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잠
내 팔베개로 그대를 잠재울 수 있으련만
아늑한 땅처럼 쉬이 안을 수도 있으련만
닿을 길 없는 항구로 머얼리 눕는 애인아
바다같이 숨 쉬는 내 옹근 가슴으로 오라
길은 널직해서 네 혼이 쉼직하다
창포꽃 수북히 피어 있는 내 냇가로 오라
아롱아롱 별들의 숨결도 들이마시고
그대만의 호젓한 잠으로 빠져들라
애인아!
새푸른 오월의 향기 그늘 아래 편히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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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타지 말고 무릎 꿇어라, 시여
세상 올라타려 하지 말고 정중히 무릎 꿇어라 시여
수많은 여자를 올라타 보았다고 기고만장하게 떠들어대는 사내에게 나는 그가 여자를 올라타기 전에 무릎부터 먼저 꿇었을 것이라고 고쳐 말해 주었다 그 사내처럼 얼마나 세상 올라타려고만 했는가 시여 풀꽃 한 송이의 향기를 맡기 위해서도 무릎 꿇고 허리 숙여야 하거늘 바람둥이 사내처럼 얼마나 힘만 쓰려했는가, 시여 이제 네가 만나는 모든 것들 앞에서 정중히 무릎 꿇어라 무릎 꿇지 않고는 올라탈 수 없다 무릎 꿇어야 세상 오르가슴으로 황홀케 하는 성깔 난 뚝심도 나오는 법이다 올라타지 말고 부드럽게 무릎 꿇어라 시여
날랜 사랑
얼음 풀린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봄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나 스러져 너 빛나리
사랑아, 내 비록 새벽 찬 서리 되어
들국, 네 꽃잎 위에서 잠깐 반짝이다가
또 스러지는 것으로 네 빛깔 더욱 빛나고
네 향기 더 먼 데까지 드날릴 수 있다면
이 가을 다하도록 내 뜨거움 그렇게 시리게 부서져
네 꽃잎 위에 내린들 이 아픔 그 누가 눈치채리
네 꽃잎 위에 눈물 몇방울 남긴들 네 자태 왜 생생치 않으리
냄비보살 마하살
허름한 시골 함바집 나무식탁 위 처억 이름 모를 냄비가 앉았다
간 검은 궁둥이 자국을 본다 손으로 쓸어보지만 검댕은 묻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바쁘고 속이 타도 궁둥 걸음밖에 할 수 없었을
어떤 아낙의 모습 선연하다
눈물 나게 뜨거워 달아났다가도 가슴 시리면
다시 그 불판 그리워 엉덩이부터 들이댔을
서러운 조강지처 평생 끓이느니 제 속이요,
쏟느니 제 창자였을 저 아낙의 팔자는
어느 사주에 적혀 있던 걸까 팔만사천 번 찌개를 끓였어도
죄다 남의 입에 떠 넣고 빈 입만 덩그라니 웃었으리라
번쩍번쩍 윤이 나던 시절도 있긴 있었을라
귀가 떨어져도, 옆구리가 찌그러져도, 발에 채여도
한사코 뜨거운 국물을 내밀었으리라
어쩌면 더 이상 뜨거운 국물도 담을 수 없는 개밥 그릇이 되었을라
개밥이 말끔히 비면 한 줄금 맑은 소낙비를 가슴에 담았다가
창공을 운행하는 달과 별과 철새의 모습을 비추어도 보았을라
어쩌면 이제 개밥 공양도 마치고
어느 고물장수를 따라가 주물공장에서 다비식을 치렀을지도 모를 일
함바 집 아낙이 새 냄비를 내어온다
검은 궁둥 자국의 후취가 분명하다
반짝반짝 노란 웃음 빛나는 새댁이 수줍게 검은 궁둥 자국 위에
포개어 앉는다 나는 문득 그 새댁의 앞날이 서글퍼
신문을 개어 만든 방석 위에 앉힌다
허름한 시골 함바집 나무식탁 위 처억 이름 모를 냄비가 앉았다 간
검은 궁둥이 자국을 본다 손으로 쓸어보지만 검댕은 묻어나지 않는다
토룡부인傳
며눌아,
눈을 가리니 부러운 것이 없고,
귀를 막으니 두려움이 없고,
코를 낮추니 욕심이 없더라
손을 버리니 사치가 없고,
발을 버리니 조급함이 없고,
뼈를 버리니 골다공증이 없더라
삐뚤어도 한 일 자로 살아왔다
바닥을 하늘로 섬기고,
어둠을 꽃으로 삼고,
흙을 떡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나는 평생 이 땅을 삼켜
여의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순간,
두엄을 뒷발로 헤치던 어미 닭이
늙은 시어미를 탁 찍어 올리니,
올봄 한배 내린 열두 노란 병아리 떼가 쫑쫑쫑...
먹은 죄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고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대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속의 일들이다
까치집
망치도 없고 설계도도 없다
접착제 하나 붙이지 않고, 못 하나 박지 않았다
생가지 하나 쓰지 않고 삭정이만 재활용했다
구들장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지만
성근 지붕 새로 별이 보이는 밤이 길다
앙상한 겨울나무의 심장 속으로
주머니난로 같은 까치 식구들 드나든다
까치집 품은 나무는 태풍에도 끄떡없다 한다
까치들이 똑똑해서 튼튼한 나무만 고른다지만
나무들이 둥지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티는 것인지도 모른다
맑은 노래도 들려 주고, 벌레도 잡아 주는
까치가 고마워서 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여름엔 나뭇잎으로 그늘을 만들어주고,
겨울엔 낙엽을 떨구어 햇살이 들게 해 준다
나무와 까치는 임대차 계약도 없이 행복하다
뼈다귀해장국에 대하여
몸이 먼저 아픈 것이 사랑이다
그대, 갈비뼈 같은 애인을 만나거든
시장 골목 허름한 밥집으로 가라
세상이 다 버릴 것 같았던 뼈에
우거지 덮어 불룩해지는 뚝배기 속을 보라
뼈는 입김을 뿜어 그대 얼굴 뜨겁게 만질 것이다
마음이 벼랑 같아 오금을 접고
캄캄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정강이뼈 쓸어안아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보잘것없는 뼈마디 하나가
얼마나 뜨거워지는 것인지 모른다
뚝배기 두 손을 모아 감싸는 경배
그 손바닥 가득 번지는 것이
몸을 다하여 그대 만나려 하는 뼈의 몸짓이다
그래서 뼈는 뜨거운 것이다
한때 나도 세상의 등골을 빨아먹으며 산 적이 있다
무슨 짐승인지도 모를 뼈를 발라내며
뜨거운 신음을 숟가락으로 퍼 먹으면서
몸속 가득 뼈를 숨겨놓고 살 냄새 풍긴 적 있다
그대, 갈비뼈 같은 애인을 만나거든
뜨거운 눈물에 뼈를 먼저 적셔라
뼈아픈 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진국이다
야트막한 사랑
사랑 하나 갖고 싶네
언덕 위의 사랑 아니라
태산준령 고매한 사랑 아니라
갸우듬한 어깨 서로의 키를 재며
경계도 없이 이웃하며 사는 사람들
웃음으로 넉넉한 사랑 하나 갖고 싶네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의 사랑 아니라
개운하게 쏟아지는 장대비 사랑 아니라
야트막한 산등성이 여린 풀잎을 적시며
내리는 이슬비 온 마음을 휘감되
아무것도 휘감은 적 없는
사랑 하나 갖고 싶네
이제 마를 대로 마른 뼈 그 옆에 갸우뚱 고개를 들고 선 참나리
꿀 좀 핥을까 기웃대는 일벌 한오큼 얻은 꿀로 얼굴 한번 훔치고
하늘로 날아가는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가슴이 뛸 만큼 다 뛰어서 짱뚱어 한 마리 등허리도 넘기 힘들어
개펄로 에돌아 서해 긴 포구를 잦아드는 밀물 마침내 한 바다를 이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