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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염불선의 의의
염불선은 동아시아 대승불교를 넘어 인도불교의 수많은 경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불교수행의 근본적이며 중심적이고 보편적인 신행법이다. 때문에 청화는 염불선을 “종파를 초월한 가장 보편적인 행법”임을 밝힌다.62) ‘선정수행으로서 염불’이 석가모니 붓다 재세 시부터 제시되었던 것은 바로 경론에 두루 나타난다. 예를 들면, Vandana나 여래 9호, 사념(四念)이나 육념에 이어 대승의 염불관 등이 ‘선정수행으로서 염불’이 이미 내재되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 본래의 입장은 선종의 초조인 보리달마에 의해 동아시아에 충실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입사행론 의 자교오종(藉敎悟宗)이 불법의 대의(大義) 또는 정로(正路)로 천명되는 것이 그것이다. 후대 선종은 교(敎)와 선(禪)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아 또다시 애써 ‘선교일치’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염불선 전통은 보리달마로 시작하는 초기선종과 같이 교와 선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는다. 자교오종의 정신은 염불선에서 가장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2) 정토삼부경, p.11.
불교는 시대에 따라 본질을 잊어갈 때마다 끊임없이 이를 극복하고자하는 시대적 요청이 있어왔다. 이러한 점에 있어 청화의 염불선은 ‘우리시대의 요청’의 불교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원통불교라고도 규명되는 그의 불교해석과 입장은 간화선 일변도로 치닫는 한국불교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깔려있다. 불교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대응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염불선이었던 것이다. 염불선은 “모든 수법(修法)을 종합 포섭하였으며, 종파(宗派)를 초월한 가장 보편적인 행법(行法)”이라는 청화의 설명에서 원통과 순선이라는 용어사용의 배경이 나타나 있다.63)
63) 청화, 圓通佛法의 要諦 (곡성: 성륜각, 2003), pp.16-19.
왜 청화는 염불선인가? 다시 말해 그냥 염불이나 다른 불교수행법보다 깊은 선정의 염불선을 말하는가? 이는 염불선이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선불교의 입장을 떠나지 않는다. 이유는 그의 오랜 수증(修證)체험에 바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안거법어에서 그는 앎 자체로는 오랜 동안 습관성으로 된 집요한 업장을 녹일 수 없으며 이는 깊은 삼매 또는 깊은 선정으로 습관성의 집요한 업장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법문이 그것이다.64) 마찬가지로 장애와 번뇌단절의 힘과 함께 “우리가 깊은 삼매에 들어야 때 묻지 않은 무루지(無漏智)가 나오는데 무루지를 얻으려고 할 때에는 삼매에 들어가야 하고 삼매에 들려면 계율이 청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라 하여 깊은 삼매가 필요한 것은 무루지 발현임을 또한 들고 있다.65)
64) 청화, 안거법어 (서울: 광륜출판사, 2009), pp.49-50.
65) 청화, 圓通佛法의 要諦 (곡성: 성륜각, 2008), p.274.
왜 청화는 칭명염불을 ‘실상염불의 염불선’범위로 설명을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칭명염불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법문의 많은 곳에서 “가기 쉽고 닦기 쉽고 행하기 쉽지요. … 오직 아미타불을 놓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렇게 외워서 염불삼매에 드셔야 합니다.”등으로 칭명염불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염불선 차원으로 설하지 않는 이유는 가까이는 근대한국불교 유신론을 쓴 만해에 있어 개혁불교로 ‘염불당 폐지’를 주장했던 맥락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간다. 만해는 당시에 지나치게 타력구원적인 염불에 머물러 반야지혜와 불교의 체계적 이해로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신행풍토를 안타깝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달마의 이입(二入) 가운데 이입(理入)의 결여이다. 육조혜능과 청화염불선의 맥락으로 볼 때 일상삼매가 결여된 정혜쌍수와같은 조화와 균형의 불교가 아니라는 점이다. 청화는 염불선이 되려면 달마의 이입(理入)과 혜능의 일상삼매과 일행삼매와 같은 정혜가 전제된 염불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왜 청화는 칭명염불을 염불선 범위로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않나하는 문제는 이 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생심은 기복으로 흐르기 쉽다. 타력구원에 매달리는 맹목적이고 맹신적 신앙에 대해 반야지혜를 제시하는 차원이다. 이는 마찬가지로 칭명염불도 일사불란한 삼매로 들 수 있는 행법이기에 염불선으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청화와 역대 조사들의 적절한 답이 될 수 있다. 일사불란한 삼매는 일행삼매는 될 수 있어도 일상과 혜가 조화균형을 이룬 것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염불선 이해와 관련하여 ‘참구염불법’이라는 말이 적합한지, ‘염불참구법’이 적합한지 재고가 필요하다. 현재 혼용해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간화선전통에서 염불과 결합한 행법으로 “지금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念佛是誰]?”를 공안화한 선(禪)이 있다. 이때는 ‘염불로 수용된 참구‘가 아니라 ’참구로 수용된 염불‘이 ’염불화두법‘이다. 이는 개념상의 주종관계, 무엇이 꾸미는 말이고 수식을 받는 말인지에 문제이다. 염불이면 ‘참구염불법’이 맞겠고, 간화참구이면 ‘염불참구법’이 적당할 것이다. 수식하는 말이 무엇인지에 따라 중심의미는 달라진다. 어찌되었건 염불선이 되려면 이입(理入)의 일상(一相)이 무엇이냐가 무엇인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문제는 더러 이를 염불선이라고 포함시키는 시도가 있다. 하지만 ’염불화두법‘은 염불선이 아니라 간화선일 따름이다. 중심행법이 간화참구이지 일상(一相)의 염불이 아니기 때문이다.66)
66) 염불선이 간화선과 묵조선 등과 같이 독립적 위상으로 정립될 필요가 있다. 염불선만의 차별성과 독자성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밝혀지는 후속 연구가 있어야한다.
혹자는 ‘관념염불(觀念念佛)을 염불선이 아닌 것으로 설명하는데 그 이유는 관념염불의 범위로 사종염불 가운데 칭명염불을 제외한 관상염불(觀相念佛)과 관상염불(觀想念佛)이 들어있기 때문이라 한다. 오직 실상염불만이 염불선이라는 것이다. 원래 관념염불은 칭념염불 또는 구칭염불(口稱念佛)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이 점에 있어 청화는 칭명과 함께 두 관상은 모두 실상의 염불선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금강심론(金剛心論)을 바탕한 그는 이를 아직 실상에는 이르지 못한 ‘가행공덕(加行功德)으로써 가관적(假觀的) 일상삼매’를 말하고 있다. 즉 두 관상염불은 이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실상의 방편으로 염불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개념상의 구분[法相]이지 청화는 칭명과 두 관상 또한 모두 실상이 될 수 있다고 한다.67) 그렇기에 원통불교라 칭한 것이다. 나아가 개념상에 있어 관념은 금강심론 에도 나타나듯이 관(觀)과 염(念)으로 각각 일상과 일행을 나타내는 말이다. 청화 또한 이를 실상염불로 곳곳에서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68)
67) 청화, 正統禪의 香薰 (서울: 을지출판공사, 1989), p.122, “우선 관념 상내 본 바탕은 역시 부처고, 우주가 모두 … .”
68) 청화, 圓通佛法의 要諦 (곡성: 성륜각, 2003), p.294, p.296 등.
불교의 관념염불이 현재 일반에서 쓰는 ‘관념’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원래 불교의 전문용어인데 서양의 idea의 역어로서 차용된 말이다. 하지만 원래 이 말은 ‘관찰과 억념’의 염불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 즉 관념은 ‘진리 또는 부처님을 관찰하고 억념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관념염불이란 진리체로서 부처님을 마음속에 상념으로써 만이라도 떠올려 지속적으로 관찰 유지하는 것을 이른다. 또한 이러한 임시적 가관(假觀)이 실상과 별개로도 볼 수 없다. 달리 이야기하면 중생의 입장에서 실상염불은 관념염불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라 봐야한다. 청화는 이러한 맥락을 그의 설법에서 자상하게 일러주고 있다.
그렇다고 청화는 실상삼매의 염불선으로 조건없이 사종염불을 모두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일부에서는 일사불란한 염불삼매만 들면 모두 염불선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염불선으로 말하기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즉 염불선의 기준을 ‘일사불란한 삼매’로 보는 것이다. 이는 금타와 청화 염불선의 잣대는 물론 더 올라가서 초기선종시대의 달마와 도신 그리고 혜능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다. 이는 일상(一相)이, 반야바라밀이 전제되지 않은 정(定)의 일행삼매에만 치중한 행이기 때문이다. 사실 ‘염불’이 되었건 ‘주문’이 되었건 모든 행법에서 일사불란한 집중상태는 모두 가능하다. 그렇지만 왜 염불의 정토종 범위이고 선정의 선종 범위인지 그 차별상이 또한 고려되어야한다. 마찬가지로 또한 굳이 법상에 있어 왜 사종의 염불로 또는 이종의 염불로 구분하는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청화염불선은 원통불법이다. 실상의 염불선이 아닌 것을 배제하거나 배격하자는 것이 아니다. 염불선 차원이 아닌 칭명염불도 근기와 성향에 따라 권장한다. 다만 어떠한 종류의 염불이라도 ‘실상염불’로 나아가는 염불선이 정로(正路)라는 것이다. 즉 ‘염불정로(念佛正路)’는 실상염불에 있다는 것이다. 염불이 선(禪)의 수식어가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달마선에서 선이란 시심시불(是心是佛)이 강조되는 것처럼 ‘스스로 마음이 곧 진리체’이며, ‘스스로 마음이 그대로 진여불성’이라는 이치를 자증(自證)하고 머무는 것이 선이기 때문이다.69) 따라서 염불선에서 염불은 그대로 중생이 부처라는 자증법인 동시에 중생이 부처 그대로 사는 행법이다.
69) 이에 대한 청화의 경전 전거는 다음의 관무량수경을 든다[청화 역, 淨土三部經 (한진출판사, 1980), p.49, p.276, p.321.], “모든 부처님은 바로 법계(法界)를 몸으로 하는 것이니, 일체 중생의 마음 가운데 들어계시느니라. 그러므로 그대들이 마음에 부처를 생각할 때, 이 마음이 바로 三十二상과 八十수형호를 갖춘 원만덕상이니라. 그래서 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이루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니라[諸佛如來是法界身 入一切衆生心想中 是故汝等心想佛時 是心卽是三十二相 八十隋形好 是心作佛 是心是佛].”圓通佛法의 要諦 pp.255-256 등에서 이 경문이 인용되어 설명된다.
불교는 흔히 지혜와 자비의 종교로 정의된다. 종교성의 수준은 바로 자비심의 발현과 실천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불교본래의 종교성이 망각되었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는 자비심의 망각 또는 상실 정도가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자비심 발현과는 동떨어진 배타적이고 메마른 무자비한 행태까지 거론되기도 한다. 나아가 그러한 행태의 내재적인 요인이 행법의 문제와 관련하고 있음이 분석되기도 한다. 이에 반해 염불선은 가장 종교성이 발현될 수 있는 행법이라 한다. 그것은 너와 나 그리고 온 우주가 하나의 무량광명의 생명임을 늘 ‘생각하고’ ‘느끼고’ ‘사유하고’그리고 ‘상상하는’가운데 우주적 감수성과 타인과의 공감적 감수성인 자비가 발현되기때문이다.70) 염불로 충만한 불심(佛心)은 설령 이 생에 최종의 궁극적 경지를 성취하지 못한다하더라도 그러한 행 자체로 기쁨과 행복 그리고 평온함과 충만한 삶이 된다. 염불선 자체가 이미 좋은 과보인 것이다. 때문에 청화는 이를 “우리 인간 심리의 모두인 지(知)와 정(情)과 의(意)를 모두 조화적으로 구하는 선법”으로 염불선을 다음과 같이 권장한다.
70) 청화, 正統禪의 香薰 (서울: 을지출판공사, 1989), p.171, “우리 마음을 천지우주로 해방시켜서 그 가운데 가득 차 있는 그 무엇, 찬란한 그 광명,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이 실상염불인 것입니다.”이같은 일상(一相)은 공감적 감수성을 발현시키는 샘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부처님은 하나의 원리나 이치가 아니라 일체 공덕을 다 갖춘 생명, 인격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하나의 생명으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의 영원한 님도 구하고 또는 사랑도 구하듯이 말입니다. 부처님은 사랑 가운데 사랑이요, 님 가운데 님입니다. 일체 만유의 님이요, 평생 우리가 닦다가 종국에는 돌아가야 할 필경의 의지처, 이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참다운 님의 님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지(知)나 의(意)에 그치지 않고 우리 인간심리의 모두인 지와 정(情)과 의를 모두 조화적(調和的)으로 구하는 선법이 염불선입니다. 우리 마음으로 만족을 못 취하고 안심이 못 되면 공부를 오래 못합니다. 싫증나서 말입니다. 부처님을 자기님으로 구하는 선법, 이것은 벌써 우리 감성이 만족한지라 구하면 구할수록 더 그립단 말입니다. 우리 사부대중께서 하는 이런저런 선법은 다 좋습니다. 해보면 그만큼 거기에 따른 재미가 있습니다. 도인들이 제시한 법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불안스러운 때 가정생활로 인해서 여러 가지 액난이 많은 때, 어느 때나 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염불선은 매우 좋습니다.71)
71) 청화, 正統禪의 香薰 (서울: 을지출판공사, 1989), pp.146-147.
다른 곳에서는 염불선은 지정의(知情意) 가운데에서도 “정서가 수승한 사람들”에 더 적합한 행법임을 말하기도 한다.72) 이 지점에서 앞서 설명한 달마의 사행(四行)인 보원행(報怨行), 수연행(隨緣行)등은 그야말로 종교성으로서 수승한 정서와 감성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감성은 다름 아닌 이입(理入)과 행입(行入) 그리고 일상(一相)과 일행(一行) 또는 정(定)과 혜(慧)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갖추어진 품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집중이나 몰입과 같은 일행삼매에만 전념(專念)하다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예리한 품성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 다가가면 그 차갑고 날카로운 기운에 금방이라도 베일 듯한. 때문에 염불선은 지정의(知情意)의 조화와 균형으로서 일상이 견인하는 일행을 말하는 이유이다.
72) 청화, 圓通佛法의 要諦 (곡성: 성륜각, 2003), p.223, “정서가 수승한 사람들은 이것저것 별로 따질 필요가 없이 다만 근본성품인 생명의 실상을 인격적으로 그리워하는 흠모심을 냅니다. 원래 부처인지라 어떤 누구나가 다 부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누구나 다 한결같이 염불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실제로 청화와 그의 염불행자들의 타인과 세상에 대한 균형 잡힌 공감적 감수성은 비교된다. 이러한 이유인지 그 동안 논자가 접할 수 있었던 청화염불선 행자들은 공통적으로 편안하고 온화한 그리고 맑고 밝은 기운이 감돈다는 것이다.
염불선에 있어 감성은 불성을 염(念)하는 가운데 살아있다. 불성을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가운데 감성, 마음의 고향은 추억된다. 추억의 감성은 잃어버린 마음자리를 되돌리는데 있다. 염불선은 (불성의) 감성불교이다. 마음고향을 추억하는 감성불교이다. 염불선은 가공할 한방을 기다리는 공부가 아니다. 대오선(待悟禪)이 아니다. 그렇다고 묵묵히 앉은 좌선으로 언어가 쉰 자리에서 불성 또는 자성만을 지킨다는 것도 아니다. 무사선(無事禪)도 아니다. 염불선은 지정의(知情意)라는 전인적인 훈습(薰習)으로 불성의 내면화와 체화의 행법이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성이 가장 살아있는 불교는 염불선이라 할 수 있다.
Ⅳ. 마치는 말
염불선의 효시 또는 연원을 4조 도신에게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본고를 통해 확인되는 바는 도신의 반야바라밀과과 일행은 이미 달마의 진작으로 증명되는 이입사행론 에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도신이나 달마 또한 이입사행론 의 ‘자교오종(藉敎悟宗)’정신에 따라 문수설반야경 등의 대승경전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염불선은 대승불교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고도 주장될 수 있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초기불교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앞에서 염불선의 초기불교적 근거로서 논의했듯이 정학(定學)의 증상심 차원에서 말하는 염불을 들 수 있다. 눈앞에 생존에 있는 붓다의 성품과 공덕을 염하는 그래서 염하는 자 또한 붓다의 성품으로 질적전환하도록 이끄는 행법이 그것이다. 기본적으로 여래십호 등의 모든 염불법은 중생심을 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염불선의 한 방법이이다.
동아시아 대승불교 역사에서 수많은 행법들이 대두되었고 계승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간화선, 묵조선, 염불, 주문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한국불교 전통에서는 간화선이 주류 또는 중심행법으로 자리잡고 있다. 간화선은 조계종의 종지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간화선 일변도’또는 ‘간화선 지상주의’라는 말로 비판받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간화선이야말로 성불의 최상승선이라는 신념에 따라 여타 다른 행법을 낮추어 평가하여 왔다. 염불선 또한 잘못 평가된 대상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본 연구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염불선의 교리적 근거는 오히려 초기선종 시대는 물론 대승불교를 거슬러 초기불교로 까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동아시아 불교사에 있어 여러 종파로 지말분열(支末分裂)하기 이전의 순수하고 보편적인 행법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청화는 이 시기를 ‘순선시대’라는 용어를 수용하고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하게도 염불선은 간화선이나 묵조선이 일어나기 전에 초기선종시대의 보편적이고 기본적이며 중심적인 사상이고 행법이었다. 다시말해, 모든 선종의 역사에 걸친 종지(宗旨)는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는데 이 때 ‘자심(自心)이 곧 불심(佛心)’이라는 전제는 바로 이 시기에 완전히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염불선은 ‘자심(自心)이 곧 불심(佛心)’을 관념(觀念)하는 행법이다. 이는 단적으로 달마의 이입사행론 에서 “심신함생(深信含生)이 동일진성(同一眞性)”은 6조 혜능에 있어 “여금당신(汝今當信)하라, 불지견자(佛知見者)는 지여자심(只汝自心)이요, 갱무별불(更無別佛)이다.”라는 표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즉 모든 선종은 예외없이 염불과 염불선의 기본전제인 ‘시심시불(是心是佛)’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스스로의 마음이 곧 불심 또는 불성임을 심신(深信)하고, 당신(當信)하는 것은 청화에 이르러 ‘신해(信解)’라는 말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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