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5. 14
'그는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이 문장에 가장 적합한 20세기 인물이 로버트 카파(1913~1954)다. 베트남 타이빈에서 종군 취재 중 지뢰를 밟고 41년의 생애를 마친 사진기자.
종군기자로서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처음으로 적진에 들어가는 군부대를 종군할 것인가.
그의 대담하고 두려움 없는 태도는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경이로운 사진으로 보답했다. 그는 카메라로 수많은 죽음과 공포를 담았다. 독자들은 카파의 사진에 열광했고, '라이프'지를 비롯한 언론사들은 카파에게 최고의 사진 값과 함께 두둑한 취재비를 지급했다.
▲ 로버트 카파
노르망디 상륙작전인 D데이 취재를 보자. 그는 어떻게 오마하 해변의 떨리는 공포를 포착했을까. 연대 참모들과 함께 가느냐, 제1파 공격부대와 가느냐. 대부분의 종군 기자들은 연대 참모를 선택했다. 그는 제1파 상륙정에 탔다. 목숨을 걸었다.
사람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영향을 주고받으며 알에서 깨어나고 성장한다. 시인 장석주는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라고 노래했다. 사람의 인생도 다르지 않다. 보헤미안의 인생을 산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 속에 들어 있는 태풍과 천둥과 벼락을 만나본다.
▲ 게르다 타로
게르다 타로(Gerda Taro 1910~1937)
베를린에서 파리로 온 헝가리인 앙드레 프리드만은 일거리가 없어 극빈자 생활을 했다. 프리드만은 쓰러지기 직전의 싸구려 호텔 방값도 내지 못해 몰래 빠져나올 때도 있었다.
몽파르나스의 카페를 전전하던 시절에 게르다 타로를 만났다. 타로 역시 나치를 피해 파리로 망명 온 여성이었다.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다. 그는 타로에게 사진을 가르쳤다.
타로는 그가 무한한 잠재력이 있지만 지나치게 자유분방해 절제력이 약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타로는 그의 대담한 매력이 전문가적인 전략과 결합된다면 비즈니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두 사람은 사진 에이전시(중개) 회사를 차린다. 회사 '조직'이 재미있다. 타로는 비서 겸 영업사원, 앙드레는 암실 직원. 에이전시 대표는 프랑스를 방문 중인 미국 사진가 로버트 카파. 가공의 인물 카파가 두 사람을 고용한 형태였다.
헝가리 이름을 숨기고 미국 사진가 '로버트 카파'로 영업에 나서자 사진 값은 금방 두 배 이상 받게 되었다. 그의 사진은 '로버트 카파'로 팔려나갔다. 타로는 150프랑 이하로는 사진을 팔지 않았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두 사람은 스페인으로 간다. 그가 타로에게 종군취재를 권유한 것이다. 신혼이었던 조지 오웰 부부도 비슷한 시기에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카파는 최전선의 참호에 들어갔고, 거기서 '쓰러지는 병사' 사진을 찍었다. 스페인 내전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사진! 카파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카파가 전선에서 빠져나와 잠시 파리로 돌아와 있을 때 게르다가 공화군 탱크에 치는 사고를 당한다. 스물여섯의 최초의 종군여기자가 사망했다. 1937년 7월30일 파리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카파는 2주 동안 방에 틀어박혀 죄책감에 죽음을 되새김질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종군기자는 필연적으로 다른 언론사 소속 종군기자들과 어울리며 움직일 수밖에 없다. 카파는 수차례에 걸쳐 스페인내전(1936~1939)의 여러 전장을 취재했고, 역시 종군기자로 온 헤밍웨이를 만난다. 이미 헤밍웨이는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1926)로 유명한 상태였다. 그는 헤밍웨이와 테루엘에서 처음 인사를 나눴다. 이후 그는 여러 전선에서 헤밍웨이와 마주친다.
1940년 10월, 그는 미국 아이다호주 선밸리에 있었다. 미국인의 최대 관심사의 하나였던 헤밍웨이의 세 번째 결혼 취재였다. 상대는 저널리스트 겸 소설가 마사 겔혼. 헤밍웨이의 명성은 절정에 있었다. 스페인내전을 배경으로 다룬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출간 일주일 만에 5만부가 팔려나갔고, 소설의 영화 판권이 10만달러에 팔렸다.
그가 헤밍웨이를 재회한 것은 1944년 4월, 런던에서였다. D데이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돌자 런던은 세계의 종군기자들로 들끓었다. 그는 호텔 바에서 헤밍웨이와 조우했다. 헤밍웨이가 열네 살이 많았지만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술과 모험을 좋아했고 지적이었으며 여자를 끄는 매력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밤새도록 런던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셨다. 얼마 후 헤밍웨이가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쳤을 때, 머리에 붕대를 매고 있는 '파파'의 사진을 찍은 것도 그였다.
▲ 잉그리드 버그만
잉그리드 버그먼(Ingrid Bergman 1915~1982)
파리가 해방되면서 2차 세계대전의 전세는 급격히 독일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할리우드의 톱스타들이 유럽의 미군 부대 위로공연을 위해 파리에 모여들었다. 마를렌 디트리히, 잉그리드 버그먼 ….
잉그리드 버그만의 숙소는 파리의 최고급 리츠 호텔. 그녀는 '카사블랑카'(1942),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 '가스등'(1944)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파파라치들이 리츠호텔을 에워쌌다.
1945년 6월 6일 오후 그녀의 스위트룸 문틈으로 메모 한 장이 들어왔다. 로버트 카파와 미국 작가 어윈 쇼가 그녀에게 저녁 식사를 초대하는 위트 넘친 메모였다. 그녀는 두 사람의 이름을 보고 식사 초대에 응하기로 했고, 리츠호텔의 지하 바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곧바로 샹젤리제에 있는 레스토랑 푸케로 이동했다.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 등장하는 유명한 레스토랑이다. 그녀는 잘생긴 치과의사 남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루한 남편에게서 마음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몽마르트로 가서 밤새 춤을 추었고, 어윈 쇼가 먼저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센강을 거닐었다. 첫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두 사람이 재회한 곳은 베를린. 그는 베를린의 참상을 취재하기 위해서, 그녀는 위문 공연을 하기 위해 베를린을 찾았다. 그녀는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채 카파의 취재 현장을 따라다니며 자유를 만끽했다.
두 사람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고, 파리에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이며 충동적인 카파에 매료되었다. 레스토랑 푸케, 리츠호텔 술집, 센 강변에서 두 사람은 은밀한 데이트를 즐겼다. 그녀는 '일거리가 없는 종군기자' 카파에게 할리우드에 와서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1945년 말 할리우드. 그녀는 초조했다. 카파가 나를 잊은 건 아닐까. '오명' 촬영을 앞두고 그녀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앞에서 카파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카파는 미국으로 왔다. 두 사람은 뉴욕으로 맨해튼에서 밀회를 한다. 그녀는 카파와 결혼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카파는 어디에 매여 살지 못하는 자신은 결혼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답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카파만이 예외였다. 그렇지만 카파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비상근 남편' 카파에 만족하기로 한다. 그때 카파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취재 대상인 '한국'이 들어있었다.
그녀가 할리우드의 상업성에 실망하고 예술적인 영화를 갈망하고 있을 때 등장한 이가 이탈리아 영화감독 로베르트 로셀리니다.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를 보고 비로소 예술영화에 눈을 떴다. 로셀리니는 유부남이었다. 그녀는 1949년 이탈리아에서 로셀리니 감독과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태어난다. 훗날 영화배우로 대성하는 이사벨라 로셀리니다.
버그만과의 사랑이 끝난 뒤에도 파멜라 처칠 같은 당대의 여인들이 카파 주변을 맴돌았다. 비비안 리, 헤디 라머 같은 할리우드 배우들이 위험한 자유인을 사랑했다.
천재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노마드(nomad)다. 새로운 자극을 찾아 끊임없이 떠돌며 안주(安住)를 거부한다. 카파는 노마드의 전형이었다. 뛰어들 전쟁이 없으면 도박에 빠지곤 했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앙리 마티스, 소설가 존 스타인벡·어윈 쇼, 영화감독 존 휴스턴, 사진가 카르티에 브레송·잉게 모라스 …. 그와 함께 작업하며 깊은 우의를 나눈 사람들이다.
천성(天性)대로 살며 불멸의 20세기 초상을 남긴 사람! 그가 로버트 카파다.
조성관 / 작가 author@naver.com @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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