을 성경적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우습기 그지없는 해석학적 오류를 범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한 번 반성해봅시다. 새벽기도는 성경의 가르침도 아니고 기도에 대한 성경의 지침이나 가이드라인도 아닌, 사람이 만든 인간적인 종교적 열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신앙의 표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한국교회를 제외한 서양교회는 다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새벽기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울이 율법의 의를 얻으려고 율법을 세심하게 지켰던 것보다 훨씬 못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가 새벽기도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신앙인의 표로 삼고 있습니다.
오히려 새벽기도에 참여하는 여부로써 교회 직분을 주고 신앙의 척도로 삼는 것, 그리고 새벽에 나와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친근한 대화를 나누거나 시편에 있는 기도와 같은 내용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소원을 빌고, 공을 들이려 하는 것은 기도의 정신에서 멀어지게 하는, 오히려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방해 요소라는 것을 왜 생각을 하지 못하는지 생각하면 저는 가슴이 아픕니다. 한국의 많은 목사들이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닙니다. 교회 주보에 실린 “예배안내”에는 대부분의 교회가 새벽기도 시간을 표시합니다. 새벽기도 하지 않는 한국교회는 1%도 채 되지 않을 것이고, 많이 잡아도 3%를 넘지 않을 것입니다.
이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이 금식기도입니다. 신앙인들 중에는 금식 기도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 있고, 40일 금식을 몇 번 했는지가 그의 영적 수준, 경건함의 척도로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금식기도(그 중에서도 40일 금식기도)는 자신의 경건의 수준을 자랑하고, 그의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척도로 삼고 있습니다. 금식 기도를 종교외 경건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정말 성경적인 것 같은가요?
중세 시대에 주상(柱上) 수도사들이 있었습니다. 사막에 기둥을 세워놓고 그 위에 올라가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의 메테오라에는 벼랑 끝에 건립된 수도원들이 여럿 있습니다. 13세기부터 만들어진 그 수도원은 흥왕할 때에는 13개에 육박했지만 현재는 8개만 남아 있습니다. 한창 때에는 깎아지른 바위 중간과 꼭대기에 굴을 파고 들어가 살며 기도하던 사람들도 제법 많이 있었습니다. 메테오라를 찾는 관광객들은 이를 보고 놀랍니다. 이런 곳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당시 신자들에게 매우 위대하고 경건의 최고 지점에 오른 사람들로 보였으며, 신심을 얻는 데 있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인물들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과 관련이 없는 한, 금식은 경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실제로 그러합니다(딤전 4:1-5), 그것으로 자기 신앙의 우월함의 표준으로 삼고 그 수준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악행입니다.
기독교의 경건은 금욕을 권장하는 경건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함을 실천하는 낮춤의 삶입니다. 혼자 하는 경건은 뭘 못하겠습니까? 기독교의 경건함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일깨우고 그들에게 권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미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예로 들어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를 가르쳤습니다.
엄격한 십일조 드리기 역시 한국교회 안에서는 신앙인의 중요한 잣대로 제시하는 또 하나의 생각해봐야 할 잘못된 육체 자랑하기 또는 육체 신뢰하기의 한 예입니다. 교회에 자기 돈을 즐겁게 내는 것은 바람직하고 요구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 귀한 행위입니다. 헌금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고 봉헌의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 이외에도, 지상에 있는 교회가 모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일조”의 성경적 근거를 찾는 것이나, 신약시대에도 십일조 제도를 계속 적용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것은 제외하고라도(이 주제에 대해서는 제가 쓴 [헌상에 대한 성경신학적 이해]<생명나무 출간>을 참조하십시오.), 십일조 납부 여부로 하나님의 백성, 즉 교인이 되는 자격의 근거로 제시하는 실례가 만연한 것을 보면 교회에서 십일조의 제도적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십일조 제도가 신약교회가 실천해야 할 교인 자격을 결정하고 경건의 척도로 삼을 만한 것일까요?
2013년 후반기에 한국교회의 한 교단(합동 측)은 교단 총회에서 “십일조를 안 내는 사람은 교인 자격을 정지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내용을 총회 헌의안으로 제출하려고 계획했다가 철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헌의한 상정 소식을 접한 뉴스앤조이와 같은 기독교 신문은 물론이고 조선일보, 한국일보와 같은 일간지로부터 뭇매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반대의견에 부딪치자 이 내용을 헌의안으로 올리려던 사람들은 결국, 그 해 총회에서는 이 헌의안을 상정하는 것을 일단 보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교단에 속한 한 중진 목사는 인터뷰에서, “교인 자격을 정지한다는 것이 교회 출석을 막는 건 아니지만, 장로, 권사 등 교회 내 선출직에 대한 선거권, 피선거권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였다”고 변명했습니다. 누구라도 이 말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라는 것을 금세 눈치 챘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선거권, 피선거권을 박탈한다는 것은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교인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판단으로 받아들일 만한 내용이 아닙니까. 교인 자격이란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십일조 내는 것에 의해 결정한다는 것은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복음에 대해 무지한 사람의 생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분노를 터뜨릴 만한 발언입니다.
바울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상황을 알았다면 빌립보서 3:2을 쓸 때 이 내용도 첨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과 표지는 우리 주 예수를 믿는 믿음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자신을 그분에게 맡기겠다는 고백만으로 하나님의 백성, 교회의 일원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그리스도가 이를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말입니다. 할례가 신약의 교인됨의 표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이외의 어떤 제도적 장치나 종교 행위도 교인됨의 조건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 죽으셨고, 그가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그 사람이 삶 가운데 나내야 하는 교인됨의 표지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지금처럼 수입에서 엄격한 십분의 일을 헌금하는지에 따라 교회 직분 자격을 결정하고, 심지어 합동 측 교단처럼 교인의 자격을 부여하는 문제로까지 이해되고 있다면, 빌립보 교회의 유대인 출신 교인들이 고집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평가처럼, 그 행위는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는 악한 행위입니다. 그것은 육체를 자랑하고 신뢰하는 행위입니다. 합동 총회 스스로가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셈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것을 악행이라고 평가합니다.
할례도 폐지되었는데, 새벽기도와 십일조를 교인됨의 표지로 삼는 것은 그리스도(메시아)가 세상에 오신 것을 모르는 구태의연한 생각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지파들 간에 행해지던 십일조는 성전 제도와 함께 당연히 폐지되었습니다. 십일조 헌금은 교회가 재정 수입을 고정화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돈 없는 사람은 교인도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가난한 사람은 장로가 되지 못합니까? 슬프게도, 한국교회의 현실에서는 실제로 돈 있는 사람이 장로가 되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십일조가 율법에 의해 행하는 행위들이라는 점은 분명하니, 저는 지금이라도 신약시대에 십일조 제도를 시행하는 것을 놓고 교회가 좀 더 세심하게 고려하여 실행 여부를 결정하기를 제안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3장 1-9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율법을 의지하거나, 그것을 착실하게 하는 것에 자신 신앙의 확실성을 두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악행하는 자라고 평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제가 여기서 언급한 것들을 바울이 악행이라고 평가한 것들에 해당한다고 말하니, 이러한 평가로 충격을 받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율법 행하는 사람들을 악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정 이상으로 바울이 율법을 지키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기준을 삼으려는 사람을 악행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며 표지라는 내용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로서는 하루 바삐 교회에서 이미 폐지된 것과 성경에 없는 것들을 근절하려고 노력해왔고, 지금 빌립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똑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가진 판단으로는 자신들이 행하는 종교행위를 자랑거리로 삼고, 그의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여겨서, 교회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그것을 신자들에게 권하고 요구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인 것을 감안하면, 바울의 말씀은 남의 이야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국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상황을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바울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이라면 한국교회에 만연한 비 복음적인 요소들을 경계하고 교회에 들어와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두 번째 내용에 대해서 아주 길게 설명을 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실정에서도 구체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할례에 대한 가치평가
셋째 육체를 자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손 할례당입니다. 바울은 당대 유대교에게 결정타를 날리는 일종의 공격적 펀치를 날렸습니다. 남성 성기의 표피를 잘라내는 할례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표로 삼던 시대가 이제 지났기 때문에 바울은 할례를 이렇게 가치매김 한 것입니다. 바울은 할례를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의 표라고 주장하고 강요하는 것을 이제는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그리스어로 “페리토메”(peritome)로서 글자 그대로 옮기면 둥글게 절단하다는 말이고, 손 할례는 “카타토메”(katatome)로서 글자 그대로 “절단하다,” “손상을 입힌다”는 뜻입니다. 단어 끝이 “토메”로 마치는 두 단어를 나란히 놓아 각운을 이용한 일종의 언어유희로 만들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효과를 높이는 일종의 문학적 기교로써 할례를 가치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8:28에 보면, 바알 선지자들은 바알에게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애를 쓰며 기도하면서 몸에 상처를 냈습니다. 그래서 어느 부위든지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이교도의 관습에 해당합니다. 몸을 상하게 하는 행위로써 자신들의 열정과 간절함을 표현하던 바알의 선지자들 행위를 바울은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인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할례의 가치가 이교도들이 종교적 열심을 표현하는 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 역시 당대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파격적인 발언이고, 틀림없이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당시 할례 받은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 출신의 교인들에게 할례의 우수성과 할례 받은 자들의 특권을 강조했습니다. 할례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의 표이며, 진정한 언약 백성의 증거라고 우기면서 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에는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할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결정됩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로서 옛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가져온 종말론적인 분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참조. 롬 10:4).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종말을 가져온 분이심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유대인이든지(이럴 경우, 그는 전통에 따라 할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만, 그 조건에서 어떠한 가치를 조금도 더하지 못합니다), 이방인이든지 누구나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위생상 표피를 자르고 싶다면, 의료 행위의 차원에서 할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종교적인 의미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대부분의 이방인들처럼 그냥 무할례자로 남고 싶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 조금도 부족하거나 꿀리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를 신뢰하는 것(비 복음적인 내용)을 주의하고 경계해야 함
바울은 이 사실을 교회에 알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3장 1절에서 이런 내용으로 교회를 바로 잡으려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라면,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왜 그가 지금 다루고 있는 이런 말(빌 3:2-9)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았을까요? 교회가 붙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전혀 귀찮은 일이 아니며 번거로운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에게 할례를 강조하고, 이제 중요한 종교적 의미가 없어진 율법을 신뢰하는 사람을 바울이 경계하라고 또 교인들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것은 교회를 기독교적이지 않은 교훈으로부터 지키는 안전장치입니다.
제가 몇 가지 예만 들었지만, 이전에 중요시 여겼어도 지금은 폐지된 것을 고집하거나, 사람들이 만들고 교회가 전통이라면서 개발한 수도 없이 많은 종교 행위들이 실제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한다는 사실을 교인들은 명심하고 그런 것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과거의 예전들이 다 폐지되었는데도, 옛 것들과 사람들이 만든 종교 전통을 계속해서 고집하고 강조한다면, 이것은 육체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옛 시대의 전통과 신앙생활을 여전히 자랑하는 것을 한 마디로 “육체를 신뢰한다”고 표현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육체”라는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율법이라고 해도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면(롬 10:4), 율법마저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참조. 롬 7:5). 그래서 “육체를 신뢰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것에 가치와 신빙성을 부여하고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할례가 되었든지, 율법에 명기된 종교 행위가 되었든지, 그리고 당대에 유행하던 장로들의 전통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이전 시대에 속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거나 변경된 것이 있는데도, 이전 것과 사람이 만든 전통을 고집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전 시대를 끝내신 메시아)이심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단 메시아가 오셨다면, 이전의 부분적인 것은 완성되고, 잠시 있기로 계획된 것은 끝나고, 새롭게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건물을 중요시 하던 구약시대와 다르게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가 중요하게 되었고, 할례가 아니라 세례가 그리고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 자체만이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당시에 전한 복음은 기존의 생각을 타파하며, 오랜 전통으로 해왔던 종교행위를 전복하는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바울이 여러 곳에서 말했듯이,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육체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갈 2:16; 롬 3:20).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유대인들이 보유했던 이런 특권과 종교적 우월함이 절대로 자랑할 만한 것도 못 되고, 신뢰할 것은 더욱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우리 주님과 관련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바로 이전 시대에는 이것을 중요시 여기며 살았지만,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의를 얻는 데 방해가 되는 것으로 알고 율법에 속한 것을 배설물이라고 가치매김 한 것입니다. 율법에 속한 행위들은 아무리 많이 행한다고 해도 절대로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신뢰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신자 됨의 확실한 표지(1): 그리스도를 본받음
언제나 유대인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평가하면서, 정작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그 행위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교인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정말로 그리스도만을 기뻐하고 자랑하며 신뢰하는 그런 종교 행위를 하고 있는가요?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표가 아니라면 어떤 것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입증하는 표란 말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증거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누가 또 어떻게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된단 말입니까?
할례도 받지 않았는데. 율법대로 행하지도 않는데.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뭔가를 해야 하거나, 자신의 신분을 표현하는 외적인 표지 몇 개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껏 찾은 표지가 사람들이 만든 전통이라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정말 그 표지를 찾고 싶으신가요? 단 하나의 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표지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그들의 처지를 상기시킴으로써 이에 대답하고 그들에게 확신을 주는 표지 말입니다. 새벽기도도 하지 않는데, 여전히 담배를 피는데, 형편상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와 증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복음이 있습니다. 누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뿐이고, 또 간단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주님이라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바울은 이런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은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게게 그들은 이미 그 자격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위해 세례를 받았다면, 세례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입증해 주는 표지입니다. 바울은 이런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구비할 필요 없다고 가르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나의 주로 영접했습니까? 그런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다른 조건이 더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중요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은 배설물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할례도 이제 배설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적어도 겉으로 무엇을 행해야 할까요? 이것도 당시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이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하던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빌립보 교회에게 답을 제시했었습니다(빌 2:1-16). 그것은 서로서로에 대하여 섬김을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자기희생의 모범을 보이시면서 하나님께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교인들도 서로에 대해 자기희생을 실천하고 남을 섬기고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 행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벽기도, 십일조, 금식과 같은 종교행위가 아니라서 이상하고 뭔가 찜찜하다고 느끼시나요? 그간 한국교회에서 너무도 복음 외적인 내용을 복음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인(Christians)이라는 말은 그리스도(Christ)에게 속한 사람, 그분을 닮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위입니다. 자기희생, 남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행위입니다. 이것보다 더 종교적인 행위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보다 더 강력한 복음의 실천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의 믿음을 입증하라고 권합니다. 온 율법은 이웃 사랑에서 이루어졌다고, 즉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갈 5:14. 참조. 롬 13:10).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죽음에 참여하고 그의 부활의 능력을 알려고 노력한다고 말했습니다(빌 3:10). 이렇게 될 때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몸이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될 것입니다(3:21).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복음을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신자 됨의 확실한 표지(2): 성령으로 봉사함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옛 시대는 가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담는 것처럼, 새 시대는 옛 시대 방식으로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도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3:3에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고 말한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봉사한다는 것은 남을 섬기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여기에 사용된 단어 라트류오(latreuo)가 주로 예배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는 것을 안다면, 바울이 봉사보다는 예배를 의식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라는 것은 요한복음 4:23-24에서 확인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본문과 빌립보서 3:3은 같은 진리를 담고 있는 본문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한 여인에게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때가 올 것이며,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세상에 오셨고, 부활 후에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선물이며 마지막 때를 표시하는 성령을 보내주셔서 이 사실을 더욱 굳게 하셨습니다. 신자들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신자가 예수님과 성령님을 의지하여 또 그 안에서 예배한다면, 그 사람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시대에는 할례를 받은 사람을 그의 백성으로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그분의 참 백성으로 인정하십니다.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로 인정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 성령으로 예배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롬 8:15). 참 백성의 조건은 할례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지하여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참 백성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할례파”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실제로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입증하던 표지였던 시대에 통용되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신약시대의 신자들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신자들은 할례를 몸에 표지로 갖지 않았지만, 할례자들이 자랑하는 진정한 할례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고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은 삶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희생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전의 전통, 관습, 심지어 종교행위의 방식까지 변화를 가져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리고 그분의 낮아지심을 따라 겸손히 “행하는” 자들은 율법을 행하는 것을 자랑하거나 그것을 신뢰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를 입증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기뻐한다” 또는 “주님을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신을 낮추어 아버지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기뻐하고 주님을 자랑합니다. “주를 자랑하라”는 말에는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겉으로 보이는 종교 행위가 없어도,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 겉으로 나타나는 종교 행위를 행하는 점에서는 세상 사람과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진정 자신을 낮추고 섬김을 보여 그리스도의 낮아짐에 동참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 바울이 평생 십자가만을 자랑했겠습니까? 우리의 수고를 덜고 쉽게 구원을 받게 해주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십자가가 단지 구원의 유일한 수단이라서 그랬을까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적어도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할례를 비롯한 옛 것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사는 생명을 주기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새 시대에 사는 신자들은 육체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자랑합니다. 신약교회의 신자들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나 세상(의 것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다른 어떤 것(남들이 행하지 못하는 종교의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것)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그분만을 기쁨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하기에, 참 신자는 “주 안에서”만 기뻐합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분위기에서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고, 고난을 겪는 빌미가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나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종교행위를 강조하는 상황에서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바울은 일찍이 빌립보교회가 이런 위기에 놓였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권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옛 종교나 사람이 만든 종교적 전통을 자랑하거나 신뢰하지 말고, “주 예수 안에서(만)” 기뻐하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