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소 대원 박을문(울산 옥동중 2년)-홧팅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시 이원규
-곡/노래 안치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 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 노을을 품으려거든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불일 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면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시라
최후의 처녀림 칠선 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 만 오시라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 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 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참고-유래및 전설 정리]
성삼재
삼한시대에 마한군에 밀리던 진한왕이
전란을 피하여 지리산 심산 유곡으로 찾아들어
달궁 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피난할 때,
북쪽 능선에 8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팔랑재,
서쪽 능선은 정 장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므로 정령재,
동쪽은 황 장군이 맡아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그리고 남쪽은 가장 중요한 요지이므로
성이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케 하였으므로
성삼재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노고단(老姑壇,1,506m)
노고단은 지리산의 3대 주봉 중 하나로서
종주 능선상의 서쪽 기점을 이루고 있으며 등행 교통의 요지로서
화엄사,천은사,만복대,피아골,뱀사골 등
등행코스는 모두 이곳을 경유하게 된다.
노고단 정상은 길상봉이라 불리며
정상에서 완만한 경사가 서향으로이루어진 30만평의 넓은 고원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은 옛날 신라시대부터 지리산의 산신 선도성모를 모시는 남악사가 있었던
민속신앙의 영지로서 성모신을 국토수호의 성신으로 받들어
나라에서 해마다 봄.가을이면
중사의 예로서 국태민안과 시화연풍을 비는 제사를 모셔 왔으며
그 유풍은 신라,고려,조선의 삼조에 걸쳐 전승되어 왔다.
노고단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구례군 고유의 민속 명절인
곡우절(매년 4.20일),약수제 민속제전도 이에서 유래하며,
노고단이라는 명칭도
지리산 신령인 선도성모를 마고 할미로 존칭하여 부르게 된데서 연유한다.
신라시대에는 이곳이 화랑들의 심신 수련의 도장으로 이용되었으며
과거일제 30여년 동안
유럽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이 50여 동이나 있었던곳으로서
한여름에도 차가운 샘이 솟고,기온이 서늘하며 고원의 경관이 아름다워
동양 제 1의 피서지로 유명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별장이 모두 불타버려
별장을 노고단 서남능선 약 15Km지점의 왕시루봉(해발 1,231m)으로 옮기게 되었다.
특히 봄 철쭉 여름 원추리 가을 단풍 겨울 설화의 아름다운 경관은
모두 노고단을 지상 낙원으로 꾸며 주며,
그 주위에는 종석대,관음대,집선대,문주대,청연대,만복대등 명승지가 둘러 서 있다.
그리고 가끔 남해에서 운무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날이면
갑자기 구름 바다가 운평선을 이루는 노고운해의 장관을 이루는데
이경관은 지리산의 10경중의하나로 손꼽는다.
돼지평전 & 임걸령(林傑嶺)
마치 포근한 엄마 품을 연상시키는 반야봉이
돼지평전 억새밭 너머로 떠받쳐 있는데
'돼지평전'이란 어원은
마늘모양의 원추리 뿌리를 멧돼지들이 종종 파먹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돼지평전을 지나면 진달래 군락이 다시 한 차례 나타나다가
싱그러운 초원지대인 잘룩한 능선안부를 거치게 된다.
어렵지 않게 구상나무, 잣나무숲으로 들어서면
피아골계곡으로 빠지는 임걸령 삼거리가 나오고
평탄한 숲길을 따라 얼마 안가 임걸령 샘터가 이어진다.
조선 명종(明宗) 때의 초적두목 임걸년(林傑年)의 이름에서 유래된 임걸령(林傑嶺)은
아늑하면서도 맑은 물이 솟아 야영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임걸년에 관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지만
이곳에 진을 치고 군사와 말을 길렀다고 하는데
실제로 임걸령 부근에서는 마구와 활촉 등이 발견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임걸령 샘터에서 피아골 쪽 암벽 밑에는 황호랑이 막터라는 곳이 있다.
옛날 약초꾼 황장사가 겨울에 이곳에서 자다가 기발한 지용(智勇) 을 발휘하여
큰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피아골
피아골은 지리산의 관문인 노고단의 등너머서
섬진강으로 향하는 물줄기가 동남쪽으로 깊이 빠져나간 큰 계곡이다.
6.25동란 직후 피아골이란 영화 작품이 나왔던 탓으로
흔히들 동란 때 이곳에서 동족상잔의 피를 많이 흘려
피아골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으나
그것이 아니고 오랜 옛날부터 불려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이름이다.
그 어원을 살펴보면 옛날에 속세를 버리고 한적한 이곳 선경을 찾은 선객들이
이곳에 오곡중에 하나인 피를 많이 가꾸었던 연고로
자연히 피밭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
그후 점차적으로 그 발음이 피아골로 전화된 것이라 한다.
지리 10경 피아골 "직전단풍"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사람은 단풍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조선 시대 유학자 조식 선생이 한 말이다.
피빛 보다 붉다고 하는 지리10경 중 하나로 꼽히는 직전단풍은
피아골 입구 직전부락 일대의 단풍 절경을 일컫는다.
피아골은 이러한 단풍 절경 때문에 단풍 산행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잠룡소, 삼홍소, 통일소, 연주담, 남매폭 등 자연미 뛰어난 소와 담,
폭포가 연이어져 있어 여름 계곡 산행으로도 인기가 있다.
산도 붉고(山紅) 물도 붉게(水紅) 비치며, 사람도 붉게 물든다(人紅)하여
삼홍(三紅)의 명소로 친다.
온 산이 붉게 타서 산홍이고, 단풍이 맑은 담소에 비춰서 수홍이며,
그 몸에 안긴 사람도 붉게 물들어 보이니 인홍이라고 해서
옛부터 삼홍의 명승지라 일컬어 왔다.
피아골 단풍 포인트
피아골 단풍은 연곡사로 부터 주릉을 향해 40여리에 이어지지만
그 가운데 직전부락에서 연주담 - 통일소 - 삼홍소 까지 1시간 거리 구간이
특히 빼어나다.
노루목
노루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란 의미도 되지만
그보다는 반야봉의 지세가 피아골 방향으로 가파르게 흘러내리다
이곳에서 잠시 멈춰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암두(岩頭)를 이루고 있어서 노루목이라 부른다고 한다.
노루목 전설
걸어나오는 산 이야기는 화개면 정금마을 '노루목'에 얽힌 전설로서
지리산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오던 중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어느 요망한 여자가
"산이 걸어나온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지리적으로 고정불변의 존재인 산이 들판(세상)을 향해 걸어나왔다는 것은
바로 산의 생명성과 능동성, 지향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지리산의 모성적 토대 위에서 자생력을 회복한 저항과 변혁세력이
새 세상을 꿈꾸며 들판을 향해 내려오던,
나아가 들판문화를 크게 위협하기도 했던 역사들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삼도봉 (三道峯)
전북ㆍ전남ㆍ경남 3도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1,533.7m의 삼도봉(三道峯)은
남원군 산내면 부운리 암봉(岩峯)으로 일명 날라리봉으로 적기도 한다.
지리산의 많은 봉우리 중에서 천박한 느낌을 주는 유일한 명칭이라 하겠다.
삼도봉의 바위 모양이 낫날 같다 하여 '낫날봉'이라 하던 것이
와전되어 '날라리봉'으로 되었다고 한다.
또 삼도봉 주위의 봉우리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어
처음 명명할 때 '나란이 봉'이었던 것이 '닐리리봉', '날라리봉'으로 변했다는
얘기도 있다.
삼도봉에서는 불무장등 능선과 피아골계곡이 내려다 보이고
건너편에 토끼봉이 복스럽게 걸려 있다.
화개재
경남과 전북의 경계지점 이기도한 화개재는
옛날부터 화개장터가 크게 번창한 탓에 그 지명이 화개재로 불렸다.
그런데 그 화개재의 지명이 지금은 이상하게도 "뱀사골 정상"이란
얼토당토 않은 지명으로 등장해 있다.
이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이정표를 세우면서
오랜 옛적부터 전해져 오고 있는 화개재 대신
"뱀사골 정상"으로 표기한데서 비롯됐다.
화개재에 얽힌 설화중 "운봉무더미"란 얘기가 있다.
운봉사람 소금장수 3대의 조상이
일흔살 나이에 화개에서 소금을 지고 운봉으로 넘어가다
화개재에 이르러 힘에 지쳐 소금을 진채 쓰러져 죽었는데
손자가 할아버지를 그 자리에 묻고 정성을 다해 큰 묘를 만들었다 한다.
화개재 언저리의 큰 무덤을 두고
그 소금장수의 무덤이라 해 운봉무더미라 부르고 있다.
이 설화에서 보듯 화개재는
해안지방의 소금이나 수산물과
내륙지방의 삼베를 비롯한 농산물을 서로 교역했던
삶의 고갯마루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뱀사골
뱀사골이란
1)이름의 유래는 뱀사골 계곡 초입에 있는 석실 건너편에
배암사란 사찰이 있었던 데 따른 것으로
배암사골이란 이름이 변하여 생겼다는 것이 일반적이 견해이다.
배암사 역시 정유재란 때 불타버리고 없는데,
이사찰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아 뱀이 많고 적은 것과는 무관하다고 본다.
2)지리산 반선에 관한 전설에 의하면,
옛날 뱀사골 입구에는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매년 칠월 칠석날 밤이면 주지 스님이 사라져
마을 사람들은 스님이 부처로 승천했다고 믿고 있었다.
서산대사가 이 소리를 전해듣고는
사람이 부처가 되어 승천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어느 해 칠석날 장삼 속에 비상(극약)주머니를 달아 주지 스님에게 입혀,
예년과 똑같이 독경을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윽고 새벽녘이 되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커다란 소리를 내며
큰 뱀이 송림사에 왔다가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이에 서산대사가 뱀을 따라 올라 가 보니
용이 못된 이무기가 뱀사골의 뱀소에 죽어 있어 뱀의 배를 갈라보니
주지스님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死)골이라고 하였고,
끝내 용으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를 일러 반선(半仙)이라 부르다,
어느 때부터인가 반선(伴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전설속에 등장한 송림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며
그 터에 전적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뱀사골은 용이나 뱀과 관련된 이름을 가진 명소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요룡대는 용이 머리를 흔들며 승천하는 모습을 의미하는 곳이며,
탁용소는큰 뱀이 탈피하여 용으로 변신하는 장소,
또 뱀소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던 곳을 뜻한다.
이밖에도 병 모양의 병소, 암벽이 병풍을 두른듯한병풍소,
산신제를 올리던 곳이라는 제승대,
소금장수가 소금가마니를 물속에빠뜨렸다는 간장소,
뱀사골의 상류 일대를 지칭하는 들돌골 등이 유명하다.
반야봉(般若峰,1,728m)
반야봉반야봉은 지리산 3대 주봉 중의 하나로
반야란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지혜를 뜻하는 말이니
지리와 이언동의로 상동하는 반야봉은
지리산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수려 장엄한 이산의 전경을 고루 한눈에 전망할 수 있으니
정상에서 바라보는 광대한 산세의 기상은 장산 거악임을 실감케하며,
반야봉에서 바라보는 낙조의 기관은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다.
정상에서 북쪽으로 약600m거리에 있는 반야봉의 북봉은
아름드리 구상나무 거목의 상록 원시림지대를 이루고 있어
창연한 경관속에 태고의 정적이 깃들어 있다.
반야봉 남쪽 중턱 경사진 고원에 군락하는 철쭉 꽃밭은
지리산에서 세석평전다음가는 철쭉지대로서 5월 하순경 꽃이 만발하면
이루 형언할 수 없는절경을 이룬다.
반야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금가면 절벽 아래에 묘향대가있다.
이곳은 옛부터 불도들이 수도하는 유적한 선암으로 유명하다.
세석평전(細石平田,1,400-1,714m)
세석고원은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다하여 옛부터 세석평전이라 일컬어 왔다.
세석고원의 최고봉인 촛대봉에서
서남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펼쳐지는 광활한 세석평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넓은 고원으로으로서
그 주위가12Km나 된다고 하며 상,중,하로 식물 분포지대가 구분되어 있다.
상층은 황량한 초원지대로서 지보초,좁쌀풀,산새풀 등
여러종류의 초생 종류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층은 철쭉이 군락하는 관목지대이며,
하층은 구상나무와 물참나무 즉 상록수와 활엽수가 혼유림을 이루고 있어
등고선별 식물생태의 자연분포를 나타내고 있다
촛대봉
촛대봉(1703미터)...봉우리가 촛대처럼 생겼대서 붙여진 이름이다
촛대봉은
옛날 옛적에 호야와 연진이라는 부부가 사이좋게 살았는데
이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기에 연진이는 효험이 있다는
음양수샘(영신봉 아래 영신대 밑으로 내려가면 있다)을 몰래 먹었는데,
곰이 이걸 산신령에게 일러 바쳐
노한 산신령이 벌로서 호야는 멀리 쫓아버리고
연진이는 자갈밭 돌밭인 세석평전을 철쭉밭으로 바꾸라고 했다.
연진이는 손에 피가 나면서 힘들게 철쭉밭을 만드는데...
쉬는 동안에는 촛대봉에 앉아 호야가 오기 만을 기다리는데...
나중에는 기다리다 지쳐 촛대봉의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
장터목(場基項,1,650m)
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의 남쪽능선 고개마루를 장터목이라 부른다.
장터목은 옛날에 천왕봉 남쪽 기슭의 시천 주민과 북쪽 기슭의 마천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 장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데서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장터목 고개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오르면 제석봉
제석봉 정상은 넓은 고원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6.25동란 직후까지도 수천그루의 아름드리 구상나무 거목들이
원시림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하는데
자유당 말기에 파렴치한 인간들의 도벌로 인하여 그도벌을 숨기기 위해 불을 질러
애석하게도 그토록 울창했다는 수림은 사라지고
황량한 초원으로 변하여 앙상한 선골들이 암벽 기슭에 위태로이 나열하고 있는
고산지대의 특이한 선경을 감상하며 가파른 몇 개의 봉우리를 숨가쁘게 넘고 넘으면
천왕봉을 지키며 하늘과 통한다는 마지막 관문인 통천문에 이른다.
동굴 입구에 고색창연한 옛날 필적으로 '通天門'이란 대각자가
암굴 동문의 신비와 위엄을 더해주고 있는데
옛부너 부정한 자는 출입을 못한다는 전설이 있다.
천왕봉(天王峰,1,915m)
천왕봉은 지리산의 최고봉 천주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지리산의 웅대한 기상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천왕봉은 "수호신에게 제(祭)를 올리는 높은 산정(山頂)"이란 의미로
동서 남북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 거칠 것이 없는 천왕봉 정상에서의 전망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으며
특히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석양낙조의 기관도 좋거니와
새벽 동녘 하늘가에 끝없이 펼쳐지는 구름바다의 운평선에서 떠오르는
천왕봉 해돋이의 장관은
천지 개벽을 보는 것 같은 천하의 기간으로서 지리산 10경으 하나로 손꼽고 있다.
그러나 높은 천왕봉의 정상은 언제나 구름에 쌓여 있어 쾌청한 날을 만나보기 어려우니
예로부터 삼대적선을 한 사람이라야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는
해학적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음양수와 선비샘 전설
남부능선과 주능선이 만나는 지점에 음양수 샘터가 있다.
세석산장이 확장건립된 이후로 수량이 줄고 마르는 날이 많아졌지만
음양수 샘은 그 신비함에 옛부터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물로 인식되어져 왔던 샘이다.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음양의 조화로 흘러내리는 이 물을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소문 때문에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음양샘 주위에 몰려들어 기도를 드리곤 했다고 한다.
옛날 대성골에 호야와 연진이라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자유롭고 평화스럽게 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아무 부러울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오직 자식이 없다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어느날 곰이 찾아와 연진여인에게 세석고원에 음양수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이 물을 마시며 산신령께 기도하면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연진여인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홀로 이 샘터에 와서 물을 실컷 마셨는데
호랑이의 밀고로 노한 산신령이
음양수 샘의 신비를 인간에게 알려준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연진여인에게는 세석 돌밭에서 평생 철쭉을 가꿔야 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게 되었다.
그후 연진여인은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속죄를 빌다가 돌로 굳어져 버렸고,
아내를 찾아 헤매던 호야는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달려가다
산신령의 저지로 만날 수 없게 되자
가파른 절벽 위의 바위에서 목메어 연진여인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세석고원의 철쭉은 연진의 애처러운 모습처럼 애련한 꽃을 피운다고 하며
촛대봉의 바위는 바로 연진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한편 세석고원에서 서쪽으로 주능선을 따르다 보면 벽소령 못미쳐 선비샘이 나타난다.
옛날 상덕평 마을에 평생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한 노인이 있었다.
이 노인의 유언이 죽어서라도 사람대접 한번 받아보는 것이었는데
결국 아들들이 이 샘터 위에 무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뜰 때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므로
결과적으로 이 노인의 무덤에 절하는 격이 되게끔 하였다고 한다.
생전에 갖은 고생과 천대 속에서 화전민으로 살아온 한 노인의 애틋한 소망이
실제로 십여년전까지만 해도 실현되고 있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무덤도 안 보이고 샘도 파이프로 연결하여 서서 받도록 조처하였기 때문에
이 씁쓸한 전설은 잊혀진 얘기로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선비샘이란 옛날 선비들이 과거공부를 하면서
이곳에서 물을 떠마셨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칠선계곡
일곱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
지금은 돌과 모래 등으로 메워져
전설속의 선녀가 목욕했을 정도라고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초라하지만
일곱 선녀가 이 곳에서 목욕하는 것을 본 곰이
선녀들이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옷을 훔쳐 바위틈에 숨겨 버렸는데...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맬 때
사향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 있는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주어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곰이 바위틈에 누워있던 노루의 뿔을 나뭇가지로 잘못알고 선녀들의 옷을 숨겼던 것이다.
그 후 선녀들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노루를 칠선계곡으로 이주시켜 살게 하였으며,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아 버렸다는 전설
제석봉
지리산의 동쪽 천왕봉의 마고여신이
서쪽 반야봉의 남신을 무척이나 사모하여 자기한테 와주기를 기다렸으나
끝까지 오지 않기에 화가 나서 제석봉의 주목들을 모두 죽여버렸다는 전설...
토끼봉
토끼봉은 토끼가 많다거나, 토끼를 닮아서 통끼봉이 아니라
반야봉을 기점으로 동족, 즉 24방위의 정동(正東) 묘방(卯方)이라해서
토끼봉(卯峯)이라 부리며 정상부근에 지보초가 군생하고 있어 지보등이라고도 불린다
백무동
옛날부터 천왕봉은 우리나라 최고의 수호신의 대명사로
여기서 치성(기도)을 드리면 효과가 있다하여
많은 무당들이 모여든 곳이 "백명의 무당이 모여 들었다"는 백무동계곡이
바로 천왕봉 북서측 계곡이랍니다.
지리10경
1경 천왕일출
2경 노고운해
3경 반야낙조
4경 직전단풍
5경 벽소명월
6경 세석철쭉
7경 불일현폭
8경 연하선경
9경 칠선계곡
10경 섬진청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