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25
이성을 실종신고합니다.
경제학은 궁극적으로 선택을 다루는 학문이다. 어떤 경제정책이든 동전의 양면처럼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머리를 덮으면 발이 시리고 발을 덮으면 머리가 시리다. 감세와 증세의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급격한 최저 임금인상은 취지와는 달리 소득분배와 고용에 있어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편한 잠을 자게 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 한정된 재화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강화한다. 한 개의 빵으로 오천 명의 배를 채우려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없는 한 신도 어쩔 수가 없다. 남보다 더 큰 빵조각을 얻으려면 경제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분배를 두고 하는 원론적인 이야기다.
같은 값이라도 단팥 속이 꽉 찬 찐빵을 고르기 위해서는 맛집을 검색하고 발품을 팔아야 한다. 먹고 나서는 별표를 붙이기도 한다. 빵을 만들어 파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침이 마르도록 선전하고 이웃 빵집과 경쟁해야 한다. 빵을 사는 사람이든 파는 사람이든 손해될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경제적 효익을 최대로 하기 위해 주어진 정보를 이용하여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전제가 주류 경제이론의 근간이다. 과연 인간은 합리적인 경제활동만을 추구하는 존재일까?
사람만큼 괴팍한 심성을 가진 생명체가 또 있을까 싶다. 합리적 의사결정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행동이 자주 관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 사회학, 생리학으로 접근하여 규명하려고 하는 노력이 행동경제학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대니얼 카너먼 교수다. 심리학자인 그가 2002년 노벨상 경제학상을 받음으로 행동경제학은 주류 경제학에 보조학문으로 편입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국세청이 일 년에 한 번씩 근로소득자의 유리 지갑을 스캔한다. 그동안 어림잡아 거둬들인 세금을 정산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이때를 13월의 보너스라고 말한다. 많은 근로자가 먼저 낸 세금을 환급받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세금을 돌려받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소득세를 적게 낸 사람은 미납세금을 소급하여 내야 한다. 누구는 보너스를 챙겨 싱글벙글 인데 먼지 나는 지갑을 털어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화딱지가 난다.
2015년에 발생한 연말정산 소동은 인간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 잘 보여 준 사례다. 당시 상당수의 근로자가 13월의 보너스는 고사하고 세금폭탄에 분노를 터트렸다. 년 중에 적게 거둬들인 근로소득세를 정산하였던 것이지만 납득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동안 적게 낸 근로소득세의 이자분 만큼 이익을 본 셈인데도 말이다.
정부는 「2013년 소득세법 개정」을 통하여 교육비, 의료비, 보험료 등 기존의 소득공제 항목을 세액공제 항목으로 전환하였다. 연말정산 대란은 여기에 간이세액표를 개정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새로 고친 주된 내용은 그동안 근로소득세를 많이 거두고 연말정산을 통해 돌려주던 방식에서 적게 거두고 적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전환한 거였다. 이러한 두 가지 조치의 효과가 2015년 초 연말정산에서 근로소득세추가징수로 나타났다.
납세자들의 비난이 들끓자 정부는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2015년 4월 「연말정산 보완대책」을 발표했다. 총 5,500만 원 이하 급여자의 평균 세 부담을 줄여주는 방안이었다. 이러한 조치로 2013년에 약 32.4%까지 떨어졌던 과세미달자 비율이 48% 수준으로 높아졌고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납세의 의무를 진다”는 국민 과세주의는 후퇴하였다.
밥 사주고 뺨 맞은 정부가 허둥대던 모습은 여론에 굴종하는 정부의 나약함을 여실히 보여줬고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포퓰리즘에 의해 쇠퇴한다는 본보기가 되었다.
연말정산 시즌이 돌아왔다. 먼저 낸 세금을 환급받으면서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분명 환급액의 이자분 만큼 손해를 봤지만, 모두가 공돈이 생겼으니 싱글거리고 어떤 이는 적금을 타는 기분이라고 신이 날 것이다. 이만하면 카너먼 교수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이유는 충분하다.
이성의 화살은 제아무리 멀리 날아도 결국, 감정의 연못에 빠진다. 인간을 희노애락으로 인도하고 때때로 왜곡의 늪으로 잡아당기는 감정의 연못은 생을 다하는 날까지 잠수해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흰 머리카락 길이만큼 맹목의 연못은 깊어진다. 사람을 논리로 설득할 수 없는 이유는 태생이 머리보다 가슴이 더 크기 때문이다.
대선을 앞두고 패를 지어 싸움질이다. 합리적 비판은 실종되고 이성은 펄 속에 처박혀 온데간데없다. 내 편이기만 하면, 어떤 쓰레기도 훌륭한 건축자재다. 진흙탕 싸움에 찬물을 부어줄 집단은 보이지 않는다. 학자의 자질을 상실한 폴리페셔들은 진영논리에 갇혀 광대 짓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사람의 감정은 대개 진실과 거짓이 동거할 때 거짓의 편에 선다고 한다. 진실은 불편하지만, 거짓은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진실은 자신을 비판하지만, 거짓은 나를 변호한다. 진실은 쓰지만, 거짓은 달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말정산을 하면 보너스를 받을지 돈을 게워내야 할지 잘 모른다. 환급을 받으면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아무리 안경을 고쳐 쓰고 봐도 연못을 가로질러 과녁이 보이지 않으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날개 없는 화살이 떨어질 바에 사랑이란 진흙이 찹쌀풀처럼 끈적거리는 연못에나 빠졌으면 좋겠다. 성현들의 가르침을 받자면 삶은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얼마나 사랑했느냐로 성패를 결정한다고 하지 않는가.
임인년은 검은 호랑이해라고 한다. 백호는 봤지만, 흑호가 실제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질 못했다. 설 전인데도 그사이 몇 번 떡국을 먹었다. 목불에 내려앉은 먼지만큼도 사랑을 무겁게 들어 본 적이 없으니 검은 호랑이를 만날까 무서운 게 아니라 검은 도포를 걸친 염라대왕이 슬슬 무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