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杜陵集] 解題
李 源 杰
[두릉집]은 봉화의 선비 이제겸(李濟兼 : 癸亥, 숙종 9, 1683 ~ 壬戌, 영조 18, 1742)의 시문집(목판본 4권 2책)이다.
1. 생애
두릉 이제겸(1683 ~ 1742)의 본관은 眞寶, 자는 善卿이며, 호는 杜陵이다. 그는 醴泉郡 孤山里에서 吏曹參議를 역임한 부친 李東標와 모친 안동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릉은 어려서부터 부친 난은의 강직한 성품을 이어 받아 모든 행동에 신중했다.
14세 때(1696년)에 부친이 삼척부사로 재직할 당시 부친의 任所를 방문하였는데, 그곳에는 명승지가 많았지만, 그는 그런 곳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학업에만 열중했다고 한다. 16세 때(1698년)에 모친을 여의고 애통해 하며 예를 다했다. 이어 17세 때(1699년)에는 조모상을 당했으며, 이어 18세(1700년)에는 부친상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두릉은 봉화로 이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에 일가 친척이 없었던 관계로 상례를 자문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의문나는 점을 창과 벽에 기록해 두었다가 지나가는 선비들에게 물어 보고는 의문 점을 해결했다고 한다.
두릉은 부친상을 마치고 부친이 살아 계실 때 면학하여 입신할 것을 당부한 점을 명심하여 아우 晦兼과 함께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렇게 면학한 두릉은 32세였던 1712년(숙종 38년)에 사마시에 합격을 하게 되었다. 이어 42세인 1724년(경종 4년)에 童蒙敎官이 되었으며, 이듬해 43세인 1725년(영조 1년)에 增廣別試에 합격하였다. 45세인 1727년(정조 3년)에는 栗峯道察訪에 임명되었다. 두릉의 출사는 이렇게 미관으로 시작되었지만 희망적이었다.
그러나 두릉의 불행은 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두릉이 율봉도찰방으로 근무한 이듬해 1728년(정조 원년)에 李麟佐(? ~ 1728)가 영조의 즉위로 少論이 실각하자, 불평 세력을 규합하여 密風君 坦을 추대하여 그 해 3월 청주에 잠입하여 충청도 병마절도사 李鳳祥을 죽이고, 대원수라고 자칭하고는 진천․죽산․안성 등으로 진격하다가 都巡撫使 吳明恒 등의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두릉은 이들이 청주를 점거할 무렵에 말숫자를 파악하느라 沃川 增若館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윽고 두릉은 변란의 소식을 접했다. 말은 이미 빼앗겨 버렸고, 허술한 역으로 수많은 적도를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두릉은 오명항의 군문으로 달려가 전말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옥천군수와 함께 병사와 말을 정돈하고는 관군을 기다리는 한편 영남의 동지들에게 통보하고 의거하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내 적도는 토벌되고 말았다. 이에 두릉은 驛隸를 각읍으로 보내어 잃었던 말을 모두 되찾았다. 그러나 持平 姜必愼의 誣啓로 인해 宣川에 유배되고 말았다. 여기서 두릉은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50세인 1732년(영조 8년)에 이르러 중신 洪致中․趙文命 등은 이인좌 난이 발생할 당시, 두릉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는 신원 주청에 힘입어 提川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두릉은 거기서 3년의 유배 생활을 하고 난 뒤인 53세였던 1735년(영조 11년)에 방면되어 귀향 조치되었다. 방면된 두릉은 거주지를 入鹿洞으로 옮기고 작은 연못을 파고 꽃을 심고는 후학을 길렀다. 두릉은 거주지를 따라 자호를 滄浪子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당시 訥隱 李光庭과 江左 權江과 도의로 친교하였다고 한다.
두릉에 대한 신원은 그의 종말기였던 59세(1741년, 영조 17년)에 이루어졌다. 승지 元景夏가 영조에게 두릉의 선친 난은이 仁顯王后 孫位時에 상소를 올려 부당을 극간했던 점과 아들 제겸이 무고를 입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신원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신원을 호소하였다. 이에 정조는 난은을 褒增하고 제겸을 등용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두릉은 성은에 감격하였으나, 출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선대의 행적을 수습하는 한편 경전에 잠심하였다. 이렇듯 두릉은 미관직을 시작으로 8년 동안의 한 많은 유배 생활을 거쳐 7년 정도 귀향 생활을 하다가 1742년(영조 18년)에 60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다.
2. 문집의 체재
[杜陵集]은 권1에 序文은 없고, 시 52題 77首(5언 절구 6수․5언 고시 1수․7언 절구 56수․7언 율시 14수)와 輓詞 5題 11首가 실려 있다. 권2에는 書簡文 33篇(外舅金偮․趙德隣 5편․金濟州 3편․金良鉉․柳聖和․柳敬時․金琦․金爾甲․權萬․柳聖久․權進士․權正泰․趙仲久․任命台․白守一․洪熙績․金時儁․李知遠․李守約․再從兄休仲 3편․再從弟仁兼․從姪堉塾․李光姪․李重延․仲兒重實)과 제문 5편(趙德隣․外舅金偮․權述夫․權通卿․淑人金氏) 이 실려 있다.
권3에는 記文 2편(岐谷齋菴記․孤山齋舍上樑時記)과 跋文 2편(喪祭禮節要跋․書同門稧帖後)․策文 3편(問犯顔敢諫中當求伏節死義之士․問誦詩讀書不知其人可乎․問財聚民散)․家狀 1편(先考通政大夫行承政院右副承旨懶隱府君家狀)이 실려 있다.
권4는 「附錄」으로, 哀辭 1편(李光庭 撰)․輓詞 12편(權萬․柳聖和․金景必․河瑞龍․權正始․權墉․邊有達․權蕙․柳春榮․權蘊․丁志恒․李徵兼)․祭文 6편(權蕙․李朸․申命岳․李義兼․族姪垕․李重光)․墓誌(李漢膺 撰)․行狀(姜必孝 撰)․墓碣銘(柳致明 撰)이 실려 있다.
3. 문집의 내용
[杜陵集]은 권1의 시 77수는 절구가 62수인데, 그 중 7언이 70수를 차지한다. 두릉이 7언시를 즐겨 썼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전체 시의 내용은 전반부의 일부 작품들 가운데 자손에게 학문하기를 권장한 시(示兒五首)에서 우애와 예의를 견지한 채 학문에 몰두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명절을 당해 여러 감회를 차분하게 읊은 경우(淸明․寒食․九月)를 제외하면, 이어지는 시 대부분이 유배 이후의 고독한 심정과 가족에 대한 안부와 주변 정황 등에 대한 술회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시편에 그의 고단한 생활의 편린들이 담겨 있는데, 대부분 비관적이고 체념적인 내용이다. 몇 가지로 나누어 내용을 정리하면, 유배지에서 만난 인물에 대한 감회 표현(次宋都事逢源韻․復次前韻寄宋都事藥泉之行․次宋都事韻․次桂萬長韻)이다. 자신이 고독한 처지에 놓인 만큼 극한 상황에서 지우나 안면을 익힌 인물에게 차운한 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별의 정서 속에 고독한 유배 심정도 드러나 있다.
그리고 유배 온 자신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고 관심을 기울인 인물에 대한 감사의 심정을 표현한 시(秋夕主倅送一床饌忘送酒戱贈․酒泉校院以數百靑銅見饋以此謝之)에서는 명절 절기에 별미를 제공한 후의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내었다. 이외에 대부분의 시에서는 유배지에서 겪는 고독한 심정과 우울한 마음이 표현되고 있다. 신세 한탄 조의 처량한 곡조와 고향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 자녀들의 면학을 염려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시폭에 배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릉의 시에서 無眠․孤臣․心愁․無友․寒․寂․奈何․斜日․滄浪․獨 등의 시어들이 즐겨 구사되고 있다. 그래서 두릉은 때로는 자신의 식자우환을 탓하는가 하면(贈諸生製策二首), 자유를 희구하면서 하늘을 훨훨나는 흰 갈매기에 가탁하기도 하였다(辛亥十月之望旺登待變亭呼韻三首). 유배지에서 접한 지우의 죽음은 그에게 처절감을 더하였다. 두릉은 11편의 만사에서 亡者에 대한 슬픔을 자신의 슬픈 현실과 연계하여 비정한 심정을 표현해 내고 있다.
권2의 서간문 33편의 전반적 내용은 대개가 유배기 이후의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서두에 먼곳까지 서찰을 보내 온 상대방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곡진하게 표현하였다. 자신의 현재 안부 및 상대쪽의 근황을 묻는 내용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간결한 문체로 이루어져 있다. 문학이나 예설에 대한 문답 등의 편지글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유배기의 어려운 현실 여건이 상대와 자신의 안부를 묻는 정도의 서찰 왕복으로 이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 두릉은 설사로 매우 고생했던 것 같다. 유배지의 병약하고 애절한 심정이 시에서처럼 편지글에서도 익히 파악되고 있다. 한편 유배지의 가장으로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答金濟州戊申」에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겪는 정신적 고독과 방황의 정서는 「答金琦」에서 돋보인다. 친족들에게는 자식들의 면학을 염려하는 심정과 선대의 유묵을 수습하여 문집으로 정리하는 데에 소홀하지 말라고 연신 당부하고 있다. 이어지는 제문 5편에는 범인이 망자를 애통해 하는 이상으로 처연한 두릉의 심정이 표현되어 있다.
권3의 「岐谷齋菴記」는 종가에서 선조들의 겸양지덕을 추모하여 세운 岐谷齋菴에 대한 기문이다. 문면에 퇴계의 유훈과 덕망을 강조하고 있다. 「孤山齋舍上樑時記」는 선인들이 수축한 재사가 허물어짐을 애타게 여기던 후손들이 이를 고산재사로 이전하여 수축한 것에 대한 기문이다. 문면에 간략한 수축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喪祭禮節要跋」는 朱子家禮․朱子語類 및 우리나라 예설을 참고하여 예설을 익히는 지침으로 활용되기를 바란다는 편찬 목적을 밝혔다.
「書同門稧帖後」는 동문수학하는 학계를 조직하고 쓴 글이다. 「問犯顔敢諫中當求伏節死義之士」는 군자의 출처의리와 신하로서의 직무에 대해 언급한 글이다. 「問誦詩讀書不知其人可乎」는 두릉의 유학자적 면모를 느끼게 하는 글이다. 주자학을 신봉하려는 그의 심지가 담겨 있다. 「問財聚民散」은 두릉의 애민 정서가 반영된 글이다. 위정자나 목민관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여 백성을 핍절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재물을 백성들에게 골고루 시혜하는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先考通政大夫行承政院右副承旨懶隱府君家狀」에는 부친 난은의 효행과 강직․청렴한 관료․선비 형상이 부각되어 있다.
권4의 哀辭와 輓詞에는 평소 두릉과 친밀한 교제를 가졌던 李光庭과 權萬의 우정어린 슬픔이 곡진하게 담겨 있다. 이 외에 지우들이나 친족들에 의해 지어진 제문에는 불행하게 살다 간 두릉의 평생 행적이 슬프게 재구성되어 있다. 「墓誌」와 「行狀」․「墓碣銘」 등에서 두릉의 율봉도찰방 당시의 불행과 이에 대한 신원․선대들의 청렴한 형상이 강조되어 있다.
4. 마무리
[두릉집]은 비교적 작은 분량의 문집으로 시와 서간문에서 두릉이 유배기에 겪었던 고독한 형상이 돋보인다. 아울러 그의 가족애와 우정미도 드러나고 있다. 8년 간의 긴 유배 생활로 인해 두릉의 인생은 좌초되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불행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현실의 불행을 거부하지 않고 초연히 수용하였으며, 체념과 달관적 자세를 유지하였다.
따지고 보면, 그는 이인좌의 난에 의한 간접적 피해자라고도 볼 수 있다. 때문에 두릉집은 당대 조정과 영남 사림들간의 역학 논리에 의해 전개되었던 정치 행태와도 일정한 연관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안동의 야인 세력을 형성하였던 눌은 이광정을 비롯한 영남 사림층과의 심도있는 검토를 거쳐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두릉집은 유배 문학적 가치를 지닌 문집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