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게 해 주마
양상태
일기 쓰는 숙제가 걱정되는 방학. 방학이 시작되면 누나하고 나는 줄곧 외갓집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내가 큰 방 시계 밑에서 태어난 곳이기도 하며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성장한 곳이다.
고샅에서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들리면 나는 보물찾기에 바빠졌다. 닳아 쓸모가 없어진 고무신, 깨진 쟁기 날, 빠진 머리카락, 비료 부대 등을 마루 밑에 들어가 빠른 동작으로 꺼내어 가위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엿장수 아저씨는 흰 고무신보다는 검정 고무신과 흰 머리카락이 많은 머리카락 뭉치는 엿을 적게 주었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주는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엿판에 도끼 모양의 정을 대고 가위로 비껴치면 엿은 먹기 좋을 만한 크기로 떨어졌다. 울릉도 호박엿이라 했다. 호박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믿거나 말거나 했다.
시골에서의 오일장은 언제나 나에게 희망을 듬뿍 안겨주는 명절과 같은 날이었다. 그렇다고 장돌뱅이는 아닌데 말이다. 동네 어귀에 있는 저수지 둑에서 장에 가셨다가 ‘센베이’, ‘오코시’를 사서 들고 돌아오시는 할머니를 황새 모가지보다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기다리는 것은 지루한 즐거움이었다.
시오리 길을 걸어 오일장에 가셔도 팥죽 한 그릇 사서 드시지 않고 돈을 아껴 공부 잘하라고 용돈으로 주셨다. 할머니께서는 유독 소고기와 토마토를 그리고 추어탕을 매우 좋아하셨다.
여름에는 토마토를, 가을에는 추수를 마치고 논에 딸린 우물물을 퍼서 잡은 미꾸라지를 가마솥에 가득 끓여 이웃과 나누어 드셨다. 겨울이면 계란을 넣은 소고기 장조림을 해두시고 끼니때마다 주셨다. 화로에 들기름을 발라 구운 해우와 같이 주시면 조금씩 찢어 가면서 아껴 먹었다.
여름철 논에서 잡은 참게와 고춧잎을 고추 장독에 푹 담아 놓으셨다가 꺼내주시는 고추 참게 장은 지금 어느 곳에서도 맛보기 힘든 내 평생 최고의 반찬이었다. 이 순간에도 입 안에 침이 고이고 있다.
처마 밑에 고드름이 병풍을 두르는 겨울밤, 국어 교과서 표지에 나오는 놋쇠 화로 위에 가래떡과 칼집을 낸 생밤을 올려 구워 먹던 그때가 그립다. 지금도 고속도로 정안휴게소에 들르면 구운 알밤을 꼭 사게 된다. 그 시절이 아직도 나를 놓아 주지 않는다.
외갓집 큰 방에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이 마실을 와서 늘 한방 가득하였다. 평소에는 심심한 입을 놀리기 위해 곶감을 만들고 남은 감 껍질과 생고구마를 깎았고 동지섣달에 먹어본 쥐꼬리 무의 파란 윗부분은 알싸하면서도 달았고 “끄르륵끄르륵” 소화도 잘되었다. 고구마를 찐 날이면 부엌 시렁에서 가져온 사기그릇에 얼음이 쩍쩍 달라붙은 동치미를 퍼서 상위에 얹으면 그릇은 썰매를 탔다.
동네 제삿날을 모조리 기억하는 ‘남촌댁’은 밤이 깊어지면 소쿠리를 들고 제사 집에 단자를 다녀와 음식을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머리에는 동백기름을 발라 참빗으로 곱게 빗어 말아 올려 은비녀를 꽂으시고, 큰외삼촌 서울 유학 시절, ‘화신백화점’에서 사신 핸드백을 앞세우고, 오일장에 갈 때나 신던 흰 고무신을 깨끗이 닦아 신고 군산에 살고 있는 우리 집까지 찾아오셨다. 학교 문턱은커녕 학교가 없어 다니지 못한 무학이었다. 글씨를 모르셔도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남원에서 기차를 타고 이리 역 지하도를 지나 3번 홈에서 군산선으로 갈아타시고 물어물어 찾아오시던 할머니. 항상 나무라시기만 하는 어머니 앞에서는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 주셨다. 시골로 돌아가시는 날에는 가시지 못하도록 고무신을 가방에 넣고 학교에 가면 새 신을 사서 신고 가셨다.
기르던 황소가 고삐 풀려 날뛸 때면 장독대로 가서 항아리를 깰까 봐, 대밭으로 가서 발이라도 다칠까 봐, 부지깽이 들고 필사적으로 막아섰던 할머니. 설날이 다가오면 줄무늬 내복을 쌀과 맞바꾸어 사주시고 여름에 천렵을 갈 때도 챙겨 주시던 할머니.
창호지 한 장 사이로 방안에 둔 요강이 얼어붙고 문고리가 쩍쩍 달라붙는 깊은 겨울날, 쇠죽을 퍼 와 손등의 때를 밀어주시던 할머니. 잠잘 때 젖가슴을 누나와 나에게 사이좋게 하나씩 내어 주시던 할머니.
“할미가 죽으면 잘 살게 해 주마.”라고 늘 말씀하시던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