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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먹는 사과> / 김금란
아침 뉴스에서는 슬픔도 없이
오늘도 누군가의 죽음에 꽂힌 칼날의 깊이만을 이야기했다.
간밤에 내린 소나기에 쪽방이 젖었다는 내용과 허락도 없이
꽃들의 몸을 더듬고 간 불온한 바람의 행적과
술 취한 자동차가 도로를 거꾸로 갔다는 뉴스 따위는
식은 믹스커피처럼 텁텁했다
한 손에는 리모컨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붉은 사과를 들고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며
식탁 앞에 앉아 사과 한입을 베어 물었다
붉은 잇몸 속에 숨겨진 칼날처럼 사과를 물고 있는 이빨에서
느껴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이 비릿한 슬픔,
슬픔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은
어디에다 울음소리를 숨겨 두었을까
적당한 단맛과 적당한 크기 적당한 안도와 적당한 거리_
모든 적당함으로 포장된 수많은 하루가 아침 뉴스 자막처럼
쓸쓸하게 스쳐 가고
슬픔도 없이 내일은 또
어떤 울음이 소리를 숨긴 채 사라질까
먹다 남은 사과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화장실로 가서 입을 헹구며
문득,
미안하단 말을 배운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본다
<만선호프 > / 김지란
종화동 부둣가
안강망 선원들 육지로 발을 내딛는다
파도에 깨지고 바람에 부서지다 들어오는
바다 사내들을 위로해주는 조금 때는
세상으로 안내하는 마중물
한 사나흘 분분히 일어나는
바다의 소문에는 레이더를 거두고
물살 센 이곳에 다시 닻을 내려
새로운 그물을 투망 해놓았다
만선의 꿈과 해풍에 달궈진 심장은
어군 탐지기 대신 사람들의 눈만으로 관측이 된다
만년 허기진 바다 사나이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속말들
세류에 휩쓸리고 부글거리다
기어코 한바탕 풍랑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런 게 사람 사는 거라 위로하는
맥주 거품이 넘쳐흐르는 곳
출렁거리는 세파 위에서 만선호프호
다음 사리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내들의 어창에는
환한 보름달이 가득 찰 것이다
<적절한 이유>/ 박수림
한 잔 술 에게도 따를 수 있는 변명이 있고 그대의 삶에도 바람 부는 방향이 있는데요 내 존재 밖의 것은 다 행복해 보이고 넘치도록 가득해 보이는데요 닫힌 문 열어보면 넋두리 한도 끝도 없습니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뱉어내고 쓸어 담고 왼종일 싸리 빗질 하는데요 마음 내려놓으면 열리는 가슴 길은 풍경이 아름다운 국도처럼 결코 만들어 질수 없는 한 폭의 수채화인데요 속은 온통 상처투성이라네요 오히려 그 모습이 오랫동안 우려낸 연륜처럼 담백한데요 바라볼수록 슬픔의 깊이가 아립니다 숨 쉬며 살아가는 동안은요 세상으로 나를 버린 그날부터는요 자유는 없어요 발 버둥치며 몸부림쳐도 빠져나갈 수 없어요 그냥 이 모습 이대로 뭘 어쩌라구요 채워가는 달처럼 비워가는 달처럼.
<보령댁의 퇴근길>/ 한성천
긴 장마의 끝에 빨대를 꽂은 소나기는
남아 있는 비구름의 한 방울까지 모두 빨아 버릴 기세다
언제 밥 한 끼 먹자던 옛 연인의 안부가 궁금했어
잘 지내고 있는지
해 반, 사람들 반, 비구름 반, 그리고
핸드폰의 결박을 푸니
결제를 기다리는 문자들 와르르 쏟아낸다
추억에도 갱년기가 있어서
끈적거리는 팔월의 습한 바닷바람 앞에 우두망찰 서 있곤 해
너에게 와 나에게로 떠난 추억이었지
당신에게 적절한 위로의 말을, 떠 올리기가 쉽지 않아
돌아누운 채 들썩이는 등을 차마 껴안아 주지 못했어
뜨겁게 달궈진 젖가슴을 헤치며 들이치는 소나기가
놓아버린 정신줄처럼 온몸을 휘감겨 올 때
당신의 그녀는 떠나가고 대천 앞바다에 남은 보령댁
<괭이>/ 곽문호
느티나무 괭이자루가 시커멓게 멍들어
밭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있다
넓적한 쇠 날은 반쯤 닳고 삭아서
더 이상 밭을 일구지 못할 것 같다
우리 아버지가 사용하다 농사일 손 놓으시고
아무렇게 내팽개쳐 둔 괭이다
고추밭 고랑
무밭 고랑
배추밭 고랑
부지런히 일구고 다녔는데 이제 힘이 부치는 모양이다
괭잇날 심장은 누가 다 갉아 먹었는지
기억 저편 시퍼렇게 피가 돌던 날카로움도 문드러져 없어지고
되돌아 올 수 없는 길 앞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제
근육질은 다 빠지고 허물어져버린 비쩍 마른 몸을
그저 지나는 바람에 맡겨두었나 보다
맨발 자국 꾹꾹 박힌 흙무덤 가에
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아무렇게 자란 호박넝쿨이
초라한 괭이작대기에 몸을 감고 올라와
마디마다 노란 수꽃들이 듬성듬성 덧없이 피어 있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길 어디로 가려는지
줄기 더듬이가 잡초 무성한 밭이랑을 지나 허공을 헤집으며
뚜벅뚜벅 내 앞으로 걸어 나온다
<이안의 바다>/ 박수원
추분이 어제, 오늘 아침 7시는
소소한 안개의 바다
바다도 없는 이 이안의 아침은,
이미 태풍의 눈속에 들어간 고요의 바다이다
해안가 스치는 해무가 너울너울 올라와 날개깃을 펼치다가 일렁이다가
슬픔보다 진한 몽환의 안개
이안을 감싸더니 금시에 삼켜버린다
재 너머 성황당 삼신할매 전설도
이안교의 나즈막한 난간도
벼 이삭 여물어가며 내뱉는 소리도
상주 옹기장네 빛바랜 팻말도 첫 가마 든 옹기마냥 낯가리며 숨는데
흐늘대는 해조에 감긴 개 짖는 소리만이 컹컹컹,
버뮤다 삼각지대로 근접하는 중일까
그 괴물이 삼켜버린 해저 동굴엔
동네를 담가 놓은 벽화가 울음을 참고 서있다
무르익는 광란의 바다처럼
머지않아 소용돌이 칠 폭풍우 맞으며 퍼 올릴 난파선 몇 척, 아마도 한 배엔 작년 여름 배나무 가득 달렸던 하이얀 고깔이 폭락한 배 값처럼 나뒹굴지라도, 아마도 한 배엔 허리 굽혀 일하다 결국은 드러눈 공검댁 머리맡, 함께 아파하는 황구만이 웅크려 지킬지라도 슬픈 낭만의 으스름 저녁, 냥이들 애절한 울음이 누구 집 갓난애 울음이라 착각해 반색할지라도
아픈 이야기도 묻혀서 아름다운 때 이때든가
표류하며 파도 다독이며 되돌아올 지친 이들이여,
타국살이 서러워 훌쩍였던 베트남 새댁 앙티엔도 싣고 지난 추석, 애비 통장에 돈 몇 푼 덜렁 부치곤 비행기여행 떠난 용구네도 싣고 동구 밖 400년째 지키는 느티나무 그 쓸쓸함에 통곡하던 김초시네 장손 내외도 싣고 역마살 끼었는지 사방 떠도는 삼태 녀석도 싣고
용총 찾아 닻을 올려라, 이안의 아침바다로
<거북이의 탈출>/ 김명학
거북이는 늘 탈출을 꿈꾸었다
바다로 돌아가야 한다고
꼭
돌아가야만 한다고
그곳에 가면
모두 다 만날 수 있을 텐데
고무통에 갇혀서도
제 몸 만 한 돌멩이에 올라선 채
늘 탈출만 꿈꾸었다.
외롭게 만난 몸체 작은 아내 거북이
저를 밟고 올라서보세요
그럼 혹시 길이 보일지 모르니
당신이라도 먼저 탈출하세요.
늘,
그런 모습으로
고개만 내민 채 꿈꾸던 탈출
어느 날
베란다로 옮겨진 기회를 틈타
고무통을 넘는데 성공한 거북이
그토록 꿈꾸었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밝은 세상
베란다 밑으로
저기일까
저기일까
탈출
꿈에서도 그리던
탈출에 성공하여
4층 베란다에서 떨어져
거꾸로 뒤집혀져 죽은 거북이
그 거북이 시체 위로
며칠간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
그날 이후 근 4개월여 혼자 남은 아내 거북이는 잘도 견뎌냈다.
먹이도 잘 먹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게 여간 안쓰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거북이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먼저 간 남편 옆에 묻어주던 날 그날은 하얗게 눈이 내렸다.
그 거북이를 추억하며 쓴 글이 '혼자 남은 거북이'다.
<노을 속에서>/ 김정옥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일까
저마다
그 틀이 다를지 모르지만
마지막 순간마저도 태워버리는 석양 앞에선
다들 발을 멈춘다
그리고
그 자리 위에 모두들 마음을 올려 놓는다
경건하게
일렁이며
가라앉는 오늘 하루를 보며
온몸이 붉은 솜털이 된다
만약, 저 해를 다시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함께 붉어질 수 있을까
저 붉은 노을이
내일을 불러올 수 없다면
기다림이라는
희망이라는
아름다운 여운을 가질 수 있을까
진다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또 다른 밝음이라는 것을
밤이 있기에 아침을 기다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에
또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다
나 기다려 봐도 될까
너처럼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우산을 쓰고 산길을 걷다가>/ 정경미
비에 대해 생각해 보네.
태생부터 제 목소리를 지니지 못한
것들은 타인을 만나야 소리를 낼 수 있지.
함석지붕, 베란다 난간대, 양동이, 떡갈나무잎,
바닥에 눕혀진 자장면집 간판, 백일홍 이파리
다다당, 당당당, 통도독, 후두둑, 줄줄, 추르륵, 사브작사브작
이쯤에서 자꾸 궁금해지네
‘너’라는 사람을 만난
‘나’는 어떤 소리가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