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는 울지 않는다
마경덕
연기가 자욱한 돼지곱창집
삼삼오오 둘러앉은 사내들
지글지글 석쇠의 곱창처럼 달아올라
술잔을 부딪친다
앞니 빠진 김가, 고기 한 점 우물거리고
고물상 최가 안주 없이 연신 술잔을 기울인다
이 술집 저 술집 떠돌다가
청계천 하류로 떠밀려 온 술고래들
어느 포경선이 던진 작살에 맞았을까
쩍쩍 터진 등 감추며 허풍을 떠는
제일부동산 강가, 아무도 믿지 않는 얘기
허공으로 뻥뻥 쏘아 올린다
뭍으로 밀려난 고래들, 돌아갈 수 없는
푸른 바다를 끌어 와 무릎에 앉힌다
새벽이 오면 저 외로운 고래들
하나 둘, 불빛을 찾아 떠날 것이다
파도를 헤치고 무사히 섬에 닿을 수 있을지...
바다엔 안개가 자욱하다
스크류처럼 씽씽 곱창집 환풍기 돌아간다
신발論-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단호박 자궁 마경덕
죽을 쑤려고 호박을 자른다
뉴질랜드産 검푸른 단호박
자그만 몸둥이,어디에 이런 힘이 생겼을까
칼날을 물고
도마에 머리를 들이 받고
텅, 텅, 텅
쩍 돌덩이 같은 몸이 열린다
속살이 눈부시다
반으로 잘린 단호박 자궁
호박씨들 우굴우굴 엉겨있다
끈끈힌 속을 긁 손을 넣어어 낸다
걸쭉한 피가 묻는다
움푹, 구덩이가 드러난다
세 번이나 도굴 당한 내 몸에도
구덩이가 파였을것이다
단호박 자궁
마경덕
죽을 쑤려고 호박을 자른다
뉴질랜드산 검푸른 단호박
자그만 몸뚱이 어디에 이런 힘이 들었을까
칼날을 물고
텅,
도마에 머리를 들이받고
텅, 텅,
쩍, 돌덩이 같은 몸이 열린다
속살이 눈부시다
반으로 잘린 단호박 자궁
호박씨들 우글우글 엉겨있다
손을 넣어 끈끈한 호박씨를 긁어낸다
걸죽한 피가 묻는다
움푹, 구덩이가 드러난다
세 번이나 도굴 당한 내 몸에도
구덩이가 파였을 것이다.
무꽃/ 마경덕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후다닥 무언가 뛰쳐나간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가슴을 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꽃이다. 까만 봉지 속이 환하다. 비닐봉지에 담긴 묵은 무 한 개 꽃자루를 달고 있다. 베란다
구석에서 뒹굴던 새득새득한 무. 구부정 처진 꽃대에 보랏빛 꽃잎이 달렸다. 독하다 참말 독하다.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꽃을 피우다니. 손에 얹힌 무, 몸집보다 가볍다 척, 제 무게를 놔버리지
못하고 주저주저 망설인다. 누군가 말라붙은 무꼬랑지를 쥐고 흔들어댄 모양이다. 누가 창을
넘어와 봉다리를 풀고 무를 부추긴 모양이다
눈을 뜨다 만 연보라빛 무꽃. 피기도 전에 풀 죽은 무꽃. 이 어린 것이 미련한 지 에미를 믿고
여기가 어디라고 덜컥, 꽃이 되었던가. 어미 살을 파먹고 꽃이 된 무꽃. 쪼그라진 젖무덤 물고
놓지 않는 무꽃.
그 해 겨울 / 마경덕
흉년 든 그 해
탱자처럼 노랗게 황달을 앓던 아버지
눈 오는 아침, 재첩을 사러 간
엄마는 오지 않고
언니와 나는 쪽마루에 걸터앉아
반 됫박 남은 호박씨를 까먹었다
종일 퍼붓는 눈
앞산의 눈썹이 지워지고
봉창 여닫는 소리, 잦은 기침 소리
뒤란 대밭 철퍼덕, 눈똥 누는 소리
눈이 내려
가뭇없는 길
휘청, 발을 헛디딘 대숲은
한 무리 새떼를 날려보냈다
-2003년 현대시 11월호
문 / 마경덕
봉창을 밀고 단숨에 들판이 들어섭니다 뒷산에 우거진 상수리, 툭툭
지붕으로 던지며 뒷간 환기창에 따가운 가을볕 쳐들어옵니다 문이
한나절 나를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언젠가 서해(西海)에 가서도 꽁꽁
묶인 적 있습니다 목선 한 척 수평선을 끊어먹고 사라질 때까지
서쪽으로 난 쪽문에 고요히 묶여 있었지요 아득한 지평선이, 너른
바다가 어떻게 그 작은 문으로 들어 왔는지 아직 모릅니다
슬픔을 버리다 / 마경덕
나는 중독자였다
끊을 수 있으면 끊어봐라, 사랑이 큰소리쳤다
네 이름에 걸려 번번이 넘어졌다
공인된 마약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문 앞을 서성이다 어두운 골목을 걸어나오면
목덜미로 빗물이 흘렀다
전봇대를 껴안고 소리치면
빗소리가 나를 지워버렸다
늘 있었고 어디에도 없는, 너를 만지다가
아득한 슬픔에 털썩, 무릎을 꿇기도 했다
밤새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데도 닿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너에게 감염된 그때, 스무 살이었고
한 묶음의 편지를 찢었고
버릴 데 없는 슬픔을
내 몸에 버리기도 하였다
-시와반시 2004년 겨울호
우리는 사막을 건너간다 / 마경덕
일렬로 앉아 집으로 간다 땅굴 지나 다리 건너 붉은 십자가 밑 지나간다. 비석처럼 늘어선 도시의 십자가, 거대한 묘지를 떼 지어 지나간다. 종일 도시의 사막을 떠돌던 무리들, 신문을 덮고 귀마저 닫고 목하 기도 중. 손잡이에 매달렸던 전갈을 닮은 사내는 어느 사막으로 떠났을까. 지팡이 하나로 더듬더듬 세상을 헤매는 저 맹인, 캄캄한 사막에서 수없이 모세의 지팡이를 생각했으리. 뒤따라 온 아이는 때 절은 쪽지와 껌 한 통을 무릎마다 놓고 간다
우린 지금 눈을 감고 회개 중, 전철이라는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가며.
소나무 / 마경덕
내원사 계곡. 백 년 묵은 소나무 한 그루 쓰러져 있다. 가지를 찢고 뿌리를 뽑아 올린 바람 간 곳 없고 솔이파리 누릇누릇 땡볕에 타고 있다. 소나무는 눈을 뜨고 서서히 죽어가는 제 몸을 바라본다. 물소리는 뿌리를 적시지 못한다. 저놈의 목에 밧줄을 걸고 기증기로 끌면 일어설 수 있을까.
병든 노모에게 속옷을 입힌다. 거웃이 사라져 밋밋한, 여섯번의 열매를 맺은 그 곳, 시든 꽃 잎 한 장 접혀 있다. 졸아든 볼기에 미끈덩 여섯 개의 보름달을 받아 안은 찰진 흔적 남아 있다. 노모가 눈으로 말한다. 내가 베어지면 그 등걸에 앉아 편히 쉬거라. 머리맡에 고요히 틀니가 놓여 있다. 앙상한 다리, 분홍 양말이 곱다. 기울어 가는 소나무 , 반 쯤 뽑힌 소나무에 링거를 꽂는다.
더미 가족/마경덕
차에 태우고 안전밸트를 매어 주네. 낯익은 사내 웃으면서 손수 시
동을 걸어주네. 친절도 해라, 죽음이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다니!
순간 끔찍한 공포를 잊고 말았네. 다녀올게요. 나들이처럼 손을 흔
들며 마주 웃어 주었네. 옆자리엔 임신 중인 아내와 뒷좌석엔 어린
아들놈이 타고 있었네. 문을 닫으며 사내가 또 웃었네. 별 일 아니
야. 그 인자한 눈이 그렇게 말했네. 나는 널 낳은 아비야. 너에게
팔과 다리를 준 아비야. 자그마치 네 몸값이 얼만지 아니? 그래요.
억대가 넘는 몸값을 알아요. 나와 내 가족을 만드신 위대한 아버지.
내 가족의 갈비뼈는 아버지의 것과 비슷해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자동차 한 대를 만들기 위해 서슴없이 가족을 버리는 아버지. 이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요. 도무지 방어防禦를 모르는 제 이름은
더미*거든요. 아, 아버지 아무 걱정 마세요.... 이제 악셀을 밟고
벽을 향해 달려가면 되나요?
*더미(dummy) : 선세가 달린 실험용 인형. 각종 자동차 충돌
시험에서 운전자 대신 가상의 사고를 당한 뒤 예상 상해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함.
날아라 풍선 / 마경덕
끈을 놓치면 푸드득 깃을 치며 날아간다.
배봉초등학교 운동회, 현수막이 걸린 교문 앞에서 깡마른 노인이 헬륨가스를
넣고 있다. 날개 접힌 납작한 풍선들. 들썩들썩, 순식간에 자루만큼 부풀어오른
다. 둥근 자루에 새의 영혼이 들어간다. 노인이 풍선 주둥이를 묶는다. 하나 둘,
공중으로 떠오르는 새털처럼 가벼운 풍선들. 절정에 닿는 순간 팡, 허공에서
한 생애가 타버릴, 무채색의 가벼운 영혼이 끈에 묶여 파닥인다. 평생 바람으로
떠돌던 노인의 영혼도 낡은 가죽부대에 담겨있다.
함성이 왁자한 운동장, 공기주머니 빵빵한 오색풍선들, 첫 비행에 나선 수백
마리 새떼 하늘로 흩어진다. 뼈를 묻으러 공중으로 올라간다.
덩굴은 고집이 세다 / 마경덕
허공에 쑥, 손가락을 집어넣는 호박덩굴
가늘고 푸른 손가락이 둘둘 허공을 감아쥐고
하늘을 팽팽히 끌어당긴다
스스로 길이 되는 덩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기댈 곳을 찾는 여린 호박순
당겨보면 벋지르며 살아온 힘이 있다
줄기가 둑뚝 잘려나가도
거머쥔 손을 풀지 않는다
구부리면 휘어지는 만만한 것들
어깨와 어깨를 엮어 스크럼을 짠다
그 여린 것들이,
담벼락에 올라
벽을 허물기 시작한다
꾸역꾸역 벽을 먹어 치운다
마경덕 시집<신발론>문학의전당. 2005.
짐승들 이야기 / 마경덕
그 모피공장엔 짐승들이 우글거렸네 사람인 척 하는 짐승 같은 사람과 짐승처럼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들과 죽은 짐승들의 눈이 쌓인 모피창고가 있었네. 숨쉬기조차 힘들게 날아오르는 짐승의 털도 가난을 밀어내지 못하고 배고픈 짐승들, 배부른 짐승의 하룻밤 술값 정도에 금세 길들여졌네. 숱한 밤이 뜬 눈으로 들들들, 미싱에 박혀죽고 먼지 쌓인 바닥에서 죽은 짐승들의 물 먹인 껍데기는 고무줄처럼 팽팽히 당겨졌네. 여우 한 마리 팔딱, 재주 넘어 열 마리 여우로 둔갑했네. 수입산 백여우 뱃가죽을 칼로 찢으며 끈질기게 살아남은 짐승들, 늘어난 가죽에 빗질을 하며 눈부신 빛을 달고 살았네. 죽어서 더 빛이 나는 껍데기에 밤새 날개를 달았네. 그저 일밖에 모르는 미련한 짐승들, 백여우의 탐스러운 꼬리에 손 베이는 줄 몰랐네. 수없이 죽어간 짐승들의 슬픈 눈에 그해 여름, 펄펄 눈이 내리고
토마토 / 마경덕
마당귀에 심은 토마토 한 그루
눈만 마주쳐도 덜컥 애가 선다
간짓대 같은 몸뚱이
쇠불알만한 새끼를 치렁치렁 달고
다시 입덧을 하는 토마토
누릇누릇 머리가 쇠고
허리가 휘었다
차마 놓을 수 없는 것들
버리지 못할 것들
안고 업고
작대기 하나로 버티는 토마토
또 만삭이다
저 무지렁이 촌부(村婦)
우물 / 마경덕
눈물이 다만,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마른 몸에서 물이 솟는 건 내 몸 어딘가에 우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 깊은 곳에 영혼이
물처럼 고여 있는 것이다. 흐르는 눈물은 내 영혼의 하얀 이마이거나 지친 발가락이거나
슬픔에 퉁퉁 불은 손가락이다. 영혼은 고드름이나 동굴의 석순처럼 거꾸로 자란다.
이것들은 모두 하향성이다. 근원을 향해 생각이 기울어 있다. 내가 나에게 찔리는 것,
슬픔이 파문처럼 번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석순처럼 자란 영혼을 손수건으로 받으면 발간 핏물이 든다. 나는 피 젖은 손수건 석 장을
가지고 있다. 그 오래된 손수건을 차곡차곡 접어 냉동실에 두었다. 꽁꽁 얼어붙은 냉동고의
영혼들은 더 많은 우물을 만들고 영혼을 생산한다. 고드름처럼 자라 맹물처럼 날아가 버린,
그것들은 대개 일회용이다. 나는 쉰밥처럼 변해버린 가벼운 영혼에 대해 속눈썹이 떨리도록
생각해본 적은 없다.
찌르고 들쑤시고 사막처럼 메마르게 할지라도, 젖은 영혼을 사랑한다. 상처 많은 이 우물에서
詩를 꺼내고 밥을 꺼낸다. 두레박이 첨벙 떨어지는, 서늘히 두렵고 캄캄한 우물. 내 머리칼이
쉬이 자라는 것도 질척한 슬픔에 뿌리가 닿아있기 때문이다. 눈물이 다만 슬픔만으로 오지
않는 걸 이제는 안다.
목공소에서 / 마경덕
희고 매끄러운 널빤지에 나무가 걸어온 길이 보인다. 나무는 제 몸에 지도를 그려 넣고
손도장을
꾹꾹 찍어 두었다. 어떤 다짐을 속 깊이 새겨 넣은 것일까. 겹겹이 쟁여둔 지도에 옹이가
박혔다.
생전의 꿈을 탁본 해둔 나무, 빛을 향해 달려간 뿌리의 마음이 물처럼 흐른다.
퉤퉤 손바닥에 침을 뱉는 목공. 완강한 톱날에 잘려지는 등고선. 피에 젖은 지도 한 장
대팻날에
돌돌 말려 나온다. 죽은 나무의 몸이 향기롭다.
말뚝 / 마경덕
선착장 짠물에 얼룩진 쇠말뚝, 굵은 밧줄이 똬리를 틀고 말뚝의 목을 조이고 있다.
얼마나 많은
바다가 드나들었나. 끙차, 목에 밧줄을 휘감고 버틴 시간이 얼마인가. 투두둑 바다의
힘줄을
끊어먹은 말뚝 모가지가 수평선을 향해 늘어져있다.
녹이 슨 밑동. 벌겋게 흘린 눈물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든 밧줄,
단숨에
바다를 둘러매던 그을린 팔뚝, 노을에 젖은 만선의 깃발, 말뚝에 마음을 묶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철썩, 포구가 몸을 뒤트는 순간 말뚝의 영혼이 새어나간다. 수많은 이별을
치르는 동안
말뚝의 심장은 차갑게 식었다.
선창가 말뚝에 걸터앉아 떠난 사람을 생각한다. 말뚝 뽑힌 자리, 깊이 파였다.
나를 맬 곳이 없다.
빈둥빈둥 늙는 집 / 마경덕
지지난 봄, 집 앞에 들어선 연립 한 동, 분양을 알리던 현수막은 바람에 시들었다.
해를 넘겨도
팔리지 않는 집. 빈방에 어둠이 살고 있다. 빛바랜 만국기를 붙들고 집이 생각에 잠기는
동안
어둠이 야금야금 집을 뜯어 먹는다. 하수구를 막고 지붕을 걷어내고 벽에 금을 긋는다.
어둠은
난폭한 세입자, 뒤꼍에 모여 이 곳에 뼈를 묻자고 소곤대는 소리에 벽지가 풀썩 무너져
내렸다.
빈둥빈둥 집이 늙고 5층 꼭대기로 벽돌을 져 나르던 늙은 여자는 노임을 포기하고 떠났다.
어둠이
옥탑으로 올라간 뒤 목을 뽑고 내려다보던 건달같은 사내도 보이지 않는다. 뒤꼍으로
꽁초를
던지고 가래침을 뱉던 사내마저 치우고, 집은 덩그렇다. 마당에 그림자를 내려놓고
잠든 빈집.
창문은 서랍처럼 닫혀있다.
바께뜨 / 마경덕
먹음직한 빵이었네, 자고 나면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네, 열다섯 되던 해
늦은 밤길에서 엄마는 말했지
"니 나이 때는 기름져서 바라만 봐도 군침이 돌지."
골목에서 휘파람을 불어대던 사내들, 모두
식성이 좋았네, 그 중 배고픈 사내 하나
통째로 나를 집어 삼켰네
나 한때 뜯어먹고 싶은
갓구운 빵이었네
물컹한 크림이 들어있는
예쁜 빵을 셋 낳고,
김 빠진 딱딱한 빵
씹을수록 구수한 때는 지나갔네
부딪히면 퍽퍽 소리가 나네
멀뚱멀뚱 쳐다보네
언제부턴가 덤덤한 빵을
나이프로 쓱쓱 썰고 있네
잼과 버터를 듬뿍 얹은
마른 빵끼리 투덜대네
대체 왜? 왜 이리 맛없어?
칙, 칙, 압력솥 / 마경덕
추가 움직인다. 소리가 뜨겁다
달리는 기차처럼 숨이 가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더는 참을 수 없는 듯,
추를 마구 흔든다. 지금 당장 말리지 않으면
머리를 들이받고 자폭할 기세다
저 맹렬한 힘은 무엇인가
저 안에 얼마나 많은 신음이 고여 있는가
슬픔이 몸을 찢고 나온다
집 한 채를 끌고 소리가 달린다
밤기차를 타고 야반도주하는 여자처럼
속이 탄다. 부글부글
골목이 고양이를 키운다 / 마경덕
막다른 집에서 시작된 골목이 동네를 돌아다녀요. 막다른 집에서 걸어 나와 구불구불
기어간
골목의 등이 보여요. 집과 집 사이로 용케 피해 다니며 골목은 종일 고양이와 놀아요.
지붕에서
옥상으로 아찔한 난간으로 휙휙 고양이를 던지며 하루를 보내요. 즐거워라, 아이들이
사라진 골목.
골목끼리 고양이를 주고받으며 놀아요.
또 던지려나 봐요. 수채 구멍에 쥐새끼를 풀고 수백 톤의 어둠을 골목에 부려요. 냉장고
음식을
봉투에 싸서 집 앞에 내놓아요. 봉투를 찢고 악취를 끄집어내고 죽은 쥐를 뒤꼍에 던져요.
불안한
눈 의심 많은 귀를 못된 고양이 얼굴에 달고 있어요. 벽을 디밀고 "뛰어 넘어! 골목을
벗어나면
죽을 줄 알아!" 으름장도 쳐요. 막다른 집 골목이 벽을 타고 올라가요. 다시 골목이
시작돼요. 휘익,
고양이가 날아와요.
날아라 풍선 / 마경덕
끈을 놓치면 푸드득 깃을 치며 날아간다
배봉초등학교 운동회, 현수막이 걸린 교문 앞에서 깡마른 노인이 헬륨가스를 넣고
있다. 날개 접힌 납작한 풍선들. 들썩들썩, 순식간에 자루만큼 부풀어오른다. 둥근
자루에 새의 영혼이 들어간다. 노인이 풍선 주둥이를 묶는다. 하나 둘, 공중으로 떠
오르는 새털처럼 가벼운 풍선들. 절정에 닿는 순간 팡, 불꽃처럼 한 생애가 타버릴,
조각조각 허공에 흩어질 영혼이 끈에 묶여 파닥인다. 평생 바람으로 떠돌던 노인의
영혼도 낡은 가죽부대에 담겨있다.
함성이 왁자한 운동장, 공기주머니 빵빵한 오색풍선들, 첫 비행에 나선 수백 마리
새떼 하늘로 흩어진다. 뼈를 묻으러 공중으로 올라간다.
씨옥수수 / 마경덕
처마 끝에 매달린 마른 옥수수
봄볕에 슬몃슬몃 눈을 뜬다
질끈 머리를 틀어 올리고
알몸으로 겨울을 버틴 씨옥수수
따순 바람에 발이 가렵다
알알이 쟁여둔 욕망들
웃자란 몸 속의 뿌리들
우르르 봄을 향해 발을 뻗는다
출발을 알리는 신호를 기다린다
딱딱한 알갱이 속,
저 푸른 불씨들
들판에 확, 불이 붙겠다
누군가 골목을 건너갔다 / 마경덕
움푹 파인 발자국이 골목을 걸어간다. 막 포장을 끝낸 질척한 골목을 지나간,
발을 잃어
버린 오래된 발자국, 딱딱한 콘크리트 발자국이 쉬지 않고 골목을 걸어간다.
구두가 운동
화를 껴안고 큰 발이 작은 발을 업고 박성희 미용실, 월풀 빨래방 현대슈퍼를
돌아 나간다.
사라진 발을 기억하는 발자국들. 빈 발자국을 따라가는 내가 아프다. 어느 날 찾아
온 사랑
은 나를 딛고 가버렸다. 버거운 영혼이 가벼운 영혼을 밟고 저벅저벅 앞만 보고
가버렸다.
누군가 길에 마음을 빠뜨리고 한참을 찾으러 오지 않는다. 골목은 발자국
흉터를 가지고 있다.
얼굴 / 마경덕
심벌이 불거진 근육질 남자, 브래지어 팬티 한 장 걸친 미끈한 여자,
버젓이 대로변에 서있는 목 잘린 속옷가게 마네킹들
죄짓고 싶었네 뻔뻔하고 싶었네 많은 사람에게 면목 없고 싶었네
저런, 쳐 죽일, 배터지게 욕먹고 싶었네
목 위에 얼굴만 달리지 않았다면
기왕이면 여러 개의 목을 갖고 싶었네 꽁꽁 머리통 숨겨두고
일회용 목으로 바꿔 달고 싶었네 재빠른 자라목이 되고 싶었네
왜 목은 하나일까
건드리면 부러지는 한심한
목 위엔 얼굴이 있고 얼굴에는 마경덕이라는 이름이 있네
툭하면 짐승 발톱이 돋네. 제발 나이값 좀 하라고 엄마는 말하네
나 아직, 사람이 되지 못했네
고로쇠나무 / 마경덕
백운산에서 만난 고목 한 그루. 밑둥에 큼직한 물통 하나 차고 있었다. 물통을
반쯤 채우다 말고
물관 깊숙이 박힌 플라스틱 호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둥치에 구멍을 뚫고
수액을 받던
자리. 시름시름 잎이 지고. 발치의 어린 순들, 마른 잎을 끌어다 푸른 발등을
덮고 있었다.
주렁주렁 링거를 달고 변기에 앉은 어머니. 기저귀를 갈아주는 자식놈에게 부끄러워
얼른 무릎을
붙이는, 옆구리에 두 개의 플라스틱 주머니와 큼직한 비닐 오줌보를 매단 어머니.
호스를 통해
세 개의 주머니에 채워지는 어머니의 붉은 육즙肉汁. 오십 년 간 수액을 건네준 저
고로쇠나무.
넝쿨장미 / 마경덕
봄볕이 등 기대고 간 담벼락, 만삭의 오월 산모들, 설핏 젖꽃판 비치더니
발그레 젖가슴 벌어진다.
휘늘어진 치맛자락 땅에 젖는다. 한나절 벽을 잡고 몸을 뒤튼, 벌겋게
달아오른 앙다문 신음소리,
미끈 불끈 양수가 터진다. 지나가던 바람이 아이를 받아낸다. 산파의 손을 찌르는
가시 탯줄, 좁은
골목에 줄줄이 아이들이 태어난다. 설익은 풋배꼽들, 투명한 햇살에 배꼽이 익는다.
배내똥 묻은
기저귀 담벼락에 널린다.
까치발을 한 젊은 여자, 장바구니에 장미 한 송이를 담아간다. 입양가는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다.
다산(多産)으로 요란한 골목. 눈부신 출산이다.
우이시 (2006년 9월호)
사각의 링 / 마경덕
끝까지 버틴 놈들, 맷집이 좋다. 눈이 쏠린 넙치, 얼마나 바닥을 기었는지 뱃가죽이
헐었다. 게임에
능한 주인 잔머리를 굴린다. 전시용을 함부로 다루는 바보는 없다.
눈치 빠른 주인 선수를 독려한다. 항생제를 먹여 발딱 일으켜 세운다. 활기차고
평화로운 사각의
링. 약물복용이 발각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넙치가 뜰채에 끌려나온다. 목덜미를 후려치는 횟집 사내. 바다의 목이 파르르
떤다. 도마에
노을이 흥건하다. 등뼈를 드러내고 파닥파닥 뛰던 파도는 잠잠하다. 할딱이는
활어들, 알 수 없는
말들 중얼중얼 수면으로 흩어지고 '위하여!'를 외치는 퇴근길 광화문이 숨찬
하루를 내려놓는다.
만년대리 X가 단칼에 잘리고 노련한 O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O에게 서로
술을 따르겠다고
A, B, C,가 氣싸움을 하는 중, 신입사원 D가 넙죽 엎드린다.
불교문예 (2006년 가을호)
동전 몇 닢 / 마경덕
머리맡 자리끼가 얼던 밤, 종란이 아부지가 죽었다. 밥상을 엎고 장독을
깨부수던 종란이 아부지,
호롱불 아래 설빔을 짓던 엄마가 혀를 찼다. "하필 정월 초하루에 출상이라니…
" 나는 자다 깨어
요강에 오줌을 누고 있었다.
까치소리 차고 맑은 날. 홀아비 지게꾼 학출이 아부지가 관을 지고 나왔다.
황달에 부황에 누렇게
뜬 학출이 아부지, 북어처럼 깡마른 팔뚝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나왔다.
주르르 관에서 물이 흘렀다.
등이 흥건히 젖었다. 요란한 꽃상여도, 펄럭이던 만장도 요령소리도,
구슬픈 상두꾼도 없었다.
배에 물이 차올라 좋아하던 술 한 모금 못하고 세상을 뜬 종란이 아부지,
베옷을 걸친 종란이
엄마는 꺽꺽 목이 쉬었고 빡빡머리 종기오빠, 종란이. 찔찔이 종애가
울면서 장지로 떠나는
지게를 따라갔다. 때때옷 입은 아이들 몇 졸졸 따라붙었다.
울고 있는 종란이에게 언니가 동전 몇 닢을 쥐어 주었다. 종란이는 뚝 울음을
그쳤다. 종란이는
둘도 없는 내 라이벌인데 언니가 세뱃값으로 받은 동전을 몽땅 털어 주었다.
울음을 따라가는데
자꾸 동전이 맴돌았다. 언니가 건네준 동전이 눈앞에 짤랑거렸다.
눈부신 설날 아침이었다.
<학산문학> 2006년 가을호
나를 맛보였다 / 마경덕
강원도 깡촌, 줄창 시퍼렇게 서있는 여름산의 무르팍이 싱싱했다. 산비탈에서
굴러온 바람이
달리는 차창으로 맨발을 디밀었다. 발바닥에서 서늘한 그늘내가 났다. 떡대
좋은 산 하나를 끼고
돌자 풋내가 질펀했다. 산딸기를 만지고 온 농익은 바람이 딸기물 든 손으로
내 머리칼을 연신
어루만지고 버스는 투덜투덜 돌밭을 달렸다. 툭, 탁, 다급한 돌멩이가
계곡으로 튀고 물 젖은
바람이 벼랑을 타고 기어올랐다. 강바람은 이끼빛 수건을 목에 걸치고 있었다.
곳곳에 바람의
몸에 맞는 바람집이 있었다. 마을에 사는 바람은 미간을 찡그리고 밭두렁에
쪼그리고 있었다.
바람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뒷좌석에 마음을 눕히고 찬찬히 바람을 맛보기 시작했다. 개울에 발 담근
물소리를 집어먹으니
박하사탕을 깨문 듯 후련했다. 눈을 감고 바람의 뒷다리를 흠흠, 들이마셨다.
동시에 누군가 나를
맛보고 있었다. 익었나, 설었나, 뒤집고 있었다. ‘나’라는 맛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나를 한 입 베어 문 바람이 퉤퉤! 나를 뱉아버렸다.
카페 후미개 / 마경덕
남한강 언덕배기 너와집 한 채
금이 간 흙벽 불씨 마른 호롱이 걸려있다
오래 전 폐업한 카페 후미개
퀴퀴한 냄새가 먼저 달려나온다
소파가 먼지를 탈탈 털며 앉으라 한다
싸늘한 벽난로에 둘러앉아 젖은 등 말리는 등받이 의자들
반쯤 타다만 장작
카페의 메뉴는 정적이다
벽에 붙은 반라의 여자, 너무 오랫동안 웃었다
맥주잔을 들고 폭소를 터뜨린 여자의 웃음은 소리가 없다
두 개의 식염수 주머니가 들어있는 풍만한 가슴
김 빠진 맥주잔, 거품이 철철 넘친다
카페의 메뉴는 어둠이다
오래전 숨을 멈춘 냉장고
꽁꽁 어둠을 얼려 판다
원한다면 네모와 별 모양의 어둠을 사갈 수 있다
눈금 풀린 저울이 무게를 달 것이다
카페는 지금도 성업 중
흙마당을 기어온 봄민들레 손님
햇살 한 잔을 주문한다
너와집 한 채
더듬더듬 허물어진 뒷담을 넘어가
봄볕 한 움큼 받아 온다
뒤꼍 개망초 무더기
늙은 집을 기웃거린다
시골집 마루 / 마경덕
마루는 나이를 많이 잡수신 모양입니다
뭉툭 귀가 닳은 허름한 마루
이 집의 내력을 알고 있을 겁니다
봄볕이 따신 궁둥이를 디밀면
늘어진 젖가슴을 내놓고, 마루귀에서
이를 잡던 쪼그랑 할멈을 기억할 겁니다
입이 댓발이나 나온 며느리가 아침저녁
런닝구 쪼가리로 박박 마루를 닦던
그 마음도 읽었을 겁니다
볕을 따라 꼬들꼬들 물고추가 마르던 쪽마루
달포에 한 번, 건미역과 멸치를 이고 와
하룻밤 묵던 입담 좋은 돌산댁이 떠나면
고 여편네, 과부 십 년에 이만 서 말이여
궁시렁궁시렁 마루에 앉아 참빗으로 머릴 훑던
호랑이 시어매도 떠오를 겁니다
어쩌면 노망난 할망구처럼 나이를 자신 마루는
오래전, 까막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눈물 많고 간지럼을 잘 타던 꽃각시
곰살맞은 우리 영자고모를 잊었을지 모르지만,
걸터앉기 좋은 쪽마루는
지금도 볕이 잘 듭니다
마루 밑에 누구의 것인지 찌든 고무신 한 짝 보입니다
조용한 오후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마루에 봄이 슬쩍 댕겨갑니다
성북동 가는 길 / 마경덕
이 동네의 주인은 높은 담이다
세콤이나 캡스를 달고 낯선 방문자를 가려낸다. 드디어 담도 사람처럼
생각을 갖게 된 것. 생각이
늘어나자 불안이 담을 쌓고 문을 걸었다. 성(城)처럼 우뚝한, 담은 이제 벽이다.
벽은 골목길
야채를 파는 리어카와 떨이를 외치던 생선장수를 밀어내고 제 키보다 높은
지붕을 끌어내렸다.
벽뿐인 동네는 벽끼리 논다. 금을 긋고 등을 지고 건너편 벽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컹컹, 개 짖는 소리만 벽을 타고 넘는다. 담 높은 집의 힘센 개들은 오
줌을 갈기며 골목을 쏘다니는 똥개처럼 담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높아서 더 불안한,
거만한 벽은 끝까지 벽만 보여준다.
토마토가 말하다 / 마경덕
한 입 깨물면
찍 물똥을 갈기는 토마토
토마토를 통째로 먹을 때면
녀석이
느닷없이 뒷발질을 할 것 같은 예감
뺨을 한대 후려칠 것 같은 불길함
망설이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잽싸게 한 방 내지른다
하얀 셔츠에 얼룩이 졌다
토마토는 내게 무슨 말을 한 걸까
임종을 맞은 할머니
그 깔끔한 양반, 속옷에
유언 대신 똥 한 덩이 놓고 가셨다는데
오랜 가슴앓이에 속이 까맣게 탔다는데
토마토의
붉은 입술이, 심장이.
물컹물컹 고인 침묵이
금세 입 속으로 사라졌다
셔츠엔 푸르죽죽
알 수 없는 토막말이 적혀 있다
-미발표-
----수정---
헤이, 토마토!
한 입 깨물면 찍, 물똥을 갈기는
토마토는 입이 없다. 둥글고 살진
엉덩이만 있다. 그래서 고인
말이 줄줄 흘러내린다
입이 없는 토마토는 제 안의 슬픔을, 얼룩얼룩
셔츠에 지리고.
그러니까 탐스런 엉덩이 토마토는 울컥
무언가를 배설하고,
나는 알 수 없다
귀보다 말이 많아 그의 마지막 유언을
읽을 수 없다. 내 입은
입이 없는 것들의 가슴을 모른다
헤이. 토마토!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물렁물렁 우물우물 씹히는 토마토
토마토의 붉은 심장이. 침묵이
금세 입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물렁한 말은
혀끝에서 가슴으로 번져간다
셔츠엔 푸르죽죽
알 수 없는 토막말이 적혀 있다
- 미발표 -
능소화 폭발하다 / 마경덕
입술이 붉은 여자였다. 막 벙글은 입술에 숨이 턱 막혔다. 까치발을 하고
입을 맞추었다. 농익은
웃음에 뼈가 삭아내렸다. 손에 손에 꽃을 쥐고 나를 부르는, 그 몸에 깊이
빠지고 싶었다.
가만, 꽃그늘 속에 한 사내를 품고 있다. 똬리를 틀어 목을 죄고 아무일
없는 듯 태연하다. 사랑에
눈 먼 사내 제 목을 내주고 잠잠하다. 사내의 몸을 휘감고, 꼭대기로
치달은 그곳, 허공에 빠진
가녀린 발이 간당간당 바람에 흔들리고. 디딜 데 없는 허공에서
그녀는 폭발한다.
절정이다.
능소화를 밀치니 거기 어둠이 한 토막, 환한 꽃덩굴 아래 죽은
나무 한 그루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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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서있는 키가 큰 꽃나무를 보았다. 말리서도 눈이 부셨다. 능소화였다.
능소화가 또아리를 튼
뱀처럼 나무를 친친 죄고 있었다. 독을 가진 꽃, 꽃독이 오르면 눈이 먼다는 꽃,
그런데 꽃은 마음이
달뜨도록 곱다. 나무는 꽃그늘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 능소화를 밀치니 거기 어둠이 한 토막 서있었다. 환한 꽃덩굴 아래
죽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다.
찔레와 능소화 / 마경덕
능소화 한 그루 담 밑에 심지요. 서슬 푸른 찔레 곁에 심지요. 찔레는
고인 봄을 울컥울컥 게우느라
제 가랑이 새로 바람 드는 걸 모르지요. 만삭인 몸을 앓느라 제 발 밑을
모르지요. 몸 풀고 한가한
그때 곁이 보이겠지요. 꽂아 두면 눈트는 쇠심줄 찔레, 발등 밟고 오른
능소화를 밀쳐내고 싶겠지요.
붉은 꽃잎에 가시를 디밀며 시샘도 하겠지요. 아니요. 이건 미련한
사람 생각이지요. 꽃빛에 취해
능소화를 사랑할지도 모르지요. 어린 능소화를 들쳐업고 담벼락 끝에
올라서서, 사람 사는 꼴 다
보여줄지도 모르지요.
푸아그라* / 마경덕
배부른 한 끼를 위해, 한 접시의 쾌락을 위해, 당신의 즐거운 크리스마스,
그 하루를 위해, 경건한 새해
첫날을 위해
꽥꽥 깔대기 물리고 금속 튜브를 목구멍 깊이 박았어요.
드르륵드륵 기계음이 들리고 깔대기로 냅다 먹이가 쏟아졌죠. 꽥꽥
도리질치는 목을 집게로 묶던 손이
목에 걸린 음식을 훑어 내렸어요. 억센 손이 호리병같은 목을 잡고
쭉쭉 훑었어요, 순간, 질긴 끈으로
쓸모없는 내 모가지를 묶고 싶었죠.
터진 자루처럼 점점 나를 닫을 수 없었죠. 비대하게, 그리고 뒤뚱뒤뚱
야위어갔어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퉁퉁 간덩이가 부었어요.
미식가인 당신, 에펠탑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푸들을 껴안고 있군요.
알맞게 데워진 볕이 식탁 은빛
포크에 반짝 부딪혀요. 소문난 동물애호가인 당신, 희고 보드라운 긴
손가락은 푸들의 등을
어루만져요.
방금 좁은 상자에서 속성으로 길러낸 살찐 간이 도착했어요.
자, 드세요
내 고통은 충분히 발효 되었죠.
*푸아그라(foie gras)
프랑스어로 '살찐 간(fat liver)'이라는 뜻. 프랑스의 3대 요리 중 하나로
크리스마스와 연초에 먹는
음식이다. 거위나 오리에게 강제로 사료를 먹여 기름진 지방간을
만든 뒤 이를 요리 재료로
사용한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6년 3- 4월호)
대추, 혀가 풀리다 / 마경덕
제 몸에 불을 지른 대추. 쪼글쪼글 사지가 졸아든다 벼랑 끝에
가부좌 틀고
한 계절 묵언에 든 수행자(修行者). 화두를 쥔 단단한 사리 한 알
중심에 박혀
있다. 바람과 천둥이 비껴간 천신만고 나뭇가지, 뜨거운 침묵에
나무가 휜다.
설설 끓는 대추. 더듬더듬 말문이 트이고 시름이 녹는다 걸쭉한
눈물이 쏟아
진다. 뭉근히 달인 대추차 한 잔. 오래 삭힌 말씀이 달다.
아버지의 금시계 / 마경덕
아버지 모처럼 기분이 좋으시다. 노란 금시계를 내밀며, 이거 봐라.
오늘 집에 오다가 횡재했다.
십만 원짜리를 삼만 원에 샀다. 허어, 이 비싼 걸 그리 싸게 주다니.
검게 그을린 팔뚝에 금시계
눈부시다. 주름진 손에 금시계 반짝인다.
싸구려 도금시계. 얼마 못 가 맥기칠 벗어질 조잡한 금시계를 아버진
도무지 모르신다. 술 한 잔에
보증 서주고 집 날리고 친구들에게 봉이라고 불리는 세상 모르는 아버지
그러고도 아직 남을
믿는다. 칠이 다 벗어져 거뭇거뭇한 아버지. 며칠 후 멈춰버릴
시계를 믿는다. 길에서 처음 본
시계장수를 믿는다. 오늘 참 고마운 사람을 만났어, 어허, 이 비싼 걸…
시선 (2007년 여름호)
화환(花環) / 마경덕
뭐야. 줄이 안 맞잖아. 앞줄 고개 좀 숙여. 분홍이는 제 자리도 몰라?
얼른 이층으로 올라가.
장미야, 향수 좀 뿌려. 화장도 안하고 여태 뭐 했어? 머리꼴이 그게 뭐야.
니들 정말 안 웃어?
한 시간만 무조건 웃으라니까.
둥글게 꽂힌, 1 2 3.
누가 1이니? 2는 또 누구야. 시간 없어. 대충 대충 서. 순서가 어딨어.
옷? 흰옷 밖에 없냐고?
기가 막혀. 국화야, 짧은 치마는 왜 찾니? 향수는 왜 뿌려. 웃겨 정말 .
제발 좀 울어. 사흘만
활짝 울라니까. 분무기를 디밀자 꽃들이 뚝뚝 눈물을 떨어뜨린다.
죽은 꽃이 죽은 자를 조문하러
달려간다.
한 시간용 웃음 3개, 72 시간용 울음 2개
꽃집 남자는 주문 받은 3단짜리 웃음과 울음 사이를 부지런히 오간다.
'우리시' 8월호
지루한 영화 / 마경덕
미안해, 어젯밤엔 필름이 끊겼어. 전화 한 통화에 그를 다시 편집했다.
영화는 비극적이었다.
해피엔딩은 진부해. 멋진 라스트신을 꿈꾸며 책을 끼고 안경을 쓰고
영화관에 갔다. 텅 빈 머리를
모자로 감추고 다녔다. 팝콘은 왜 먹는 거지? 그가 투덜거렸다.
영화가 시작되면 코를 골았다.
스크린 속에서 벙어리 여자가 수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한마디도
못했는데 영화는 끝이 났다.
그렇지, 확 자빠지는 거야. 감독의 손짓에 그 밑에 깔렸다.
나는 조연이었다. 발 밑이 어두웠다.
등을 붙들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그를 믿었지만 가끔 낯설었다.
불빛 흐린 스크린위로
찬바람이 불었다. 듬직한 그의 등뒤로 피했다. 이봐, 넌 바람막이야.
감독이 소리쳤다. 온몸으로
바람을 막았다. 등은 자주 깜박였다. 더 쥐어짜!. 감독은 성질이 급했다.
나를 쥐어짜 기름을
부어주었다. 등이 쓰러져 불이 붙었다. 발등이 타들어 가는데 그만
대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감독은 여전히 닦달했다. 나를 바짝 태웠다. 눈물에 그을음이 묻어
나왔다. 관객들이 하품을 했다.
그만 끝내! 객석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그는 한방에 나를 걷어찼다.
컷! 라스트신은 완벽했다.
필름은 모두 삭제되고 싸늘한 등 하나만 남았다. '첫사랑'은 서둘러
종영되었다. 지루한 멜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