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던 설레 임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이 해의 마지막 나침반을 띄우게 되었습니다.
나침반을 늦게 보내 미안합니다.
요즘 경제 불황으로 모두들 힘겨워 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집단적 탐욕과 오만과 독선이 가지고온 당연한 결과이며,
그 고통이 앞으로 얼마나 혹독할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비단, 경제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에는 항상 '고통'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삶 자체가 고통이요, 모든 것이 고통(一切皆苦) 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건강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시편은 노래 했습니다.
‘소포쿨레스’는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다음으로 좋은 것은 가능한 한
빨리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네카”는 인간의 삶이란 죽기 위하여 태어난 선물,
그것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다행히도 그것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비관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빈정댔습니다.
인간이란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생기는 불만과,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
엄습해오는 권태 사이에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한다고 하였습니다.
손봉호 교수의 고통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인 담긴 <고통받는 인간>을
탐독해 보았습니다.
삶이라는 것이 이렇게 어처구니가 없는 것인가?
아무도 고통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당해 본 사람들은 고통을 겪은 후의 해방감을 잊지 못 합니다.
이것이 고통의 역설입니다.
인간은 고통을 겪어야하고, 겪을 수 밖에 없고, 피 할 수도 없으며,
그 고통을 겪어내는 과정이 인생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고통이 지배하고 있지요.
세상사 모든 것들을 그대로 둔 채 ‘고통’만을 제거하려는 인간의 헛수고가
고통을 더욱 키웁니다.
고통은 욕심에서 나오고 욕심은 크고 작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스러우면 아예 뒤집어 생각하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인생에는 애당초부터 행복 따위는 없다는 진리를 안다면 큰 위안이 된다는 취지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행복을 잡으려고 하는 환상과 이에 따른 행동 때문에 생깁니다.
행복은 잡았다고 기뻐하는 순간 잠시 후 사라지고, 고통은 영원히 우리의 삶과 같이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추구할게 아니라 고통을 냉철한 혜안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사치, 쾌락, 게으름, 원칙 없는 생활은 불필요한 고통을 불러오고
자신의 잘못에 상응하는 고통은 꼭 겪게 마련입니다.
고통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Entropy)과 비슷한 고통 불변의 법칙이 있어
욕심이 커지면 고통이 커지고, 욕심이 줄어들면 고통도 줄어듭니다.
가장 암울하고 비참한 고통은 제일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과의 서로 얽매여 사는
갈등일 것입니다.
이에 비해 물질적인 고통은 좀 나을 수도 있겠지요.
여하튼 ‘고통’은 무엇으로 치유하여야만하는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고통을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병에 걸려 제명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는 ‘문화’라는 멋스러운 여백이 있습니다.
이런 문화생활을 통해 고통을 완화시켜야 하겠지요.
예를 들어 그림, 음악, 등 각자의 취향에 따라 길을 찾는 거지요.
나의 경우는 자연이 고통의 도피처이자 삶의 전부 입니다.
산행, 여행, 캠핑, 주말영농에 몰입하여 땀방울 속에 고통을 이겨내며 자유를 얻습니다.
몸의 건강, 마음의 건강, 정서적 건강은 서로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정서가 메마르면 몸과 마음이 상하고, 몸이 성치못하면 만사가 성가시고,
마음의 병이 몸의 병보다도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런 관계들을 ‘틀 니’를 통해 인생을 배웁니다.
나의 주치의 노재구 원장께서 늘 알려주는 ‘잇몸은 끊임없이 활동하며 변형’된다는
자연의 오묘한 현상입니다.
잇몸이 100분의 1밀리가 변형돼도 ‘틀 니’와 맞지 않아 불편하기 그지없고,
마냥 아프기만 합니다.
우리는 걷고 말하고 먹습니다.
그러나 발 혼자 움직이고, 혀와 입이 서로 혼자가 아닙니다.
눈에는 안보이지만 우리를 움직이게 하기위해 전체가 하나 되어 움직입니다.
삶의 맥락에서 전체를 아울러 서로 유리됨이 없이 조화를 이루어
자연에 귀의(歸依)하는 진리를 깨우칩니다.
자기자원(自己資源) 역시 문명의 이기에만 의존하지 말고,
자연과 소통하는 자유로운 영역에 소진하여야 하지요.
이상(理想)은 하나의 편리한 도피처입니다.
나는 믿습니다. 행동만이 삶이고 고통을 치유합니다.
<2008. 12. 깐돌이 박 상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