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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수필만을 짝사랑한 원종린 수필가
문희봉
원종린(元鍾麟) 수필가는 1923년 7월 20일(음)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하였다. 휘문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쥬오(中央)대학 예과 졸업, 미국 피바디사범대학 졸업, 중앙대 대학원에서 도서관학을 전공하고,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영어교육을 전공, 학위를 받았다. 1945년 일본군 학도병 사건(망명 모의)으로 옥고를 치르던 중 조국 광복으로 풀려난 애국자이기도 하다. 그간 교육과 수필문학세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2011년 6월 3일 생을 마감하였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첫 입문한 그는 대한민국의 원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수필가이며 공주교육대학교 교수를 끝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1977년 7인 수필집 『한 잔 차에 담긴 세월』(汎友社), 1983년 수필집 『하늘 높이 차 올리는 구두』(敎音社), 1989년 수필집 『사랑과 미움』(學文社), 1993년 수필집 『綠陰日記』(敎音社), 1999년 수필선집 『太陽의 季節』(敎音社), 2000년 수필집 『홀가분한 마음으로』(學文社), 2005년 수필집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오늘의문학사), 2007년 수필전집 『어느 멍청이의 人生 日記』(學文社), 2009년 수필선집(2) 『老文學靑年의 뒷이야기』(학문사), 2010년 미수 기념 수필선집(3) 『혼자 달린 競走』(學文社)를 냈다. 수필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제1회 월간수필문학대상, 2002년 한국문인협회 충남지회 공로상, 2003년 문학사랑 대상, 2007년 제1회 대전예술상, 2007년 제1회 올해의 수필인상 등을 수상하였고, 2006년에 모교 「휘문 100년史」에 수필가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2005년에는 그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그의 이름을 딴 '원종린 수필문학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수필발전에 공헌한 분들을 선정하여 대상 1명 500만원, 작품상 2~3명에게 각각 100만원씩 상금 및 상패를 주어 격려하고 있다. 수필을 위해 태어나 수필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정진하다 수필가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물하면서 생을 마감하신 대한민국의 대수필가이다. 이 상(賞)을 제정하여 시상하는 데는 삼 남매(장녀 普淵, 장남 志淵, 차남 俊淵)의 적극적인 호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육체적으로는 늙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복학한 대학생 정도의 젊음을 갖고 산 분이다. 남한테 듣기 싫은 내색 한 번 아니하고, 흐르는 물처럼 유유자적 산 분이다. 늘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반짝이면서 살았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를 내 늘 어떤 도움을 어떤 방식으로 줄까를 고민하며 살았다. 젊은 사람들이 나도 저렇게 고상하게 나이 먹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을 들으며 신선같이 학같이 산 분이다.
시련을 겪고 나야 인생이 윤이 나고 생동감이 생긴다. 시련과 고통이 있어야 탄생과 성장이 있다. 그림자가 없으면 빛도 없다.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세 가지 버릇을 바꾸라고 성현들은 말씀하셨는데, 원 수필가님은 그걸 직설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첫째는 마음 버릇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버리고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둘째는 말 버릇이다. 비난과 불평은 삼가고 칭찬과 감사를 입버릇으로 만들어 살았다. 셋째는 몸 버릇이다. 찌푸린 얼굴보다는 활짝 웃는 사람, 맥없는 사람보다는 당당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였다.
맹사성의 일화처럼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고 살아온 분이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웃으며 받아들이고, 세상 모두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철학을 갖고 살았다.
원종린 수필가는 자신을 볼 줄 아는 분이었다. 남의 단점을 찾으려 하지 않고, 좋은 면만 부각시키며 살아온 분이다. 화를 내면 화를 내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 급하게 열을 내고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 대개 싸움에서 지며 좌절에 빠지기 쉽다. 고마웠던 기억만을 간직하려고 부단히도 애쓴 분이다. 괴로웠던 기억은 깨끗이 지워버리는 성품이었다. 나를 비우면 행복이 찾아오고, 나를 채우면 불행이 찾아온다는 신념을 갖고 살아온 분이다.
원종린 수필가의 수필에는 이야기가 많다. 어떤 제목의 글에도 줄거리가 분명한 여러 토막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의 제목이 결정되면 그것에 관련되는 많은 이야기가 연결되어 나온다. 자신의 경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있고, 주변에서 먼 이야기도 있다. 소재가 풍부하다고 할까? 화술이 좋다고 할까? 그래서 재미가 있다. 수필이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글월이다. 예로부터 선비들은 글월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만인에게 알렸다. 그래서 글월은 선비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도구라고 했는가 보다.
원종린 수필가의 수필에는 기지와 익살과 풍자가 있다. 그것이 좋은 수필이 되는 조건이나 그것이 쉽지 않다. 품성이라고 할까? 성격이라고 할까? 작법의 수련과 노력만으로 안 되는 수법이 바로 기지와 익살과 풍자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낙제수필이다. 원 수필가의 수필은 창조의 가치와 무량한 심미적 결정이 동반된다.
짧은 몇 마디 말 속에 담겨 있는 익살과 풍자는 독자의 기분을 일변시켜놓는 힘이 된다. 똑 바로만 걷는 걸음은 지루하고 답답할 수 있다. 그 걸음 속에 허튼 걸음도 있고, 뒷걸음도 있고, 옆걸음도 있을 때 기분에 변화가 온다. 글이란 것이 사람의 마음에 있는 깊고 간절한 생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글이란 사람의 정신과 그 사람의 됨됨이와 품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갈고 닦고 다듬어서 참된 글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의 인격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종린 수필가는 이런 정신으로 개성적인 수필을 썼다.
재치 있는 유머와 위트가 풍부해 읽고 난 후에도 한동안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 이 ‘미소수필’에서는 주의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콩트와의 구별이다. 수필과 유사한 분량으로 창작되고 겉으로 수필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콩트는 허구성을 바탕으로 한 소설의 한 장르이다. 아무리 해학적 체험을 고백하고 있어도 사물에 대한 관조 또는 그에 대한 작가의 철학이 희박하면 콩트로 오인 받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작가의 현출한 재능과 사색의 고도 때문인지 원종린 수필가의 작품들은 미소 속에서도 숙연한 메시지들이 폐부를 찌른다.
원 수필가의 수필에서는 ‘역사를 말하지 않고 역사가 표현되고, 철학을 말하지 않고 철학이 우러나온다. 이것이 바로 ‘수필작법의 요체’라고 수필론에서 정의하고 있다. 진실과 진리가 밖에 알몸으로 노출되지 않고 이야기 속에 녹아 흘러야 한다는 말이다. 기지와 익살과 풍자의 말 뒤에는 다른 사람을 아프지 않게 찔러주는 바늘이 있다.
아울러 원 수필가는 쉬운 말로 수필을 쓴다. 같은 뜻의 내용이라도 어렵게 쓰면 글의 무게가 있는 듯이 느껴오는 것이 옛사람들의 좋지 않은 습관이었다. 오늘날 난해한 시가 문제가 되고 있는 원인이기도 하다. 쉽게 쓰면 얼마든지 이해될 것을 현학적인 표현으로 유식을 자랑하는 글이 산문에도 많이 있지 않은가?
원 수필가는 그의 수필론에서 ‘수필에서 소재가 좋다는 것은 긍정적인 제재를 뜻하는 것이다. 작가가 얼마나 건전하고 긍정적인 눈으로 인생을 지켜보고 느끼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라는 대목은 그의 수필을 통한 철학이며 인생관이 아닐까 싶다. 그러한 면에서 원 수필가는 우리 수필 문단에 더없이 귀중한 존재이며, 한국 수필의 미래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수필은 인간의 향내가 풍기는 문학이다. 고정화된 틀에서 벗어나야 수필이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다. 작품은 작가의 숨결이며 생명과 같다. 작가에게 빛깔과 향기와 포효는 오직 작품뿐이다. 작품이란 작가에게는 자식과도 같은 존재다. 원 수필가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글감을 가지고, 누구도 쓸 수 없는 글을 쓴 분이다. 평범한 것에서 특별함을 찾아낸 분이다. 이는 자신만이 가진 높고 깊은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 수필가의 작품을 읽어보면 수필은 삶과 인생을 담는 그릇이요, 이를 비춰놓은 거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필의 감동은 문장과 인생의 일치에서 나온다. 수필의 목적은 삶을 통한 깨달음을 얻는 데 있지 않을까? 원 수필가의 수필은 일상에서 체득한 이야기들을 작가의 세심한 시각에서 세련된 미학적 문장으로 재현하는데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다. 일상사의 이면을 독특한 시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그의 수필들은 두루 균형 있는 무게의 주체성을 간직하면서 넓은 독자의 공감대를 자극할 수 있는 진지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데에 높은 평점을 주고 싶다. 일제 말엽의 용산 헌병대와 이태원의 육군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내용의 글이 지금도 선명하게 필자의 뇌리를 자극한다. 서울에서 입원 중에 시한부 인생이라는 소문이 퍼졌을 때의 인심의 기미를 다룬 글, 젊은 시절 미국 유학 체험기, 문단에 오른 경위를 적은 글 등이 기억에 새롭다.
사람의 사람됨을 가장 잘 나타내는 글이 수필이다. 수필은 지은이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아름다운 수필은 뭇사람들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꽃밭을 일구어 준다. 수필은 인간의 가장 높고 넓은 창조의 가치와 무량한 심미적 결정(審美的結晶)이기 때문이다. 한편의 수필이 창작되기까지는 그 어떤 높은 창조 정신보다 더 높고 어떤 아름다운 마음보다 더 고차원적인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원종린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공주교육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주로 도서관학 개론을 강의하셨는데, 교양 영어도 담당하셨다. 필자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영어에 흥미를 잃어 별 기대 없이 수강하게 되었는데 강의를 어찌나 재미있게 해주시는지 교양 영어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나중에 교사가 되어 교수학습방법의 3원칙을 알게 되었는데, 교수님은 그걸 이미 실천에 옮기고 계셨던 것이다. ‘학생 중심으로 수업하라. 재미있게 수업하라. 수업이 수업으로 끝나지 않는 수업을 하라.’였는데 교수님은 그걸 그대로 적용하여 수업을 진행해주었다.
이따금 유머를 섞어주니 영어 시간이 유머프로그램인 ‘웃으면 복이 와요.’ 시간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 학생들이 교수님을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일과를 끝내고 오르간 연습실에 가다 보면 테니스장이 있다. 일과를 끝낸 교수님들이 테니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테니스를 즐기는 폼이 마치 학들이 군무를 추는 것 같았다. 넋을 잃고 바라보면서 필자도 테니스를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량도 월등하셔서 상대팀은 계속 스코어를 헌납하기 일쑤였다.
이러구러 시간이 흘러 필자가 초등교사에서 중등교사가 되었을 때 교수님은 ‘그간 노력 많이 했구먼.’ 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교장이 되고 나서 뵈었을 때는 축하도 못 해주었다 하면서 꽃값이라고 금일봉을 주기도 했다. 항상 베푸는 일에만 신경 쓰고 받아들이는 일은 계속 사양했다. 국내 각종 수필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금일봉을 내는 걸 제일의 낙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분이다.
제자들도, 지인들도 자주 불러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그때마다 밥값은 언제나 당신 몫이었다. 그때마다 중국집으로 초대했다. 그런 연유로 원종린 수필문학상 시상식도 그 중국집을 18년째 고집하고 있으며, 운영위원회도 항상 그곳에서 하고 있다.
끌어당겨 안으려 하는 삶보다는 베푸는 삶이 좋다. 가진 게 많아야 베푼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어서 가질수록 더 가지려 한다. 아흔아홉 섬 가진 부자가 한 섬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백 섬을 채우려 하는 것이 인간 심리다. 부자 동네 사는 사람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이웃돕기 성금을 내는 사람의 수효가 더 많다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한 번은 제자들을 교수님 댁으로 초청하였다. 그때는 사모님께서 작고하셨을 때인데 집안의 정리정돈이 혼자 사시는 분으로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깨끗하였다. 번성하는 집인가 아닌가를 보려면 식물이 자라는 걸 보라 했다.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모든 식물들의 잎이 참기름을 발라놓은 듯 반짝거렸다. 잎새 하나 병들거나 시든 것이 없었다. 아마도 식물들도 주인의 칭찬 소리를 들으며 자라고 있었기에 그럴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 테니스를 즐긴 분이다. 만나 뵐 때마다 당신이 80대 중에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실력자라는 말씀을 빼놓지 않았다. 대회마다 출전하면 우승을 거머쥐었으니 자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지금에 와서 교수님의 청을 한 가지 들어드리지 못한 것이 있다. 언제 한 번 시간 내서 유성의 개인집에 잘 꾸며진 테니스장이 있으니 거기서 테니스 한 번 해보자는 말씀에 대답을 하고 나서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요즘의 수필은 수필가들의 전유물이 아닌, 만인의 공유물이 되었다. 오늘날 수필가들의 시대적 소명은 수필의 양적 팽배에 맞춰 질적인 발전을 이뤄내는 일이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 수필을 꽃피워야 한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글감을 가지고, 누구도 쓸 수 없는 글을 써야 한다. 평범한 것에서 특별함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작가만의 높은 안목이 필요하다. 원 수필가의 눈은 예리함을 넘어 통찰력까지 갖추고 있다. 수필은 삶과 인생을 담는 그릇이요, 이를 비춰놓은 거울이다. 수필의 감동은 문장과 인생의 일치에서 나온다. 수필의 목적은 삶을 통한 깨달음을 얻는 데 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수필가는 예수이며 공자이고 붓다이고 소크라테스라고 말하는 데 여기에 필자는 원 수필가도 끼워드리고 싶다.
원 수필가의 수필은 인간의 향내가 풍기는 문학이다. 고정화된 틀에서 벗어나 수필의 르네상스를 이루고 있다. 수필은 작가의 숨결이며 생명과 같다. 작가에게 빛깔과 향기와 포효는 오직 작품뿐이다. 원 수필가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상상력을 통해 낡은 것을 극복하며 자기 특성에 맞는 수필, 브랜드가 있는 수필을 쓸 때 수필의 르네상스가 도래한다고 늘 말해왔다. 원 수필가의 수필은 촛불처럼 소리 없이 타올라 삶의 독소를 분해시켜, 빛으로 퍼져나가는 예리한 붓날이다.
좋은 수필은 누가 봐도 좋다. 원 수필가의 수필은 서정성을 가미하면서 서사적 재미를 겸하는 세계이며 간결한 문장과 서민적이며 자연 친화성이 농후한 작품이기에 좋은 평을 듣고 있는 것이리라. 문학정신이 투철하면서도 차분한 사고력으로 담담한 필치가 시선을 끈다. 물론 사모님을 무척 사랑하였다. 그런데 사모님보다도 더 사랑(?)한 것이 수필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수필을 사랑하였다.
진수성찬같이 보여도 정성과 진실이 결여되면 맛이 없다. 자유분방하게 붓 가는 대로 써 내려가면서도 맥이 있어야 하고, 물처럼 순리대로 흘러가면서도 절도가 있어야 한다. 백지는 내 사색의 오솔길이며 정열을 발산하는 운동장이고, 자신의 주장을 펼쳐보이는 토론의 광장이 되어주기도 하며 자세가 흐트러진 술자리 같은 낭만의 장이 되어주기도 한다. 명언이나 잠언 등이 큰 글씨로 쓰여서 액자로 걸리면 그 구절들이 새벽 종소리처럼 마음속으로 울려와서 내 생활에 새 기운을 돋우어 준다. 원 수필가의 수필이 그렇다.
원종린 수필가의 수필은 서정적 감각과 은유적 수식을 통하여 자연에의 참신성과 인간의 비감 어린 회한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산뜻한 문장의 멋을 지니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의 수필은 원색이라기보다 간색의 문학이다.
백색의 지절과 곡선의 미학이라고 요약된다. 인간 본연의 미적 심사에 충실하면서 문체가 깔끔하고 유창하다. 사물이나 사건을 금빛이나 진주로 아름답게 환치하여 보는 시선이 독특하고 담백하다. 여리면서도 강한 심사의 소유자요, 날카로우면서도 낭만이 있는 작가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 살고 간다. 그 인생을 아름답고 귀하게 여기며, 서로 사랑하며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자고 원종린 수필가는 말하고 있다. 자고(自古)이래로 모은 재물을 지니고 저승까지 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원종린 수필가는 유언으로 내 장례식에서는 부의금을 받지 말라 했다. 와주시는 것만도 고마운데 왜 부의금을 받아 문상객들에게 부담을 지우려 하는가? 절대로 받지 말라 했기에 문상장(問喪場) 어디에도 부의함은 자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당신에게 부음이 전달되지 않았음에도, 지인들의 부음을 전언으로, 신문 지상에서 보고 찾아가 문상한 분이다. (사)한국문인협회 대전광역시지회에서는 창립 이래 최초로 대전광역시지회장(葬)으로 장례를 정중히 모셨다.
첫댓글 "정신적으로는 복학한 대학생 정도의 젊음을 갖고 산 분, 남의 단점을 찾으려 하지 않고, 좋은 면만 부각 시키며, 화를 내면 화를 내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 급하게 열을 내고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 대개 싸움에서 지며 좌절에 빠지기 쉽다. 고마웠던 기억 만을 간직하려고 부단히도 애쓴 분이다. 괴로웠던 기억은 깨끗이 지워버리는 성품이었다. 나를 비우면 행복이 찾아오고, 나를 채우면 불행이 찾아온다는 신념을 갖고 살아온 분이다." -본문 중에서-
지극히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문희봉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 카페에서 오는 후배 수필가들에게 원종린선생님을 뵐 기회를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