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다른 지점에서 같이 근무를 함께 했던 지점장이 전화가 왔다. 그 지점장은 망원동에 처음 지점장으로 승진해서 발령받아 근무하고 있었다. "나하고 같이 망원동에서 근무해보지 않을래" 나를 알고있던 지점장은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자기와 같이 근무하자고 전화를 했다. 부천에서 근무하는것 보다는 망원동에서 근무하는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강을 건너 근무해본적이 없었다. 몇칠 후 인사이동 시즌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망원동으로 발령 받았다. 지점장 집과 내집이 같은 방향이라 지점장 차를 얻어 타고 출퇴근을 했다. 그만큼 지점장과 나사이가 좋았다. 은행일도 잘 풀려나갔다. 그러던중 은행에서 노동쟁의를 하는 사건이 처음 발생했다. 은행에서 노동쟁의를 한다는것은 그 당시 생각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은행은 공기업이었고 준공무원처럼 생각되던 시절이었다. 첫 노동쟁의는 점심시간 1시간을 일을 하지 않고 모두 같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은행은 점심시간에도고객을 접객해야 해서 점심을 교대로 먹고 있었다. 지점장은 나를 불러 직원들이 노동쟁의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나는 그말을 따를 수 없었다. "지점장님 제가 혼자서라도 점심시간에 고객들을 응대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쟁의는 인정해 주십시요" 지점장은 당신이 그럴줄 몰랐다고 노발대발 했다. 그러나 모든 직원이 참여하는 쟁의를 나로선 막을 힘이 없었다. 아마도 본점에서 지점장들에게 쟁의를 금지하란 지시를 내렸던것 같다. 행원들은 3~4일 정도 쟁의를 이어갔다. 점심시간에는 나와 지점장, 차장 3명이 손님들을 응대했다. 쟁의에 대한 안내를 해선지 고객들이 많이 오지 않아 별일 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나 지점장과 나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같은 지점에서 근무하기가 심적으로 어려웠다. 회사든 은행이든 업무가 어려운것보다 사람과의 관계가 더 어려웠다. 나는 그 전까지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과 큰 일없이 두루두루 잘 지냈다. 그러나 업무 외적인 쟁의가 벌여졌고 원튼 원하지 않았든 다른직원들과 함께 동참해야 했다. 직원들중에 일부는 내가 점심시간에 고객을 접객하는것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점장과 직원들 사이에서 최소한 일을 하며 아무일 없이 이 시기가 지나가길 바랬다. 서너달 있다 지점장이 다른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떠났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음의 짐을 내려 놀 수 있었다. 1994년 10월 성수대교가 붕괴되었다. 다리 중간이 떨어져 나갔고 다리위에 있던 버스, 승용차가 한강으로 떨어져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다리 중간이 떨어져 나가다니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사후약방문이라고 한강에 있는 다리들을 전수 조사했다. 나는 양화대교를 이용해 출퇴근을 했는데 양화대교도 위험하다고 보수공사를 했다. 마곡동에 살고 있던 나는 올림픽대로만 들어서면 길이 막혀 출퇴근 시간이 30분 이상 지체되었다. 그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대구지하철에서 화재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럼에도 그런 대형사고에서 배운것이 하나도 없는지 세월호가 침몰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그리고 이태원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참으로 안타깝다. 피지도 못하고 사그러진 젊은 목숨이 너무도 많다. 안전불감증은 없어져야 할 병이다. 사고가 일어날것 같은 장소, 행위는 여러번 감시해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안전이 최우선임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나는 6개월 정도를 고생고생하며 망원동지점을 다니다 역곡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아무런 빽도 능력도 없던 나는 시외곽을 전전하며 은행생활을 했다. 1997년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변곡점이 되었던 IMF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뱔생한 최대 위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물론 나에게도 인생 최대의 변화가 찾아왔다. 1997년 11월 22일 김영삼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국제통화기금의 자금 지원체제를 활용하겠습니다. 이에 따른 다방면에 걸친 경제 구조조정 부담도 능동적으로 감내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중략) 지금은 누구를 탓하고 책임을 묻기보다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통을 분담하여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나무위키 내용 참조)"
아시아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우리나라도 굴지의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가 났다. 그 당시 기업체들은 은행에서 약속어음이나 당좌수표를 받아 거래대금을 지급하고 있었다. 만기일 되어 수표가 돌아오면 그 대금을 은행에 입금해야 했다. 그러나 자금사정이 좋지 않던 기업체들은 대금을 입금하지 못하고 부도를 냈던것이다. 나도 거래했던 회사가 수표를 막지 못하고 부도를 내는것을 보았다. 은행 업무시간 중에 대금을 입금해야 함에도 업무시간이 지나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입금하겠습니다 라고 기다려 달라는 업체가 많았다. 그러나 7시 8시가 지나도 입금이 되지 않아 업체도 애가타고 나도 애가 탔다. 은행에서는 그날 입금된 수표들을 모아 인근 은행연합체에 보내야 했다. 그러면 그 수표들을 다음날 분류해서 각 발행지점으로 배송했다. 그 수표가 돌아오면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그 시간이 오래걸리면 은행연합체에 부도를 알리고 되돌려 보내야 했다. 그러니 입금을 한도 끝도 없이 기다려 줄 수 없는것이다. 심지어는 10만원이 없어서 부도가 나는 경우도 보았다. 자금이 안돌아간다는 소문이 나면 기간이 남아 있는 수표, 어음도 결제해달라고 난리가 났다. 결제대금을 받지 못해 부도를 내고 그 부도는 또다른 부도를 불렸다. 연쇄부도였다. 지금과 달리 부채비율이 매우 높았다. 빚도 재산이라고 은행에서 될 수있는 한 최대한의 자금을 융자 받아 사업체를 운영했다. 대출을 많이 해줬던 은행들도 휘청휘청했다. 그러다 마침내 은행도 자금을 지급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은행도 부도를 내고 망해버린것이다. 은행이 망하다니 있을수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 신설은행이 많이 탄생다. 동화, 동남, 평화등이 새로 생겼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벌어지자 이 은행들이 전부 문을 닫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제일, 신탁, 서울은행 등 기존 민간은행들도 합병을 하게되었다. 그 당시 뉴스에 제일은행을 그만두어야 하는 직원이 출연, 눈물로 인터뷰를 했다. "눈물의 비디오" 은행직원이 눈물을 흘리며 타의로 은행을 그만 다녀야 하는 상황에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꼈다. 다행히 내가 다니던 주택은행은 문을 닫을 상황이 아니었다. 주택은행에서는 동남은행과 평화은행을 인수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은행이 무너질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국가가 부도가 나는 사태가 발생했으니 은행이 무너지는것도 현실이 되고 말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거리를 헤맸다.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줄을 놓는 사람들도 많았다. 왜? 이런일이 벌어졌는지 그 당시에는 알기가 어려웠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다니던 직장을 잘 다니고 월급을 받아 저축하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그렇게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반적이고 평범한 일상이 무너졌다. 온세상에 비상등이 켜지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이 정답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하는 무시무시한 사태가 발생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