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인권이 사회문제로 급부상할 때 항상 '이것'이 있었다. 바로 파워 슈트(power suit)다. 성범죄·성폭력 공개 운동인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힘을 얻고 있는 요즘 파워 슈트가 다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최근 각종 시상식에도, 유명 패션쇼 무대에도 바지 정장의 향연은 넘쳐나고 있다. 이방카 트럼프 역시 백악관 입성 이후 팬츠 슈트를 주로 선택했다. 하지만 바지를 찾는 목소리가 높아진다는 건 그만큼 여성의 인권이 여전히 핍박받고 있고, 여전히 약자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1980년대로 돌아가 보자. '파워 슈트'라는 말이 패션계를 넘어 권익 신장과 동의어로 사용되기 시작할 무렵 말이다. 제인 폰다 주연 영화 '나인 투 파이브'(1980), 멜라니 그리피스의 영화 '워킹 걸'(1988) 등 영화 속에 등장한 파워 슈트는 성공한 여성의 상징이기도 했다. 조금 카메라를 확장해 보면 이미 지위를 점유한 남성과 달리 여성들은 말단직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고군분투해야 한다. 여성의 야심은 악녀로 표현되곤 했다. '워킹 걸(working girl)'이란 단어 뜻만 보더라도 '일하는 여성'과 '몸 파는 여성'의 이중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여성이 바지를 입게 된 배경에는 20세기 초 미국과 영국 등에서 확산된 서프러제트(suffragette·여성 참정권 운동)가 있다. 올해는 영국이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국민투표법을 통과시킨 지 100주년이다. 여성운동가인 아멜리아 블루머(1818~1894)가 잡지 '릴리'에 고무줄이 들어간 풍성한 바지를 대대적으로 소개했지만 오히려 역풍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패션사(史)에 '블루머 의상'이라는 이름을 남겼지만 그 옷을 입는 건 조롱의 대상이자 사회적 매장을 뜻했다. 세계 대전을 겪으며 여성이 대거 사회에 나가면서 그제야 바지도 그 힘을 얻게 됐다.
여성들이 바지를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고작 반세기일 뿐이라는 데 너무 놀라지 말 것. 패션의 도시 파리에서 바지를 입고 활보했던 경험이 있다면 얼마 전까지 당신은 암묵적 '체포 대상자'였다. 파리에서 남성들의 복장을 여성이 입지 못하게 한 법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게 겨우 지난 2013년이다. 프랑스 혁명 뒤 민중을 뜻하는 '상퀼로트(sans-culottes·귀족들이 입던 주름 있는 반바지의 'culottes'와 없다는 뜻의 'sans'이 붙은 것)' 운동이 확산되고 여성들도 긴 바지를 입자 1799년 정부가 제동을 건 것이다.
올 시즌 파워 슈트는 여성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성 역할의 구분을 없애는 젠더리스 스타일의 유행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상 표현으로 팬츠는 널리 퍼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보고되는 성희롱과 성폭력 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한다. 미국 시사주간지 디 애틀랜틱은 "파워 슈트를 입는다는 것이 직장 내에서 실제적인 파워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주류 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이기 위한 추진체로 지속적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패션] 포인트는 어깨, 승부처는 바지
입력 : 2017.10.27 04:00
메르켈·힐러리처럼 입어보자
올가을 대세는 바지 정장 발목 살짝 드러나는 실용적 바지가 인기 재킷은 품 넉넉하고 각 잡힌 '파워 숄더'로
치마파를 위한 조언 무릎 살짝 덮는 펜슬라인 다리 모양 가장 예뻐보여 재킷은 더블 브레스트로 중성적 이미지 줘도 좋아
정장이 어색하다면 밝은 블라우스·셔츠로 여성스러움 살리거나 하이힐 대신 스니커즈로 캐주얼한 느낌 낼 수도
사회생활을 이제 갓 시작한 남성들 사이에서 정장은 '전투복'이라 불린다. 여성의 경우 좀 달랐으나 최근 '강한 여성' 즉, 파워 우먼이 부상하면서 정장이 뜨고 있다. 스스로 당당해 보이기 위해, 남성 못지않은 실력과 전문성을 드러내는 도구로 정장을 선택하는 여성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패션 업계 흐름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올가을 럭셔리 브랜드부터 SPA 브랜드까지 여성 정장을 주요 아이템으로 내놓았다. 한동안 정장에 시큰둥했던 국내 여성복 브랜드들도 정장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구호, 나이스크랍, 미샤 등 여성복 브랜드들은 이번 가을겨울 시즌 여성 정장 품목 수를 2배로 늘렸다. 표유경 '톰 브라운' 해외상품2팀장은 "올해 들어 여성 정장이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범사회적인 여성 이미지 신장과 함께 찾아온 글로벌 패션 트렌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며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지난해 미국 대선 기간 힐러리 클린턴이 보여준 강한 여성 리더로서의 이미지는 구찌, 발렌시아가, 톰 브라운 등 수많은 럭셔리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의 대상이 됐다"고 했다.
남성복 같은 바지 정장 다시 인기
올가을 가장 눈에 띄는 스타일은 매니시한(남성적인) 바지 정장이다. 글로벌 패션 트렌드 중 하나인 '젠더리스(성 중립)'의 영향으로 남성복에 적용되던 재단 방식이 여성 정장 스타일에 스며들었다. 품이 넉넉한 재킷과 각 잡힌 어깨의 파워 숄더, 남성복 같은 바지 정장 스타일이 올해 여성 정장의 주요 트렌드다. 한예슬, 차예련 등 국내 유명 여배우들이 최근 공식 석상에서 여리여리한 원피스 대신 남성복 같은 회색 체크무늬의 바지 정장을 입고 나오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지난해 정장 전문 라인 '에딧'을 새롭게 출시하며 여성 정장에 집중한 구호는 이번 시즌 남성복에서 영향받은 오버사이즈 실루엣의 재킷에 슬림 팬츠나 남성적인 느낌을 극대화한 와이드 팬츠 스타일링을 선보여 20~30대 젊은 층에게 인기다. 양방향 스트레치 원단을 사용해 정장도 편안하게 입을 수 있다는 실용성을 강조한 점도 한몫했다.
영화 '킹스맨'의 주인공처럼 맞춤 정장을 즐기는 여성들도 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맞춤 정장 전문숍 '스플렌디노'에서 여성 맞춤 정장 라인 '블랑디노'를 담당하는 홍은경 이사는 "30~40대 전문직이나 대기업 임원진 여성들이 오피스룩으로 맞춤 정장을 선호한다"고 했다.
최근 정장이 새롭게 뜨고 있다지만, 수년째 '놈코어 패션'의 인기로 캐주얼에 길들여진 젊은 여성들에겐 정장이 수학의 미적분 공식처럼 어렵기만 하다. 이럴 땐 처음부터 슈트 한 벌을 입기보단 캐주얼한 아이템과 적절히 섞어서 시작해보는 것이 좋다. 김현정 '구호' 디자인실장은 "정장은 매니시하게, 이너웨어는 여성스러운 느낌의 블라우스나 밝은 색 셔츠를 받쳐 입으면 세련돼 보인다"며 "재킷이 부담스럽다면 코트 스타일 상의를 입으면 시크하면서 격식 있어 보이고, 하이힐 대신 스니커즈를 신으면 편안하면서 중성적인 멋을 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장이 낯선 그녀들을 위한 '7가지 공식'
1 어깨 라인: 재킷의 어깨 라인은 어깨에서 팔로 떨어지도록 자연스럽게 라인을 살리고, 허리는 잘록해 보이도록 입는다. 어깨가 좁은 편이라면 각진 어깨 라인의 파워숄더 재킷이 좋고, 어깨가 넓다면 둥근 어깨 라인의 재킷을 추천한다.
2 상의 길이: 재킷은 엉덩이를 살짝 덮는 길이가 좋다. 보통 유니폼은 재킷 길이가 짧기 때문에 재킷 길이가 길면 유니폼 정장 이미지도 지울 수 있고 오히려 날씬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
3 소매 길이: 남성 정장은 대체로 셔츠 끝이 보이도록 소매 길이를 셔츠보다 짧게 입지만, 여성 정장은 손등을 살짝 덮는 것이 우아해 보인다.
4 치마 길이: 최신 유행의 치마 트렌드는 H라인보다 치마 끝이 살짝 모이는 펜슬 라인. 치마 길이는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가 좋다. 그래야 무릎에서 종아리로 넘어갈 때 굴곡진 부위가 가려져 다리 모양이 예뻐 보인다.
5 바지 길이: 신발을 신었을 때 밑단이 주름 잡힐 정도로 길지 않게 입는 것이 원칙. 최근에는 발목이 살짝 드러나는 슬랙스 라인이 인기다. 허리 부분은 하이웨이스트로 하면 허리선이 강조돼 다리가 길어 보인다. 슬랙스 라인은 스틸레토 힐이나 로퍼 등에 두루 어울려 활용도가 높다.
6 액세서리: 기본을 지키는 클래식한 정장에는 스틸레토 힐로 여성스러운 느낌을 주고, 색감이 있는 립 컬러와 행커치프로 포인트를 준다.
7 기타: 최근 복고풍의 유행으로 재킷의 라펠은 살짝 넓은 것이 인기다. 라펠이 넓으면 상대적으로 얼굴이 작아 보이는 효과도 있다. 재킷의 단추는 싱글보단 더블! 좀 더 세련되고 전문적인 분위기를 더할 수 있다.
첫댓글 수트핏을 제대로 감상해볼 수 있던 기회였네요. 유용한 글 감사합니다. 이후에 수트에 도전할 일이 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