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500년 역사의 가장 뜨거운 이슈인 기축옥사의 진실에 다가가는 의미 있는 세미나가 열렸다.
지난 9월 22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오백년의 오해와 진실 기축옥사, 그리고 조선을 보는눈'의 특별 세미나에는 전병헌 오항녕 교수가 초청돼 특강과 대담순으로 열렸다.
기축옥사는 조선의 가장 오래된 논란의 역사 중 하나다. 조선 선조때 정여립 반란 사건을 중심으로 수많은 호남 선비들의 박해 사건으로 아직도 진실이 묻혀져 뜨거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 중심에 송강 정철이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를 반증하는 여러주장이 제기돼 기축옥사를 바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세미나라는 평가를 받았다. 송강은 왕으로부터 호남 선비 보호자로 또 한편으로는 기축옥사때 위관으로 호남선비 탄압 앞잡이로 억울하게 낙인찍혀 지금까지도 일부학자들 사이에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기축옥사의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열렸다.
세미나에서 기축옥사는 붕당정치의 소산으로 절제 되지 않은 역사관과 언어로 정철의 역할이 과도하게 부풀려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번 세미나는 기축옥사의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던져준 세미나였다.
<기축옥사의 진실을 찾아서 세미나 발표논문 중에서>
*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실상(오시림 저 흔들리는 땅 핵심 분석)
선조(宣祖) 이십이년(二十二年)(1589년) 시월(十月)에 안악(安岳)사람 조구(趙球)의 밀고(密告)로 황해도(黃海道) 관찰사 한준(韓準)을 필두로 안악(安岳)군수 이축(李軸), 재령(載寧)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信川)군수 한응인(韓應寅)이 연명으로 정여립(鄭汝立) 모반(謀牧)을 장계(狀啓)에 의하여 적발되니 당시(當時) 동인(東人) 고관(高官)들이 연루되어 있어 엄청난 옥사가 일어난 사건(事件)을 말한다
옥사초반(獄事初般) 당시 정승(政丞)이던 이산해(李山海), 정언신(鄭彦信), 언론을 장악하고 있던 이발(李潑), 백유양(白惟讓) 등 동인(東人)의 핵심인물(核心人物)들은 이를 무함(誣陷)으로 보고 여립(汝立)을 두둔한다. 그들은 역적(逆賊)의 변을 고(告)한 일이 기실 율곡(栗谷) 문인(門人)들의 의도적 소행이며, 무엇보다도 정여립(鄭汝立)이 역적질을 할 위인(偉人)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문과정에서 모반(謀叛)의 구체적(具體的) 내용이 밝혀지면서 동인(東人)들은 치명적인 위기(危機)에 봉착하게 된다
십일월(十一月) 십팔일(十八日) 선조(宣祖)는 특명(特命)으로 송강(松江)을 의정부우의정(右議政)에 임명(任命), 위관(委官)을 맡기나 그는 이런저런 병(病)들로 건강치 못하므로 상소(上疏)를 청(請)하나 윤허치 않을 뿐만아니라 우계(牛溪) 성혼(成渾)이송강(松江)에게 권유하기를 “변이 벼슬아치 사이에서 생겼으니 장차 화가 만연될 염려를 면치못할 것이요. 만일 다른 사람으로 이 옥사를 주관하여 다스리게 한다면 공정한 마음으로 혐의된 일을 처리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오. 나라일이 심히 중대한데 어찌 자신 걱정거리만을 돌아보리오" 하여 직에 나가게 된다.
우계(牛溪)로서는 사태(事態)의 심각성을 능히 예감하고 송강(松江)의 공정한 심성(心性)을 믿고 가급적(可級的) 화(禍)가 크게 번지지 않도록 하자면 그가 일을 맡아야 한다는 것을 정중히 권고한 것이다. 그러나 옥사(獄事)의 결과(結果)는 동인(東人)의 고관(高官) 정언신(鄭彦信), 언지(彦智), 이발(李晩), 이길(李浩), 백유양(白惟讓), 홍종록(洪宗祿)이 하옥을 당하자 송강(松江)이 왕(王)의 뜻을 거슬려가며 ‘계(啓)’를 올려 이들의 죄를 가볍게 하고자 애쓴다.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力不足)함을 통감하고 병(病)으로 당시 이조참판의 부름을 받고도 나오지 않은 우계(牛溪)에게 함께 사태(事態) 수습할 것을 간곡히 권유한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형이 불가불 벼슬에 나와야 할 이유 세 가지가 있소. 연소한 무리들의 논의가 날 격심하여 내 힘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것이 하나요, 옥사에 붙잡혀 온 중(僧)의연(義衍)과 정약(鄭約)등 네 사람의 입에서 허다한 벼슬아치들이 연루된 것이, 저번여립(汝立)의 조카 정집(鄭緝)에 의해 여러 사람들이 연루된 것 같아서 이들이 장차다 죽게 되었는데 내 힘이 매우 고단하여 임금을 움직이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둘이요, 셋째는 내 병세가 재발하여 수일후면 장차 물러나겠는데, 그 후에 이 일을 맡겨 이 무리들의 죽음을 구해낼 사람이 없는 것이요, 이러한 때 한결같이 물러나 있으면서 벼슬에 나오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겠소?
그러나 우계(牛溪)는 끝내 벼슬에 나오지 않으며, 송강(松江) 또한 엄중한 형벌을 고집하는 왕(王)의 뜻을 거슬려 마침에 위관직(委官職)에서 해임(解任)되고 유성룡이위관(委官)을 맡는데, 이발(李潑)의 노모(老母)와 어린아이들이 신문을 받다 죽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그들의 생명(生命)을 구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엉뚱하게도 송강(松江)이 동인(東人)들의 원망을 받는다. 훗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에 있을 때 다음 대화(對話)에서 송강(松江)의 무고함을 알 수 있으니
송강(松江) : 이 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을 어찌하여 죽였는가?
성룡(成龍) : 그럼 금공(今公)은 구할 수 있었겠는가?
송강(松江) : 어찌 차마 구하지 않는단 말인가?
선조(宣祖) 이십이년(二十二年)(1590) 송강(松江)은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한다. 조정은 정여립(鄭汝立) 사건에 얽힌 문제들로 바람잘 날이 없다. 그해 이월(二月)에왕(王)은 정여립(鄭汝立), 김우옹(金宇顒),이발(李潑),백유양(白惟讓)등을 천거한 죄로 노대신(老大臣)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노수신(盧守愼)에 죄를 줄 것을 명(命)하니 송강(松江)은 좌의정(左議政) 심수경(沈守慶)과 함께 명(命)을 거둘 것을 청(請)하나 선조(宣祖)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삼월(三月)에는 송강(松江)이 다시 위관(委官)을 맡는다.
임금은 정여립(鄭汝立)과 교분이 친밀하여 그들이 죽은 뒤에 눈물을 흘리고 소식(素食)을 하였다는 조대중(曺大中)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에게도 죄 줄 것을 명하니 이때도 계(啓)를 올려 처첩에게까지 연좌시켜 같은 형벌을 주는 것은 부당(不當)하다고 하여 여인(女人)들을 살려낸다
이처럼 역모사건(逆謀事件)과 관련하여 이들과 교분이 두텁다거나 협조했거나 우호적인 태도나 위문한 이들까지도 모두 휩쓸려 연루시켜 엄벌에 처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옥사를 맡은 송강(松江)은 어떻게든 그 칼날이 미치는 범위를 줄이고자 노력했슴을 알 수 있다. 팔월(八月)에 파직되어 귀양 간 정언신(彦信)을 다시 잡아다 국문하고, 또 남명(南䄙) 조식(曺植)의 문하생(門下生)인 최영경(崔永慶)을 여립(汝立)의 아들 옥남(玉男)이 주모자는 길삼봉(吉三峰)이라 하였는데 바로 최영경(崔永慶)이 길삼봉(吉三峰)이라고 국문하니 송강(松江)은 우계(牛溪)의 당부도 있고 하여 왕(王)에게 계(啓)를 올려 혐의가 없슴을 주청 석방토록 한다.
그러나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에서 재차 국문할 것과 귀양보낼것을 건의이를 바로 잡으려 했으나 마침내 그가 옥중(獄中)에서 병(病)으로 죽으므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런 일들이 진행(進行)되면서 김우옹(金宇顒), 정개청(鄭介淸), 유몽정(柳夢井), 이황종(李黃鐘), 윤기신(尹起莘), 신식(申湜), 한백겸(韓百謙), 김빙(金憑)등이 귀양가거나 죽거나 하였다. 이상 정여립(鄭汝立) 사건(事件)으로 이발(李潑)을 비롯 1,000여명의 인사가 숙청되었고 전라도 전체가 반역(逆)의 땅이라는 낙인으로 관계(官界)진출이 어렵게 되었으며 호남지역 사류(土流)들간에 후대까지 반목, 대립하는 등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그런가 하면 이 사건(事件)을 계기로 동인(東人) 세력(勢力)이 성리학(性理學)의 정통적(正統的) 입장(立場)을 취하며 그 모반(謀叛)을 사실(事實)로 인정한 퇴계(退溪)이황(李滉) 계열(系列)은 남인(南人)으로, 성리학(性理學)의 색채가 엷은 남명(南溪)조식(曺植)이나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계열(系列)은 북인(北人)으로 나뉘어지는 결과(結果)를 낳게 했다.
1. 왜 송강 정철은 기축옥사 주도자로 몰렸나?
양성현(한국동아시아 연구위원)
서인 폄훼와 송강 정철 죽이기는 전쟁 중인 임진왜란 중에도 계속된다. 유성룡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남 도
체찰사가 되고, 그해 12월에는 평안도체찰사를 맡는데 이어 1593년 1월 호서·호남·영남 삼도체찰사, 그리고 그해 10월에 영의정을 맡으면서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서 서인 죽이기에 나선다. 당시 유성룡의 권력은 하늘을 찔렀다. 1595년 10월에는 영의정에 경기 · 황해 • 평안 . 함경도 도체찰사를 겸임하고 있었다. 영의정 유성룡 권력기에 송강 정철 죽이기는 더 강렬해진다. 1594년 유성룡은 파당의 당수가 돼 상대당을 공격하기까지 한다. 그는 의병장 김천일에 대해 "김천일의 군사를 모두 시정(市井)의 무리들이었다"거나 "김천일의 성질이 오활하고 옹졸하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이런 인식 속에서 송강 정철에 대한 평가도 좋을리 만무했다.
송강정철이 기축옥사 주도자로 몰린 것은 기축옥사에서부터 임진왜란 때, 그리고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동인 정권이 공고해진 이유가 가장 크다고 봐야 한다. 기축옥사가 발생했을 때에는 영의정 유전이 타계하고 영의정자리는 공석이었지만, 그 자리를 대신해 좌의정 이산해가 맡았고, 이어 그가 영의정에 올라 우의정과 좌의정으로 권력이 수직 상승한 유성룡과 함께 동인 정권을 이뤘고, 이어 유성룡이 5년동안 영의정 자리를 차지하여, 동인 정권을 공고히 했다. 또 이어 동인계인 이원익과 이산해가 영의정 자리에 올라 동인 권력을 탄탄히 다진다. 이 기간 죽은 송강 정철에 대한 공세가 집요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잠깐이었지만 서인계인 윤두수가 영의정 자리에 올랐지만, 매일 조정에서 동인들의 집요한 공세로 "윤두수를 체직하라"는 공세에 몰리고, 결국 두 달도 안돼 물러나야 했다. 게다가 송강 정철에게 유리했을, 기축옥사 기록이 통째로 사라진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 선조를 수행하던 조존세 · 박정현 · 임취정 · 김선여 등 4명의 사관이 사책을 불구덩이에 집어넣고 줄행랑을 쳤기 때문이다. 이들 4명의 사관은 모두 동인계였다..
기축옥사 기간 정철을 귀양보낸 뒤 사관마저 모두 동인으로 바꾼 것이다. 이 때문에 선조 즉위년(1567년부터 임진왜란 직전(1592년 3월)까지의 역사기록이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기축옥사 관련 사초기록도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중 가장 형편없는 <선조실록>이 된 것이다.
많은 당시 선비들이 동인들의 무함에 맞서, 송강 정철의 올곧음을 주장하고, 동인들의 왜곡된 파행에 항변하고 나섰다. 송강 정철은 충직함 때문에 시속 사람들에게 해독을 받아왔는데, 송강이 이미 죽은 뒤에도 당로자(当路者)에게 씹혔는바, 당로자가 그의 관작을 추탈하려고 하나 정엽이 옥당(玉堂)에 있음을 두려워하여 감히 발설하지 못하다가, 끝내는 정엽을 무함하기를 “정모(鄭某, 정엽을 말함)가 장차 상의 앞에서 정철의 관작 추탈하자는 논의를 막을 것이다.”하고는, 먼저 정엽을 공격하여 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