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4월에 고부군수로 부임했던 조병갑이 온갖 수탈과 학정을 자행하자 이에 전봉준 등 20명은 1893년 11월 당시 송두호의 집에 모여 고부성을 부수고 조병갑을 죽이며,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하며,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에게 탐학한 벼슬아치를 징치하며,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 사발통문은 동학농민군이 처음으로 조직적 봉기를 계획하고 행동목표를 밝힌 문서라는 의미를 갖는다.
고부농민봉기는 1894년 1월 10일 일어났다. 전봉준은 고부봉기를 활용하여 전국적인 농민혁명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인근 지도부들과 충분한 협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란이 발발한데다가 고부농민봉기 발발 이후에도 기대했던 만큼 인근 읍에서 호응하지 않았다. 이에 더해 신임 군수 박원명이 주민들을 효유하고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자 3월 3일경이면 ‘난민’ 들은 해산하기 시작하였고, 3월 13일이면 완전히 해산하였다. 전봉준도 이 무렵 부하 50여 명만 거느리고 고부를 빠져나가 무장으로 갔다.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기포한 농민군은 〈보국안민창의기(輔國安民倡義旗)〉를 앞세우고 장도에 올랐다. 무장을 출발한 농민군은 고창, 흥덕 줄포 등을 거쳐 오후 6시쯤 고부로 향하였다. 이 때 농민군의 군진은 “척후기가 있고 청홍백황색(靑紅白黃色)의 구별이 있으며, 상하로 흔들고 좌우로 받치거나 혹은 급하게 혹은 느리게 하여 한 부대의 진퇴가 다시 이에 응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농민군의 병기는 죽창, 활, 화살, 창이 있었으며, 구제의 화승총도 있었다. 고부로 들어간 것은 3월 23일 저녁 8시경이었다. 이때 고부에 들어온 농민군은 승마자 20여 명을 포함하여 총창 등으로 무장한 3천여 명이었다. 이들은 향교와 관아 건물에 분산하여 주둔해 있으면서 저녁은 읍내의 이민가(吏民家)에 나누어 배정하여 시켜 먹었다. 전열을 정비한 농민군들은 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태인 화호로 이동하면서부터 각지로 통문과 전령 등을 보내 군량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당시 관아에는 동헌, 객사 등 여러 동의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고부관아 자리에는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동학농민혁명종합지식정보시스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