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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蒸發
1
늘 그렇듯이 김현은 아니 김아모스는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이제 환갑을 앞둔 얼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화장실 평면거울 앞에 김아모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섰다. 거울 속에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것은 바로 두 눈이었다. 늙어가는 한 뼘의 얼굴에 단단하게 박힌 두 개의 보석은 몹시 어둡고 반짝거렸다. 늘 정해진 순서나 절차는 없었지만 김아모스는 먼저 얼굴을 씻었다. 한 번도 트집 잡지 않고 단 한 번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던 습관에 순응하듯이 씻었다.
그 다음에는 물 묻은 두 손에 비누칠을 여러 번하여 손바닥에 돋아난 비누거품을 면도할 부분에 발랐다. 하룻밤 사이에 자라난 수염은 제법 꺼칠꺼칠하였다. 면도날은 비누거품 속에 숨어 있는 짧은 수염들을 사정없이 잘라냈다. 흐르는 수돗물에 면도기를 들이대자 검은 재가 뿌려진 비누거품은 빠르게 씻겨 내려갔다.
현(現)이라는 이름을 달아준 아버지는 목사였고 아버지가 사랑했던 자는 아모스였다. 아버지의 책상 앞에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는 성구가 달라붙어 검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눈을 감으면서 이제부터는 현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모스라고 부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해 겨울 아모스는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2년간 중국에서 선교사로 지내다 지난 3년 전 중국공안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오니 차이나선교협의회에서 아모스를 불렀다.
독신으로 살아온 김아모스는 밤마다 입안으로 두꺼비 한 마리가 들어와 잠자다 사라지는 묘한 생각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선교사라는 특별한 소명을 위해 결혼을 포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가난한 목사의 아내로 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결심한 것이기도 하였다. 중국의 선교지에는 두꺼비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한 마리가 김아모스를 따라온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피스텔 10층에서 바라본 서울은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곧 사라질 새벽의 어두운 기운은 얼음조각들이 담긴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처럼 오래 버티지 못할 세계였다. 또다시 습관적인 행동이 하나둘 반복되면서 김아모스는 오피스텔을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손에 든 검은 가방은 늙은 아모스가 들고 다니기엔 제법 묵직해 보였다. 어쩌면 늙어갈수록 가방에 들어갈 것들이 더욱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늙은 손이 붙잡아야 하는 것은 공수래공수거라는 한줌의 무게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지만 김아모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하강하는 기계소리는 중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들었던, 방적기계소리와 비슷했다. 아무리 굵은 빗소리가 들려도 방적기계소리는 조금도 작아지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방적공장과 가까운 건물에서 살았기에 김아모스는 여공들이 공장 앞마당에서 작업복에 달라붙은 실낱들을 떼어내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지하주차장에서 출발한 자동차는 오피스텔 정문을 향했다.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 김아모스는 오피스텔 정원에 서 있는 목련을 보았다. 새하얀 꽃잎들은 잠든 나비들처럼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있었다. 정원에는 떨어져 흩어진 녹슨 날개들이 허다했다.
나비효과에 대하여 알고 있는 자들은 많았지만 나비시간에 대하여 알고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김아모스가 중국에 있을 동안 시간에 대하여 나름대로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도달한 것이 바로 나비시간이었다. 선교사들 안에서 중국을 C국으로 명하는데 아직은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펼칠 수 없는 국가로 통하기에 그렇게 불렀다.
중국 요녕성(辽宁省) 환인(桓仁)에서 주로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하였는데 선교사라는 호칭보다 학원 강사로 활동하였다. 방적공장과 가까운 허름한 건물을 학원으로 사용하면서 한 달에 단 한 번뿐인 늦은 밤 10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6시까지 중국에 흩어져 있는 가정교회의 신도들을 불러 모아 신학강좌를 열었다. 깊고 깊은 오지(奧地)에서 찾아온 신도들은 대부분 성경지식도 없이 신앙을 유지하고 설교를 하였다. 믿음의 깊이와 열정은 깊고 뜨거웠지만 원시기독교와 다름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신학강좌가 끝나면 깡마른 체구의 신도들은 더 가르쳐 달라고 애원했다. 눈물을 흘리며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헤어지는 순간이면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중국어 성경책과 중국어로 번역한 신학서적들을 그들에게 선물했다.
김아모스는 학원 옥상에 올라 머나먼 오지를 향해 걸어가는 중국 신도들을 바라보곤 하였다. 그리고 옥상에 피어있는 꽃들 사이를 나풀거리며 날갯짓하는 나비, 청띠신선나비를 보았다.
시간의 흐름은 한 마디로 나비가 나풀거리며 날갯짓하는 그 몸짓과 유사했다. 나비의 나풀거림이 곧 시간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빠르지 않고 느리지 않은 나비의 나풀거림은 바로 시간과 닮은꼴이었다. 똑딱하는 1초라는 시간과 나비가 날갯짓하는 단 한 번의 나풀거림이 너무도 똑같았다. 때로는 급상승하기 위해 이해할 수 없는 날갯짓을 펼치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나비는 시간의 흐름과 동일한 날갯짓을 하였다. 꽃에 앉아 날개를 펼쳤다 접었다하는 그 몸짓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은 너무도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시간이라는 것이 날개를 펼쳤다 접었다하는 것 같았다.
2
오전 6시 30분경 차이나선교협의회 센터에 도착한 김아모스는 3층 건물 맨 꼭대기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낡은 건물이면서 규모가 작은 편이라 엘리베이터는 원래부터 없었다. 늘 계단을 오를 때마다 숨이 가빠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1층은 식당과 작은 예배실 그리고 6대 정도의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2층은 선교사들을 양성하는 즉, 중국, C국 선교지로 보내질 선교사들을 교육하는 세미나실들과 작은 도서관 그리고 숙박시설이 있었다. 3층은 C국으로 들어간 선교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통괄하는 동시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필요한 물품과 서적들 그리고 생활비 및 선교사들을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사무실이 있었다.
3층 구석진 한쪽 공간에 마련된 김아모스의 사무실은 센터장의 공간이라고 하기엔 수많은 책들이 꽂혀있는 서재와 비슷했고 한편으로는 기도실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대답이었다. 3층 사무실에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들어온 젊은 간사를 비롯하여 센터가 세워지는 순간부터 10년 동안 사무실을 지켜온 노처녀도 있었다. 중국선교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열정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신성한 일터였다.
김아모스는 자신의 책상에 앉는 순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였다. 자신보다 중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오늘 하루 동안 하나님의 보호와 선교사들의 안녕을 기도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이 보내온 기도제목들을 펼쳐놓고 하나하나 기도에 매달렸다. 중국 공안이 가짜 신자를 이용해 선교사의 포교활동을 적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기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는 내용도 있었다. 김아모스 자신도 포교활동이 적발되어 추방령을 받았었다. 한 중국소년이 김아모스가 선교사라는 사실을 중국 공안에게 알렸다. 중국소년은 공안으로부터 우리 돈으로 10만원을 받았다. 그 소년은 김아모스에게도 병든 아버지 때문에 병원비가 필요하다면서 10만원을 빌렸었다. 기억들은 축적되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퇴색되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경험은 기억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기억들이 사라지려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경험과 뒤엉킨 기억은 종종 꿈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였다.
기도를 끝마친 김아모스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한영성경책을 펼쳤다. 하루도 빠짐없이 행하는 말씀묵상의 시간이었다. 누가복음 24장 13절부터 35절까지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김아모스는 31절의 말씀에 잠시 멈추었다. 두 제자들이 자신들과 대화하고 있는 자가 예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예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부분에서 김아모스는 한글과 영어문장을 번갈아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왜 예수는 자신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예수는 자신을 알아본 제자들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을까.
김아모스는 묵상하는 가운데 중국에서 추방되었던 그날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여러 부분이 상당히 퇴색되어버린 기억이었지만 그날의 감정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기내(機內)에 앉아 한없이 흐르던 눈물이 김아모스의 기억을 쓰다듬고 있었다. 추방령은 더 이상 중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중국입국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난관에 봉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수는 두 제자가 자신을 알아보는 순간 순식간에 증발하였다. 김아모스는 중국을 알게 된 순간 순식간에 추방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김아모스는 중국 공안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던 기한이 만료되어 있었다. 이제는 자유롭게 중국으로 들어갈 길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오전 7시쯤이 되자 김아모스는 검은 가방에서 자신의 다이어리를 펼쳤다. 중국에서 두 번째로 맞이한 춘절기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김아모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아들에게 알리지 말하고 신신당부하였다. 그래서인지 김아모스의 다이어리는 펼치는 순간 어머니의 증명사진이 꽂혀 있었다. 신혼부부시절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찍은 흑백사진이었다.
하루의 일정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된 일정표에는 오전 10시 S대학교에서 ‘중국선교의 역사’라는 강의가 잡혀있었고, 오후 2시에는 한국세계선교협의회에서 각 선교단체에서 중국선교를 맡고 있는 전문선교사들과 중요한 모임이 있었다. 그리고 오후 5시에는 H교회에서 한 선교저널의 편집위원으로 모임이 있었다. 그리고 오후 7시 30분에는 H교회에서 가까운 혜화동에서 부산의 대형교회 목사와 저녁식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부산에서 올라오는 목사는 교회재정의 절반을 선교사역에 사용하고 있었다. 일정표에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이 빽빽한 일정으로 채워져 있었다.
김아모스는 다이어리에 꽂혀 있는 어머니의 증명사진을 잠깐 눈여겨보는 순간 오래된 과거의 문고리를 건드렸다. 삐걱거리는 과거의 문을 열자 그곳에는 백열전구가 밝혀진 부엌이 드러났다. 젊은 아낙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팔팔 끓어오르는 기름에 흰 솜을 담갔다. 그리고 노르스름하게 축축해진 흰 솜을 젓가락으로 집어 잠시 식히는 듯하다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집어넣고 꽉 다물었다. 젊은 아낙은 치통을 잠재우기 위해 민간요법을 실행 중이었다. 어머니는 치아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치료받은 적은 없었다. 밤사이에 이빨이 빠진 아이는 그 희고 작은 이빨을 손에 들고 이른 새벽 부엌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뽑아내려고 하여도 뽑아지지 않는 투명한 가시가 바로 과거의 기억들이었다. 투명한 가시가 박혀 있는 곳은 시간과 맞닿아 있는 의식의 한 부분이었다. 그 투명한 가시를 건드릴 때마다 과거의 기억들은 더욱더 새록새록 자라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분명해졌고 아버지의 그림자는 더욱더 어두워졌다. 증명사진 속에 들어 있는 어머니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마치 흰 목련꽃, 순백의 여자였다.
김아모스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끄집어냈다. 전원을 연결하고 모니터를 킨 후 화면 구석진 자리에 처박혀 있는 ‘아모스’라는 문서파일을 열었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교사는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중국땅에 아낌없이 피와 눈물 그리고 땀으로 뒤엉킨 인생의 씨앗을 심은 사무엘 브랜드(Samuel Brand)이다. 그는 중국의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귀주성(貴州省) 위녕현(威寧縣) 석문감(石門坎) 일대에서 묘족(苗族)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의 중국명은 하늘의 떡이라는 천지고(天之糕)였다. 1985년 당시 귀주성 서기로 임명된 후진타오(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귀주성에 부임한 이튿날 사무엘 브랜드와 석문감의 소문을 듣고 간부들을 데리고 석문감에 방문하고자 하였지만 길이 험하여 위녕까지만 도착하였다가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내 가장 외지고 미개했던 서남묘족의 부흥은 중국의 지도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참으로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일이지만 사무엘 브랜드는 하루아침에 실종되었다. 아니 실종이라고 하기보다 증발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마치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늘로 올라간 에녹이나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처럼 그는 사라졌다. 그를 찾기 위해 그의 가족들과 선교사들 그리고 그를 따랐던 묘족인들이 거의 수년간을 찾아 헤맸지만 그가 남겨 놓은 유품들 즉, 금간 안경, 너덜너덜해진 성경, 수십 권의 일기장, 낡은 의료서적들, 기독교로 개종한 묘족인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담긴 문서들, 그리고 약품들이 들어 있는 나무로 짠 함, 애지중지하면서 읽었던 서적들, 그리고 그가 찍었던 수십 장의 흑백사진들이 전부였다.
이 글은 1887년 1월 23세에 중국내지선교회 선교사들과 중국땅에 들어와 1905년 가을 그가 실종되기까지 그가 남긴 유품들을 토대로 한 자 한 자 기록한 글이다. 나는 이 글에서 사무엘 브랜드를 존경하고 사랑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들을 나열하는 동시에 그가 선교사로서 살아오는 동안 한 인간으로서 느껴온 내면의 일기를 공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3
늙은 손가락들이 미세한 소리를 내며 키보드를 누르고 있는 동안 김아모스는 사무엘 브랜드가 사역하던 석문감(石門坎)을 헤매고 있었다. 녹음이 우거진 산들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사발을 뒤집어놓은 듯한 거대한 바위산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 흐르는 희뿌연 안개, 그것은 마치 거대한 얼굴을 더듬는 영혼의 손길과 같았다. 왜 이러한 곳까지 들어와 사는가, 하고 묻는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위대한 자연과 하나가 된 세계 속에서 물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존이라는 것도 한낱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짙은 황갈색 피부의 오지인들은 생존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자연의 일부로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인식시키는 것은 이방인 선교사의 몫이었다.
‘천지고, 사무엘 브랜드가 기록한 일기장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을 보면, 즉 1887년 1월 3일 영국에서 출발한 선상에서 그는 아주 이상한 구름을 보았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구름은 마치 바람의 손에 마술을 펼치는 것 같았다. 그 급변하게 변모하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그는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선상에 서 있는 자신의 마음속에도 동일한 마술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밤, 그는 잠들기 전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삶을 살게 해달라고 그는 간절히 기도했다. 그가 쓴 일기를 보면 <나는 이제 목사의 아들도 아니며, 은행원도 아니며, 그리고 넋없이 방황하거나 순간순간 변모하는 구름도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중국땅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살 것입니다. 나를 꼭 붙잡아 주소서.>’
누군가 사무실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어느새 시간은 오전 8시 30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김아모스는 잠시 작업을 멈추고 지금까지 써놓은 문장들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김아모스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아모스는 “예”라고 짧게 말했다. 늘 변함없이 일찍 출근하는 이 간사가 들어왔다. 노처녀라는 꼬리표가 달라붙은 이 간사였지만 그의 일처리는 누구보다도 분명하고 확실했다. 이 간사의 한 손에는 물건이 쥐어져 있었다.
“어제 늦게 도착했습니다. 중국 요녕성에서 보내온 것입니다.”
국제우편물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보내는 주소와 받는 주소 란에는 전부 한자로 써 있었다. 유구만, 아니 유요한 선교사가 보낸 우편물은 A4용지만한 크기로 제법 묵직했다. 우편물을 개봉하자 밀봉된 편지 한 통과 두꺼운 노트 한 권이 드러났다.
보내는 주소 란에는 ‘OO學院(학원)’이라는 한자와 ‘柳求滿(유구만)’이라는 한자이름이 써져 있었다. 받는 주소 란에는 ‘차이나선교협의회’라는 명칭은 생략된 채 영문 주소와‘Kim Hyun’이라는 영문만 쓰여 있었다. 사실 선교지에서 서울로 우편물을 보내는 적은 없었다. 가급적 이메일을 통하여 연락을 취하는 동시에 급한 상황에는 전화를 사용하였지 직접 선교지에서 서울로 우편물을 보내는 것은 금기시해 왔었다. 편지를 개봉하자 김아모스와 동갑인 유요한 선교사의 필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검정 볼펜으로 꼭꼭 눌러쓴 편지지는 김아모스가 받아 본 어느 편지지보다도 무거웠다.
‘이 편지를 받아보는 순간 나는 중국이 아닌 북녘땅 고향에 있겠군. 자네에게 미안하네. 자네를 대신하여 이곳까지 들어왔는데 일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이렇게 힘든 일만 남겨놓았으니. 신학교시절부터 난 자네에게 늘 도움이 되지 못했어. 그러나 이렇게 편지와 일기장이라도 보내야 내가 왜 북녘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알릴 수 있을 것 같았네.
정말 미안하네. 자네보다 한 달 일찍 태어났지만 늘 철없는 짓만 벌려놓는 신세군. 신학교를 졸업하고도 세상에 빠져서 방황하던 나에게 자네는 새로운 사명을 주었어. 선교사, 난 선교사가 될 자격이 없는 놈이야. 자네를 속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속인 자가 바로 나일세. 친구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자는 성경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네…….’
김아모스는 편지를 다 읽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국 요녕성 환인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유구만은 아니 유요한은 김아모스의 신학교 동창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 친구였다. 김아모스는 그동안 서랍 속에 잠재워 두었던 여권을 끄집어냈다. 여권을 펼치자마자 중국 공항 입국 심사국에서 찍은 새파란 스탬프들이 마치 낙인처럼 김아모스의 가슴을 지져 대기 시작했다.
4
유구만이 실종 아니 증발한 날짜는 압록강이 서서히 해빙(解氷)하는 시기였다. 유구만의 고향은 북녘땅 자강도 강계시로 중국 요녕성 환인에서 버스로 서너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에 비행기에 오른 김아모스는 유구만이 보낸 두꺼운 노트를 펼쳤다.
‘중국은 분절된 화살과 같았지만 자본주의의 봉합으로 제법 놀라운 화살이 되었다. 화살촉은 금빛에 뒤덮여있고, 화살몸통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뒤섞어 놓은 채 제법 곧고 단단하고, 화살의 방향을 좌우하는 날개라고 할 수 있는 꼬리부분은 중국의 부푼 꿈처럼 그 어떠한 바람에도 조금도 굽히지 않을 만큼 부드러우면서도 완고하다. 과연 이러한 화살이 어디까지 날아가고 또한 어디에 꽂힐지 사뭇 궁금하다.
검은 고양이가 옥상에서 발견된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오래간만에 올라와 본 옥상인지라 눈에 보이는 것은 낯선 풍경들이었다. 태어난 지 한 달 정도가 되었을까. 주먹만 해 보였지만 야무지고 앙칼스러웠다. 화분들 사이에 숨어 들어가 나를 바라보는 모양이 꼭 자그마한 전사 같았다.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린 고양이에게 먹을 거라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섯 명의 선교사들이 아침식사를 마친 식탁은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한쪽 벽에 서 있는 냉장고를 열자 250ml짜리 우유 한 개가 있었다. 아침마다 마시는 우유인지라 누군가 마시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우유로 입을 축였다. 숯덩이 같은 고양이가 우유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수 있다면 순식간에 흰 고양이로 바뀔 것 같았다.
“선교사님, 그거 제 건데요.”
23살의 젊은 김 선교사가 양치질을 하면서 묘한 발음으로 말했다. 내가 우유를 냉장고 안에 집어 넣으려하자 김 선교사는 입안에 든 흰 거품을 싱크대에 뱉으며 말했다.
“선교사님 드세요. 내일 아침 선교사님 우유는 제 것입니다.”
“미안하네. 아주 가엾은 녀석이 있어서 좀 실례하겠네.”
그렇게 하여 우유를 들고 옥상에 오른 나는 화분들 사이에 숨어 있는 검은 고양이에게 우유를 통째로 주었다. 개봉된 우유에 머리를 집어넣고 핥는 모양이 며칠을 굶은 것 같았다. 그 칠흑 같은 숯덩이를 조금이라도 쓰다듬어 주려고 가만히 손을 대자 어린 고양이는 우유팩에 머리를 집어넣은 채 날카롭게 반응했다.
20평 정도의 옥상은 대부분 화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김아모스가 이곳에 머물면서 장만한 화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화초들 하나하나에 정이 갔다. 이름을 알 수 있는 화초도 있는가 하면 이름을 전혀 알 수 없는 화초들도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규칙적인 기계소리가 제법 가까이 다가왔다. 곳곳에 세워진 빌딩들도 보였지만 옥상에서 가깝게 보이는 곳에는 과거의 흔적들이 드문드문 뒤섞여 있었다.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 부분들이 너무도 빠르게 변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득 신학교를 졸업하였지만 교회 전도사로 나아가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방황이라고 하기보다 내 가슴이 정해진 길로 들어서는 것을 승낙하지 못했다. 잘못 들어선 길도 아닌데 내 발걸음은 어느새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난 갈 수 없어요.”
겨울바닷가에 매섭게 불고 있는 찬바람과 씨름이라도 하듯이 나는 악을 쓰며 소리쳤다. 어깨까지 닿았던 머리카락은 미친 듯 춤을 추었다. 해변 모래사장에 찍힌 발자국들은 단조로운 것보다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검은 고양이가 들어가 쉴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었다. 라면 종이상자 한쪽 벽에 조금 큰 구멍을 내고 상자 안에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버리려고 하였던 옷을 깔아놓았다. 녀석의 화장실로 사용될 흙이 든 플라스틱 통도 상자 옆에 놓아두었다. 녀석의 이름은 너무도 쉽게 정해졌다.
‘나비’
지금껏 살아오면서 고양이를 부르는 이름은 언제나 어디서나 나비였다. 참으로 중독성이 강한 이름이었다. 거꾸로 하면 ‘비나’ 그리고 ‘비나이다, 비나이다’라는 어디서 들은 듯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나와 늘 가까이 있었던 누군가가 고양이를 부를 때마다 말했다.
‘나비야.’
비와 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도록 상자 위에 비닐을 덮고 날아가지 말라고 화분으로 양끝을 눌러 놓았다. 열려진 우유팩을 상자 바로 앞에 놓아두었다. 검은 고양이의 입가가 희게 변했다.
여관으로 지어진 3층 건물을 학원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자는 제안을 내놓은 자는 김아모스였다. 1층은 두 반으로 나누어 영어를 가르치는 교실들이 있었고, 2층은 선교사들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고, 3층은 제법 큰 식당과 부엌 그리고 작은 창고가 있었다. 거의 3층은 휴게실 및 친교실로 활용되는 동시에 성경을 읽거나 독서를 하는 독서실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3층에는 대형 냉장고가 있었는데 냉장고 안에는 음식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간식거리들이 들어 있어 냉장고는 쉴 틈 없이 열렸다 닫혔다.
배가 통통해진 검은 고양이가 상자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3층으로 내려왔다. 3층에는 한국에서 의사를 하다 소명을 받아 선교사가 된 이현수가 식탁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었다. 이 선교사는 40세를 넘었고 한국에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중국에 와서 머리염색을 한 번도 하지 않은 탓에 머리가 희끗희끗하였다. 이 선교사가 읽고 있는 책은 서울에서 아내가 보낸 <고통이라는 선물>이라는 신앙서적이었다. 나는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신문을 펼쳤다. 신문도 서울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내온 것이었다.
“의사가 신생아를 매매하다 공안에 잡혔다는 기사가 나왔어요.”
이 선교사는 중국어를 잘하는 편이라 중국에서 발행되는 조간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다.
“저는 중국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한쪽 날개가 없이 태어난 새라고 할까?”
이 선교사는 펼쳐 놓은 책을 덮으며 말했다.
“그런 새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까요? 아니면 한쪽 날개를 달아주어야 할까요? 중국인들은 한쪽 날개를 달아주어도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날갯짓할 거예요.”
나는 신문에 새겨진 검은 글자들을 한 자 한 자 읽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가치가 있을까요? 한쪽 날개가 없는 새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두 손으로 품어 주는 것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과연 이런 것이 가치가 있을까요?”
나는 신문 광고를 바라보았다. 한 작은 표범이 값진 시계와 눈부신 보석 사이에서 가슴을 바닥에 붙인 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린 표범의 두 눈은 몹시 반짝거리고 있었다.
“김아모스 선교사가 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선교사지만 중국어도 잘 모르고 중국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습니다.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늙었다는 것, 남들보다 오래 살았다는 것입니다. 김아모스 선교사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절망과 고통보다도 더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은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과연 죽음에도 가치가 있을까요?”
값진 시계와 화려한 보석보다도 어린 표범이 더 아름답고 눈부셨다.
밤 11시경, 김 선교사가 데리고 온 한 중국인은 불청객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는 3박 4일 동안 긴 여행을 통하여 막 도착한 자였고,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돈이나 먹을 것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그토록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온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갈증과 배고픔이었다.
짙은 갈색의 얼굴에 박힌 두 눈은 몹시 냉정하고 날카로웠다. 그는 시골농부에 불과하였지만 5명의 신자에게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가정교회 목사였다. 나의 손을 꼭 잡으며 악수하는 그는 조금도 지친 표정이 없었다. 우리는 그에게 늦은 저녁식사를 제공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어깨에 멘 배낭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냈다. 비닐봉투에 들어 있는 굳어진 몇 덩어리의 떡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끼니를 채우면 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것은 마치 완고하게 굳어진 신념이며 신앙 같았다. 하나님에 대하여 공부하러 왔는데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듯 보였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내일 아침에 마셔야 할 우유 하나를 끄집어냈다. 나는 우유를 개봉하여 그가 앉아 있는 식탁 위에 놓았다. 그는 굳어진 떡을 씹으며 우유를 마셨다. 어느새 그의 입가는 희게 변했다. 그는 옥상에 있는 검은 고양이 같았다.’
5
김아모스가 유구만의 일기장을 읽으며 중국 대련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밤 10시 20분경이었다. 대련공항을 뒤덮은 어둠은 김아모스에게 그리 낯설지 않았다. 3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갔지만 두 눈에 보이는 어둠은 김아모스의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었다. 입국심사를 무사히 마치고 공항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을 때 김아모스는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택시를 줄기차게 따라 달라붙은 자동차는 김아모스가 하룻밤을 묵을 호텔 앞에서 멈추었다.
김아모스는 환인에 있는 김 선교사와 전화 통화를 나눈 뒤에야 샤워를 하고 잠잘 준비를 하였다. 김아모스는 가방에 든 노트북을 끄집어내 인터넷과 연결시킨 후 이메일을 확인했다. 서울에서 보낸 이메일 중에는 저녁 7시 30분에 약속되었던 부산 모교회의 목사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다는 내용도 있었다. 김아모스는 유구만의 일기장을 펼쳤다.
‘그의 이름은 오성순(吳性純)이었다. 그는 잠들기 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거의 10분 정도를 기도에 몰입했다. 그의 행동은 참으로 경건했고 한편으로는 경외감을 느끼게 하였다. 모처럼 이 선교사와 한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선교사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나는 침대에 누워 창가에서 들리는 옅은 기계소리를 들었다. 방적 공장은 가끔씩 밤을 새면서 기계를 돌리곤 하였다.
“오늘밤도 여지없이 기계는 돌아가는군요.”
캄캄한 방안에 유일하게 여과된 빛이 달라붙은 곳은 창문이었다. 창문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방적 공장 마당에 서 있는 가로등에서 시작된 빛이 커튼에 물들어 있었다. 이 선교사는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제가 어렸을 때 저의 누님도 공장에 다녔습니다. 먹고 살려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늦은 밤 공장에서 돌아온 누님이 지친 표정으로 저의 머리를 쓰다듬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참 오래된 기억이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그 기억들이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다니 신기할 뿐입니다.”
이 선교사는 어두컴컴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컴컴한 천장이 과거를 바라볼 수 있는 통로처럼 보였다.
“이 선교사는 훌륭한 의사였을 것 같아요? 지금도 그때가 생각나지 않나요?”
나는 캄캄한 천장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과거는 어둠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세계 같았다.
“처음은 좋았어요. 그러나 돈이 커지면서 의사라고하기보다 돈에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지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다 김아모스 선교사님을 만났고 지금 여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창가에 머물고 있는 옅은 빛과 기계소리는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마치 여름에 내리는 눈처럼 그렇게 보이고 들렸다.
“전공분야는 무엇이었습니까?”
캄캄한 천장에서 떨어진 눈송이가 내 눈동자에 닿자마자 녹아 사라졌다.
“예, 소아과 전공이었습니다.”
수많은 눈송이들이 꽃잎처럼 하염없이 추락하였다.
이른 아침 옥상에 올라가보니 오성순이 검은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검은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의 손에는 우유를 들고 있었다. 어린 생명은 어미의 품이라도 안긴 것처럼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오성순은 나를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나도 어설프게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어색한 인사가 오갔다. 짙은 갈색피부에 깡마른 체구와 조금 흰 피부에 통통한 체구 사이에 오가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오성순에게 우유를 내밀었다. 오성순은 한 손으로 우유를 받아 쥐고는 “씨에씨에”를 연달아 토해 놓았다.
오성순과 유일하게 완벽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는 이현수와 박길현 선교사였다. 이 둘은 서울에서 중국선교훈련을 마친 자들이 환인에 도착하면 지금까지 배워왔던 훈련보다 더 생생한 현장중심의 훈련을 실시했다. 이현수와 박길현은 의사 출신들로 누구보다도 헌신적이었다. 그리고 23세의 젊은 선교사인 김수영과 동갑인 윤준석은 행정 및 사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윤준석은 컴퓨터와 기계설비 및 보일러를 아주 놀라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이들에 비하여 나는 사실적으로 하는 일은 없었다. 이들은 나를 정신적인 지주로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리 영적이거나 정신적으로 탁월한 존재는 아니었다.
1층 학원운영은 이현수와 박길현이 무료로 중국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학원에 모이는 아이들의 숫자는 들쑥날쑥 하였다. 간식이 준비된 자리이기에 아이들 가운데는 간식만 챙기고 공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6
대련에서 단둥까지 약 4시간이 걸렸다. 단둥에서 점심을 먹었다. 다시 버스에 오른 김아모스는 오후 5시가 되어 목적지인 환인에 도착했다. 환인은 오래된 역사의 성터를 비롯하여 분묘와 왕릉 속에서 거뜬히 작은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버스터미널에는 한국에서 과거의 흔적들을 찾으러 온 관광객들이 눈에 띄었다. 3월 말의 환인은 곳곳에 푸르른 가로수들과 드문드문 핀 꽃들이 시간의 경계 사이를 더듬고 있었다. 압록강은 속 시원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리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김아모스는 택시를 잡아탔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변한 것은 사람들일뿐 낯선 풍경들은 아니었다. 김아모스는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다 때때로 과거의 기억들과 마주쳤다. 한 사내아이가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기억들은 너무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약 10분 정도를 달린 택시는 낡은 건물들과 새로 지은 건물들이 뒤엉켜 있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방적 공장 입구에서 젊은 여공들이 빠져나오는 모습도 보였다. 봄옷이라고 하기보다는 가을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여공들은 집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식당을 찾아가고 있었다.
김아모스가 학원 건물로 들어가자 사방에 희미하게 잠재되어 있던 어둠의 색깔이 점점 짙어졌다. 계단을 밟으며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소리 내며 영어를 공부하고 있는 가난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김아모스의 발걸음을 잡아챘다. 2층은 고요했다. 각각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는 순간 김수영 선교사가 김아모스를 보았다.
3층 식당에 앉아 김수영과 윤준석은 김아모스에게 유구만의 실종을 설명했다. 유구만이 실종된 것은 3일 전이었다. 한 달 전부터 유구만에게 이상한 외출이 빈번해졌다. 주중국한국대사관에 실종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말도 나왔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는 쪽으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김아모스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김수영과 윤준석에게 기도하자는 말과 함께 두 눈을 감았다. 기도가 끝나자마자 제법 큰 검은 고양이가 식당 탁자 밑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검은 고양이는 유구만이 키우던 고양이라고 김수영은 말했다. 고양이 목에는 이름표가 걸려 있었는데 蝶(접, 나비)이라는 한자어가 새겨져 있었다.
‘나비에게 이름표를 달아주자 이상하게도 고향생각이 저절로 다가왔다. 환인과 고향 사이에는 압록강이 빠른 유속(流速)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고향은 다다를 수 없는 곳이었다. 환인에 들어온 지 2년 반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압록강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나비가 된다면 가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북한군이 되어 전장에서 전사하였다. 그리고 나와 똑같은 날에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인 동생을 두고 나는 월남하였다. 그때 내 나이는 8살이었다. 작은 아버지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작은 아버지는 친분이 있던 한 목사님에게 나를 맡기고 다시 북으로 올라갔다. 어머니와 동생을 데려올 것이라고 말하면서 북으로 올라갔다. 동생의 이름은 유구형이었다.
나비에게 익은 생선의 부스러기를 주면서 그 검은 빛깔의 목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비는 아침마다 자신에게 음식을 주는 인간에게 서서히 길들여져 갔다. 압록강이 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일어난 것은 바로 나비의 목을 어루만지면서 일어났다. 그 따스한 검은 털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면서 손끝에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고 온몸에 향수(鄕愁)가 퍼졌다. 참으로 이상한 감정이었고 강한 충동이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왔지만 막상 무엇부터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환인에 대하여 아는 것이란 오래된 무덤들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관광지라는 것과 압록강을 건너면 고향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압록강 쪽으로 달려가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뒤섞인 것은 바로 과거의 고향과 현재의 나였다. 그것은 너무도 뒤엉켜있어 어디에서부터 풀어헤쳐야 할 지 막연하였다.’
유구만의 일기장은 날짜가 없었다. 단순한 기록일지 모르지만 곳곳에 유구만의 두 눈으로 바라본 사실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어느 곳에는 유구만의 심장이 박혀있는 곳도 있었다. 유구만은 잠시 목회의 길을 떠났던 시절에는 문학에 심취했었다. 김아모스는 유구만에게 중국선교를 소개했을 때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 선교지는 어디일까?”
유구만은 김아모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김아모스는 몹시 반짝거리는 유구만의 두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난 북한이 마지막 선교지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았어. 선교사의 사명은 새로운 선교지가 발견된다면 곧바로 그곳으로 떠나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
유구만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
“북한도 우리의 선교지임은 분명하지만 지금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은 선교가 아니라 순교가 맞을 거야.”
김아모스는 유구만의 두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김아모스는 그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3층 창문으로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어둠의 실체들이 거리 곳곳에 차곡차곡 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학원건물을 바라보며 서성거리는 한 사람이 가로등 불빛에 드러났다.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다 가까운 곳에 세워둔 자동차로 들어갔다. 김아모스는 식탁에 앉아 기도했다. 3년 전 과거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김아모스의 기도를 불투명하게 물들였다. 김아모스는 마지막 기도로 유구만을 위해 기도했다.
‘압록강 앞에서 처음으로 떠오른 것은 아버지였다. 떠내려가는 검정고무신을 잡으려고 강물로 뛰어든 아버지는 물고기처럼 날렵했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는 울고 있었다. 압록강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어머니도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동생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던 모습도 너무도 빠르게 흘러갔다. 시간과 강물은 너무도 닮아 있었다.
학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한 작고 허름한 술집에 들어가 맥주 한 잔을 마셨다. 오래간만에 마신 맥주라 입안에서 압록강 물을 마신 것처럼 시원하면서도 진한 향수(鄕愁)가 녹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나는 나를 보았다. 과거와 현재가 뒤엉켜 있는 나를 보았다. 나는 술에 취한 것처럼 나를 향해 걸어갔다.’
유구만의 일기장은 유구만 자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자신을 닮은 존재와 마주치는 순간 유구만은 지독한 과거에 취했다.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울 앞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이 유구만의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피를 토하고 있었다. 입을 한 손으로 막아보았지만 손가락들 사이로 붉은 피가 새어나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초췌한 모습, 낡아빠진 옷차림, 초점을 잃은 눈동자……. 나는 피 묻은 손을 윗옷에 쓱 닦았다. 그리고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나에게 물었다.
“누구쇼?”
나는 담배연기 속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닮았네.”
내가 비시시 웃으며 말했다.’
유구만이 실종 아니 증발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한 소년이 학원에 들어왔다. 한마디로 거지행색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소년이었다. 학원에 가면 먹을 것을 준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소년이 움직일 때마다 지독한 냄새가 풍겼고, 나비는 소년의 발목에 난 상처를 핥았다. 소년은 고양이가 자신의 상처를 핥아주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누구도 어루만져 주거나 약을 발라주지 않은 소년의 상처를 고양이는 핥고 핥았다. 김아모스는 소년에게 먹을 것과 상처에 약을 발라 주었다.
소년은 음식을 먹고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한 후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소년이 깨어나면 입을 옷도 소년의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소년은 몹시 깊은 잠에 빠졌다. 김아모스는 소년이 벗어놓은 냄새나는 옷가지들을 버리기 위해 집어 드는 순간 옷가지들 속에서 무엇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몹시 낡은 듯한 작은 지갑이었다. 지갑 안에는 북한에서 사용하는 인민증과 한 늙은 여자의 증명사진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에는 유구만과 김아모스가 밝게 웃고 있었다. 인민증의 주인은 유구형이었다. 유구형은 유구만이 태어난 날짜와 동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