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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장 시동생과 형수 간의 치정
백면라살과 구양적, 구양봉은 모용쟁을 데리고 함께 집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 고장에서 오래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하고 구씨 할멈과 가시한테 귀띔한 후 모두 산으로 올라갔다. 얼음 동굴 아래에는 돌로 지은 작은 집이 있었다. 기근을 만난 난민들이 임시로 거처하던 집이 아니면 산에서 양을 치던 사람들이 남겨 놓은 거처였다. 그들은 이 돌집에 거처하면서 백타산 쪽의 동정을 살폈다.
모용쟁은 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어쩐지 싫었다. 그녀는 날마다 밖에 나가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았다. 산너머에는 백타산장이 있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멀리 있는 대 사막까지 바라보였다. 하지만 아스라이 넓은 사막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모용쟁은 저 사막 너머에 있는 강남의 고향 땅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정암의 멋들어진 지붕과 붉은색 나는 담벽과 푸른 기와들이 눈앞에 떠오르고,
법당에서 울려 나오는 종소리와 목탁 소리들이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돌집에는 자그마한 방이 여섯 개나 되었다. 그녀는 자진하여 제일 작고 누추한 방을 차지했다. 밤이 되면 그녀는 누가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았다.
구양적도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구양적은 밤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 상념에 잠기곤 했다. 그럴때면 은은한 달빛이 수심에 잠긴 그의 몸을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바위 아래에서 그는 한숨을 내쉬며 돌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언제나 여섯 개의 방이 모두 어두워져서야 자기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방에 돌아가 누워도 그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구양적은 바위 위에 앉아 산 아래 있는 백타산장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인간이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동물이다. 난쟁이만 보아도 그렇다. 어떻게 사람을 수집하여 궤짝 속에 가둬 두고 장난감이나 인형처럼 가지고 놀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거리를 하면서도 불안한 생각이 들지 않을까? 난쟁이뿐만 아니라 나 자신 역시 알 수가 없다. 나는 분명히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데도 함께 지낼 수도 없고 가서 볼 수도 없다. 내가 사랑하는 여
인이 얼음동굴 속에서 날마다 추위와 고독 속에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나는 왜 그녀를 안아 주고, 애무해 주고,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여 주지 못하고 이곳에서 쓸쓸한 밤을 지새는 것인가.'
그는 모용쟁에 대해서도 미련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모용쟁에 대해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는 모용쟁이 무서웠다. 그녀의 쌀쌀한 눈길이 무서웠다. 그는 모용쟁의 눈에서 일종의 절망을 보았던 것이다.
모용쟁은 그에 대해 절망했다. 명색이 남편이라는 사람이 한밤에 빠져 나가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더니 결국은 이런 봉변을 당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그녀는 구양적을 원망하며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구양적도 모용쟁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구양적이 한참 시름에 잠겨 있는데 익숙한 내음과 함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적아, 여기서 뭘 하고 앉았느냐? 색시 방에는 가지 않을 작정이냐?"
구양적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백면라살이었다.
"날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내가 자기한테 죄를 지었다고 여기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적아, 네 마음을 알 만하다. 네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니 내 가슴이 쓰리구나……."
구양적은 가슴이 뭉클했다. 굳센 성미를 가진 그였으나 백면라살의 따뜻한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백면라살은 그를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로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누구보다 구양적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백면라살은 가볍게 구양적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며 말했다.
"적아, 죄는 너한테 있는 게 아니라 나한테 있다. 그날 밤 내가 어떻게든 널 네 아내한테 돌아가게 했어야 했는데……."
백면라살은 모용쟁이 난쟁이한테 납치되어 간 것은 그날 밤 자기가 구양적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적아, 네가 너무 괴로워 보이는구나. 내가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니……?"
구양적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쓰렸다.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모용쟁은 자기를 소 닭 보듯 하며 함께 있는 것조차 꺼려 하지 않는가. 구양적은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백면라살은 구양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적아, 내가 보기에 넌 네 아내와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쩐지 아쉬워하는 눈치로구나."
구양적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백면라살은 구양적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넌 모용쟁을 네 아우와 짝지어 주어야 한다. 내가 가서 설득해 볼까?"
구양적은 백면라살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사부님은 이런 일을 가지고 아우를 찾아서 어떻게 말하겠다는 것인가?
백면라살은 결심한 듯 말했다.
"적아, 이 길밖에는 없는 것 같다. 내가 구양봉을 만나 말해 보겠다. 지금 당장 말이다."
구양봉은 돌집 안에서 한창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다. 그의 공력은 상당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 그는 이제 그 어떤 무림의 명수들과 겨룬다 해도 두려울 게 없었으며 합마공만은 이미 스승을 능가했다고 여겼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는 대뜸 형이 아니면 형의 스승일거라고 짐작했다. 아니나다를까,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바로 형의 스승이었다.
백면라살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구양봉 앞에 다가오더니 말했다.
"자네와 할말이 좀 있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자네한테 하려는 말은 자네들 구양씨 가문의 앞날과 큰 관계가 있는 거네. 내 말을 들어 볼 생각이 있나?"
"선배님께서는 형님의 사부이신데 저 같은 까마득한 후배가 어찌 귀담아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양봉은 이렇게 대답하며 백면라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얼굴만 봐서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난 적이한테 네가 장래에 꼭 대성할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젠가 자네가 무예를 익히겠다고 했을 때 난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 내가 그렇게 한 걸 너는 내가 널 잘못 봤거나 혹은 너에 대해 경계심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게 아니야. 그때 나나 네 형은 네게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처지였지. 이제 솔직히 말할 때가 온 것 같아. 나와 적이
는 그 얼음 동굴에서 한사공(寒邪功)을 연마했지. 한사공을 익히다 보면 인체에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사내는 온전한 사내구실을 못하고 여인들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교합조차 불가능해지지. 이건 우리들이 언제까지든 덮어 두고 싶었던 한사공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하지만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내가 이 사실을 오랫동안 자네한테 숨겨 왔던 것은 내가 여자이기 때문
이었어. 너도 이 점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백면라살의 말은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여자가 아이를 낳을 수 없고 남자가 남자 구실을 할 수 없다면 그 이상 고통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형은 왜 동생인 나에게조차 전혀 내색하지 않았을까? 나에게 알리기가 싫어서였을까?'
구양봉의 머리 속에는 이어 모용쟁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용쟁은 그의 형수이다. 형이 사내 구실을 못한다면 형수는 어찌하는가? 구양봉은 이제야 모용쟁이 그토록 수심에 잠겨 있었던 까닭을 다소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늘 혼자서 먼 하늘가를 바라보며 자기의 고향인 강남 땅을 그리워하는 것도 아마 이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백면라살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왕 얘기가 나온 거, 네게 솔직히 말하마. 짐작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마는, 나와 적이는 이미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을 만큼 각별한 사이다."
구양봉은 갑자기 멍청해졌다. 그는 백면라살의 말뜻을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각별한 사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구양봉은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서 백면라살의 얼굴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백면라살은 구양봉의 멍청한 표정을 보며 말없이 웃었다. 그 웃음은 아주 처량한 느낌을 주었다.
"너는 선비라서 무인들의 어려운 점들을 모를 수가 있어. 내가 서역에 온 것은 마음의 고통을 어쩌지 못해서야. 한때 난 누군가를 사랑했었어, 그가 준 마음의 상처가 너무 깊어 난 그 길로 얼음 동굴에 들어가 천년 묵은 현빙 위에서 얼음 찜질로 상처를 치료하게 되었지. 하루는 네 형이 얼음 동굴 속에 떨어진 걸 내가 구해 됐지. 그때부터 우린 서로 의지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렇게
10여 년을 함께 지내다 보니 나 역시 여자이고 네 형 역시 남자인지라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싹트기 시작했지. 우리 둘의 마음은 날로 가까워졌어. 우린 이제 서로 헤어져서는 살 수 없을 정도지. 더구나 우리 둘은 아까 말한 것과 같이 다 같은 불구의 몸이야. 그래서 둘의 마음이 더욱 가까워졌는지도 모르지. 말하자면 동병상련인 게야. 우리들의 고충을 너도 얼마쯤 알 수 있으리
라 생각한다."
구양봉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조실부모한 그에게 형은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형은 과묵한 성격이었지만 매우 융통성이 있었다. 그래서 구양봉은 어려서부터 형을 따르고 존경했다. 그에게 있어서 형은 사내 중의 사내였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형에게 이처럼 큰 불행이 오래 전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었을 줄이야. 형의 불행은 어느 한때의 불행이 아니라 일생
의 불행인 것이다. 구양봉은 할말을 잃은 채 고통스러운 생각에 잠겼다.
백면라살이 말을 이었다.
"언젠가 적이가 나서서 모용 낭자를 구한 것은 전적으로 너를 위해서였지……."
"저를 위해서라니요?"
백면라살은 처량한 음성으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적이가 내게 말한 적이 있지. 모용 낭자가 네게 아주 호감 있어 하고 좋아하는 눈치라고 말이야. 내가 적이에게 모용쟁을 구해 주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 그런데 너는 중원에 갔다가 늙은 독물 신독행한테 납치당해 생사불명이 됐지. 나와 적이는 북국에 달려가 찾았으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어. 우린 유운장이 불타서 폐허가 된 것을 보고는 자네가 죽은 줄로만 여겼지. 그후
로 적이는 구양씨 가문의 대를 잇는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했지. 그를 보다못한 내가 그에게 모용 낭자와 성혼하라고 권했어. 그 까닭은, 첫째로는 모용 낭자가 천하기한(天下奇寒)인 빙잠지독( 蠶之毒)에 걸려서 그 독을 빼지 않으면 머지않아 죽게 될 형편이었고, 둘째로는 네 소식을 알 수 없으니 적이라도 구양씨 가문의 대를 이을 방도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지. 대를 이으려면 적이가 장가
드는 방법밖에 달리 뭐가 있었겠어?"
구양봉은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자기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백면라살의 말을 들으며 한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백면라살과 형은 모두 불구의 몸으로 정상적인 남녀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러한 형이 모용쟁과 결혼한들 무슨 수로 대를 이을 수 있다는 말인가.
백면라살은 구양봉의 마음을 읽은 듯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을 혼인시키기로 한 데는 나대로 계획이 있었지. 기회가 있으면 투량환주지계를 써서 사내를 데려다가 씨를 받게 할 생각이었지."
구양봉은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불쑥 물었다.
"선배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들을 형님께서도 다 알고 계신가요?"
백면라살은 쓴웃음을 지었다.
"적이 성격에 이런 사실까지 다 알면 큰일나게?"
구양봉은 다시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의 머리를 퍼뜩 스치는 게 있었다. 백면라살이 빙빙 둘러대면서 많은 말을 했지만 내용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그는 백면라살을 똑바로 보면서 쌀쌀한 어조로 물었다.
"선배님께서 씨내리로 찾는 사내가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
그의 목소리에는 야유와 함께 분노가 섞여 있었다. 백면라살은 갑자기 허탈하게 웃어대더니 역시 쌀쌀하게 대꾸했다.
"네가 아니라는 법도 없지. 구양봉과 구양적은 본디 친형제가 아닌가? 네 일은 곧 네 형의 일이고 형의 일은 곧 네 일이 아니냐? 형제간에 무슨 분별이 있다는 거지?"
구양봉은 할말을 끊었다. 백면라살은 정말 놀라운 여자였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찌 이런 일을 생각이나 해낼 수 있겠는가?
구양봉은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모용쟁을 좋아했으며 모용쟁 역시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형수는 어디까지나 형수가 아닌가? 시동생과 형수가 동침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만 같았다.
백면라살은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우묵한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웃는 모습이 어쩐지 섬뜩했다.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네가 유운장에 가서 북강의 일절(一絶)이라고 불리는 늙은 독물 신독행의 제자로 있었다는데, 그게 정말이냐?"
구양봉이 그렇다고 대답하니 백면라살은 냉소했다.
"노독물 신독행은 한평생 나쁜 짓거리만 하고 돌아다닌 대악인이야. 그자는 스스로가 기꺼이 악인이 되려 했지. 네가 그런 자를 스승으로 모셨으니 악인 중에서 최고는 아니어도 둘째는 가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방금 네 태도를 보니 여간 실망스럽지 않군. 이런 손톱만한 일에도 그렇게 융통성이 없으니 어떻게 대악인이 될 수 있겠느냐?"
백면라살은 백방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구양봉은 여전히 망설여졌다. 형님은 어디까지나 형님이시다. 형님의 아내와 어떻게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단 말인가? 강호에 떠다니며 뭇계집들과 놀아날 수는 있지만 형님의 아내와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백면라살은 구양봉의 기색을 살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대송조(大宋朝)는 지금 엉망이 됐어.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는데, 그 어느 왕조 때보다 쓸데없는 규범만 잔뜩 늘어왔지. 정이(程 )와 정호(程顥), 그리고 주희(朱熹) 이 세 망나니들은 자기들은 금준미주로 질탕거리고 밤마다 삼처사첩(三妻四妾)들을 끼고 자면서 백성들한테는 하지 말라는 것뿐이지. 도대체 무슨 이학의 더러운 법도를 지키라는 게야? 자넨 총명한 사람 같은데 어째서 이
따위 사기에 말려들려 하나? 자낸 모용쟁을 차지하고 싶지 않은가? 모용쟁에게 행복을 주고 싶지 않아? 구양씨 가문이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모용쟁과 살아야 해. 남녀간에 둘이 좋아하면 그만이지 다른 게 무슨 상관인가? 모용쟁한테서 아직 얼음누에의 독이 채 빠지지 않았으니 자네의 그 신공으로 말끔하게 해독을 시켜 줘야 해. 자네가 정말로 모용쟁을 좋아한다면 이 길 말고 다른
길이 없어."
子양봉은 머리를 숙이고 생각을 거듭했으나 여전히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구나 다 인정할 만한 악인이었다. 합마공으로 그의 사형인 석초수와 벙어리 형제들을 죽였고, 또 백타산장의 대사막의 4걸을 죽였다. 특히 쌍환 기노의 두 팔을 생으로 뽑아서 잔인하게 죽여 버린 그때부터 그는 완전한 악인이 되었다. 그는 남들이 자기에 대해 무슨 말을 지껄여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
은 형님인 구양적과 관계되는 것이므로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모용쟁을 유혹하러 찾아갈 수 있겠는지, 모용쟁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는지, 그럴 경우 형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구양봉은 임안에도 다녀오고 중원 땅도 두루 밟으면서 많은 미인들을 보아 왔다. 그러나 고요한 밤중에 잠 못 이루며 여인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리따운 모용쟁의 모습뿐이었다. 그는 사막에서 모용쟁과 함께 보낸 그 낮과 밤들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으며, 삼단 같은 머리를 드리우고 빙옥같이 새하얀 알몸으로 난쟁이 임일천의 궤짝 안에 앉아 있던 모용쟁의 모습
은 더더욱 잊을 수가 없었다.
모용쟁은 돌집 안에 앉아 있었다. 한적한 집 안에 등잔불이 가물거렸다. 그녀는 조용히 앉아서 착잡한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구양적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하지만 모용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구양적은 한참 서성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날 밤, 난 사부님한테 갔더랬소……."
모용쟁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구용적과 말하기도 싫을 뿐더러 마주보기조차 싫었다.
구양적은 그러한 모용쟁의 태도를 보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속에 담고 있던 말들을 모두 털어 놓고야 말리라고 결심했다.
"난 사부님을 보러 갔댔소. 임자와 성혼한 뒤에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으니 사부님께서 외로워하실까봐……."
모용쟁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으나 양미간이 경련을 일으키듯 파들파들 떨렸다. 그녀는 뭔가 말하려다가는 이내 그만두었다.
"……그날 밤 웬 영문인지 가슴이 뛰고 살이 떨려서 나는 사부님께 무슨 변고가 있지 않나 생각했더랬소. 내 예감은 틀림없었소. 내가 얼음 동굴에 들어가 보니 사부님께선 이미 혼절해 쓰러져 있었소. 사부님께선 스스로 경혈을 막아 얼음 바위 위에 누운 채 거의 죽어 가고 계셨지. 조금만 늦게 갔더라면 사부님께서는 돌아가셨을 거요……."
모용쟁의 두 눈이 번쩍 뜨이더니 입에서 욕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부님, 사부님……. 말끝마다 사부님 타령이고 꿈속에서까지도 잠꼬대를 하며 사부님을 찾으시더군요. 사부님이 그렇게 맘에 들면 사부님하고 결혼할 것이지 왜 나하고 결혼했어요? 자기 사부님을 맘에 두고 왜 다른 여자는 건드려요? 그렇게 사부님을 떠나기 아쉬워하면서 나를 아내로 맞아들인 건 무슨 심보예요? 사내구실도 못하는 주제에 아내는 왜 맞아들였어요?"
욕설을 다 퍼붓자 그녀는 돌침대에 쓰러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얘기가 이쯤 이르자 구양적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성례를 올린 첫날밤 수줍음을 타던 모용쟁은 벽을 마주하고 앉아 구양적이 거듭 불렀지만 상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의 마음속에는 사랑의 감정이 싹터 말은 안 해도 구양적이 달려 들어 자기를 끌어안아 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얼마 후 구양적은 모용쟁이 바라던 대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한쪽 팔로는 그
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건장한 두 다리로 그녀의 하반신을 휘감은 뒤 서툴게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저고리와 치마가 벗겨져 나가고 속곳마저 벗겨내자 그녀는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구양적도 일어서서 자기의 옷을 활활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다시 덮쳐 들었다. 모용쟁은 부끄러움과 흥분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그녀의 정신은 황홀해졌고 마음은 허공에 둥둥 떠오르는 듯했다. 구양적의 손
은 모용쟁의 젖가슴을 주무르다가 성급하게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용쟁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뜨거운 욕정과 두려움이 한데 뒤엉킨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구양적은 다음 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당황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는 허둥대는 손길로 모용쟁을 애무하며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로 자신의 하반신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마음만 앞설 뿐 도무지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기세 좋던 사내다운 격정은 어디론가 사
라지고 온몸의 맥이 풀렸다. 어느덧 구양적의 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 했다. 그는 점점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갔고 끝내는 온몸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모용쟁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모용쟁은 두 눈을 꼭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마치 시뻘겋게 달아오른 숯불에 냉수를 끼얹은 듯 참담한 기분이었다.
첫날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모용쟁은 밤새도록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구양적은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은 이러한 사정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벙어리 냉가슴 앓듯 가슴만 앓았다. 송대에는 이학이 크게 성해 남녀간의 정사는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했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구양적은 어떻게 하면 모용쟁과 원활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궁리해 보았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무능함만 확인하게 될 뿐이었다. 그는 자기한테도 아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백면라살이 모용쟁을 아내로 맞으라고 권했을 때 한사코 거절하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와 모용쟁의 사이가 원만한 부부 사이가 되기를 한없이 갈망했다. 그는 더욱
열심히 모용쟁을 안아 주고 애무해 준다면 모용쟁이 마음을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구양적은 제 생각만 했지 모용쟁의 심정은 헤아리지 못했다. 구양적이 넌지시 손을 뻗치면 모용쟁은 질겁을 해서 소리치곤 했다.
"건드리지 말아요! 만지지 말라니까요!"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나니 구양적은 더 이상 모용쟁과 한 이부자리에 누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모용쟁은 마음이 처량하고 고통스러울수록 자기가 사막에서 상습적으로 구양봉을 놀려 주고 골탕을 먹인 것은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유운장의 패거리들이 구양적과 무예를 겨루어 이기고는 구양봉을 인질로 데려가겠다고 할 때에 모용쟁은 자기도 모르게 구양봉을 자기 남편이라고 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것은 평소에 자기가 품고 있던 생각을 무의식중에
드러낸 것으로 결코 우연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녀는 백타산장에서 구양봉이 죽음을 각오하고 자기를 구출하고자 뱀 상자에 뛰어들었을 때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강남땅 사랑스러운 정암을 저버리고 강호에서 떠돌아다니게 된 것도 사실은 마음에 꼭 드는 사내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구양봉은 지금은 이미 무림 영웅들 중에서도 일류 고수가 되었다. 그런 구
양봉과 함께 살게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뜻도 같고 취미도 비슷하고 사람이 그토록 풍류스러우니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구양적은 모용쟁이 마음을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일찍부터 임자한테 말하려고 했었소. 난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는데 하루는 얼음 동굴에 빠졌소. 바로 사부님께서 날 구해 주셨지. 이때부터 나와 사부님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소. 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 사부님은 나의 부모이자 나의 아내요, 난 사부님의 제자이자 사부님의 남편이오. 이 속에 얽힌 사정을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렵소……."
모용쟁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아찔했다. 구양적과 백면라살의 눈치로 봐서 이들의 사이가 심상치 않음을 모르진 않았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과 짐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구양적에게 직접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양적은 모용쟁의 기색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도 알고 있소, 임자가 아우를 좋아한다는걸. 임자가 정말로 그를 좋아한다면 그와 함께 살아도 되오……."
이 말에 모용쟁은 버럭 화를 냈다.
"닥쳐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나를 도대체 뭘로 보는 거예요? 방금 당신 입으로 당신의 사부님을 사랑한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어떻게 나하고 결혼할 수 있었어요? 날 구하려고 그랬다구? 말도 안 돼. 모두들 미쳤어요. 이런 미친 짓거리가 세상 천지에 또 어딨어요?"
구양적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는 모용쟁을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아무리 화를 내고 성깔을 부려도 타고난 아름다움은 여전히 사내의 마음을 현혹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구양적은 노기 띤 모용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쓰려 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부끄럽게 생각하오. 하지만 난 임자를 진심으로 좋아하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임자와 결혼까지 했겠소. 날 이해해주길 바라오……."
모용쟁은 눈물을 흘릴 뿐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구양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눌러앉아 있기가 멋쩍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언제 와 있었는지 백면라살이 침대에 자리를 펴고 있었는데 아주 정성스러운 모습이었다. 깔끔하게 펴 놓은 이부자리를 흡족하게 내려다보면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됐어. 이쯤이면 방이 아무리 추워도 견뎌 낼 만할 거야."
백면라살의 거동을 뒤에서 지켜 보고 있던 구양적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천하에 여인들이 많고 많아도 날 사랑하고 보살펴 주는 이는 사부님밖에 없구나. 사람이란 양심이 있어야지. 내게는 이런 사부님이 계시는데 왜 자꾸 딴 생각을 하려는 걸까?'
백면라살은 자기의 머리를 이불에 대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적아, 내가 사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난 벌써 10여 년 동안이나 이불 속에서 자는 게 어떤 맛인지를 모르고 살아왔지 뭐냐."
그녀는 이불 위에 살며시 누웠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삼단 같은 백발이 어깨로부터 흘러내려 침대 가에 폭포처럼 드리워졌다. 그녀는 황홀한 듯 이불을 자기 품에 꼭 끌어안고는 얼굴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잠자코 지켜 구양적의 마음은 쓰리고 아팠다.
'사부님께선 얼음 동굴 속에서 10여 년이나 남자와 함께 이부자리에 드는 맛을 모르고 살아오셨어. 그 쓰라리고 아픈 마음을 내가 위로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구양적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백면라살은 그제야 구양적이 온 것을 알고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다정스럽게 말했다.
"적이가 왔느냐?"
"사부님……."
"적아, 내가 명전을 만난 것은 일시의 정이었지만 너를 만나서는 한평생 정을 쏟았다. 적아, 네가 나한테 다시 한 번 여자 노릇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니? 난 오랫동안 사내와 이부자리를 같이하는 맛을 모르고 살아왔다."
구양적은 성큼성큼 다가가서 가볍게 백면라살 수라아의 머리를 안았다.
"수라아, 내가 그대를 사부님이라고 부르고 그대는 나를 적이라고 부르는 건 너무나 어색하오……."
백면라살이 머리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구양적은 말머리를 돌렸다.
"참, 아우한텐 말을 했습니까?"
"그래, 다 말했다."
구양적은 어쩐지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러니 뭐랍디까?"
백면라살은 초조해 하는 구양적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적아, 넌 왜 스스로 마음고생을 사서 하느냐? 너한텐 모용쟁같은 고운 아내가 어울리지, 나같이 늙고 추한 여자를 뭐에 쓰겠니? 네가 나와 함께 살다보면 금방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사부님, 전 이미 모용쟁한테 말했습니다……."
구양적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라 하자 백면라살이 가볍게 그의 입을 막았다.
"적아, 모용쟁 이야긴 그만두어라. 제발, 빈다……."
겨울의 밤은 길고 추웠다. 창 밖의 으스스한 달빛은 수심 많은 사람들을 더욱 울적하게 했다. 한참을 울고 난 모용쟁은 허탈한 기분이 되어 멍청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마음속의 말들을 누구한테든지 털어놓지 않고는 못 견딜 것만 같았다. 강남 땅 정암에 다시 가서 들려 오는 독경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보풀이 인 누런 경서들을 앞에 놓고 불경 공부나 했으면 싶었다. 하지만 정
작 정암에서의 고독하고 삭막한 나날들을 되새겨 보니 그것도 못할 짓 같았다. 불문(佛門)은 조용하고 깨끗한 세계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사는 재미는 도무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정암에서 뛰쳐나왔는데 어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으랴?
그녀는 천천히 방에서 걸어 나왔다. 밤하늘을 쳐다보니 상현 달이 걸려 있는데 구름들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는 듯했다. 반달이 뜬 이 밤의 정취는 구양봉과 함께 지냈던 사막에서의 그날 밤과 너무도 흡사했다. 그녀는 멍하니 달을 올려다보면서 그날 밤 자기와 구양봉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다가 무심코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모용쟁은 문득 웃음을 멈추며 생각했다.
'구양적은 지금 백면라살과 함께 있는 게 분명해. 그렇다면 나라고 구양봉을 찾아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어?'
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구양봉의 방으로 달려갔다.
모용쟁이 방에 들어섰을 때 구양봉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무예 수준이 구양봉쯤 되면 기(氣)가 온몸에 흐르고 신(神)이 몸 밖에 돌아다닐 수 있으므로 비록 자더라도 경각(警覺)은 늦추어지지 않는다. 그는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지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구냐!"
모용쟁은 가볍게 웃더니 침대 맞은편에 앉아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잠드신 걸 깨웠나 봐요?"
모용쟁의 음성에 구양봉은 흠칫 놀랐다.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모용쟁의 예쁜 두 눈이 달빛에 빛나 보였다. 그는 이 눈길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더듬거렸다.
"잠든 지 얼마 안 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구양봉은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해져 옴을 느꼈다. 그는 형의 스승이 찾아와서 하는 말을 듣고 이 세 사람 사이가 아주 미묘함을 알게 되었다. 형은 스승을 좋아하지만 모용쟁도 싫어하지는 않는다. 형의 스승은 형을 좋아하므로 모용쟁과 형이 헤어지길 바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모용쟁의 마음은 어떠한지 구양봉은 알 수가 없었다. 구양봉은 모용쟁의 생각이 몹시 궁금했으나 명
색이 시동생과 형수 사이인지라 차마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모용쟁은 구양봉보다 더 총명하고 눈치가 빨랐다. 그녀가 정암에서 대담하게 탈출해 나온 것만 보아도 범상한 아녀자들과는 달랐다.
'내가 왜 스스로 내 손발을 묶어야 하지? 구양적과 백면라살 수라아는 나를 속였어. 내 주관이 있는 이상 난 그 두 사람의 농간에 의해 아까운 청춘을 허송하지는 않을 테야.'
모용쟁은 생각을 가다듬고 말문을 열었다.
"나를 구하려고 백타산장에 달려왔고 뱀 상자에까지 뛰어들었으니 무엇이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모용쟁은 진실을 담아 마음 깊숙이 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뜻을 비쳤다. 구양봉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었다.
모용쟁은 침대에 다가가 열띤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변경에서 그자들이 아우님을 붙잡아 가려 하자 난 아우님을 내 남편이라고 했지요. 그 일이 기억나세요?"
구양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모용쟁이 변경 땅에서 용감히 나서서 자기를 구출하려 한 행동에 대해 구양봉은 마음속으로 늘 고맙게 여겨 오던 터였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대담히 나서서 구양봉을 제 남편이라고 했으니 어지간한 용기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형수님이 저를 구해 주려 애쓰시던 그 은혜를 전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에 모용쟁은 눈물을 흘렸다. 이 순간 모용쟁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방……방금 절 뭐라고 불렀어요? 형수님이라 했나요? 누가 형수예요?"
모용쟁은 기가 막히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한참을 웃고 난 그녀는 거칠게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누가 형수란 말이에요? 당신 형이 어떤 사람인 줄 아세요? 사내가 사내 구실을 못해도 사내라고 할 수 있어요? 말해 봐요! 형이 사내라야 내가 형수 자격이 있는 게 아녜요? 내가 어쩌다 당신 형 같은 사람과 결혼해서 당신한테 형수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구양봉은 얼결에 모용쟁의 뺨을 후려갈겼다. 모용쟁은 그대로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여려서 부모를 잃고 형님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 온 그에게 형은 부모나 다름없었다. 그래선지 누구라도 형을 흉보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릴 때부터 주먹을 쥐고 달려들어 휘둘러 대던 그였다.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라 해도 형을 무시하는 태도만큼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방바닥에 쓰러진 모용쟁은 구양봉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모용쟁은 차가운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이젠 날 치기까지 하는군요?"
모용쟁은 몸을 일으키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말해 봐요! 처음부터 날 미워했지요? 겉으로는 날 이해하는 척, 선비 같은 얼굴을 하고 처음부터 날 미워했어! 게다가 내가 형과 결혼했으니 이젠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 망나니 같으니라구. 차라리 날 죽여요! 차라리 날 죽이라구!"
그녀는 분에 못 이겨 와락 달려들어 구양봉의 상투를 거머쥐었다.
순간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아 상대방의 숨결이 서로의 얼굴에 혹 끼쳤다. 모용쟁은 두 눈을 부릅뜨고 구양봉을 쏘아보았으나 목소리는 흥분으로 묘하게 떨려 나왔다.
"차라리 날 죽여……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모용쟁은 상투를 거머쥔 손을 여전히 풀지 않고 구양봉의 행동을 기다리는 듯 눈을 감았다.
"잘 들어둬! 난 저승에 가서도 너를 저주할 테야!"
구양봉은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울고, 웃고, 떠들고, 저주하고, 애교를 부리는 식의 온갖 자태가 모두 한 여자의 몸에서 동시에 표출될 수 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온몸의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듯 뜨거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모용쟁, 내 머리를 놓아……."
그러나 모용쟁은 계속 약을 올렸다.
"재주가 있으면 날 죽여! 늙다리 독물의 제자라면서? 천하에서 소문난 악종인 네가 왜 날 못 죽여? 뭣 땜에 난쟁이 임일천한테서 날 구해 냈어? 가만 놔 두었으면 난 벌써 죽었을 게 아냐? 그럼 이런 일로 고통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 아니냐구!"
말을 마친 그녀는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설움에 겨운 그녀는 더는 말을 못하고 눈물이 흥건한 눈으로 구양봉을 쏘아보았 다.
구양봉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모용쟁, 빨리 나가 줘! 나를 더는 괴롭히지 마. 네가 계속 이러고 있으면 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제발…….'
그는 마치 얼빠진 사람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두 손도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러나 모용쟁은 그의 상투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구양봉은 참다못해 버럭 고함을 쳤다. 그 고함소리에는 가슴속의 초조와 불안이 섞여 있었다. 구양봉은 더는 견딜 수 없는 듯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모용쟁을 번쩍 안아 올렸다.
"빨리 떠나, 빨리 이곳을 떠나……."
그녀는 구양봉의 팔에 안긴 채 그의 열띤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구양봉은 모용쟁을 품에 안고 마치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좁은 방안에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우왕좌왕했다. 그는 허둥지둥 방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본 뒤 부랴부랴 빗장을 질렀다.
그를 지켜 모용쟁의 가슴이 후두둑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얽혔다. 가쁜 숨을 몰아 쉬던 구양봉은 모용쟁을 다시 가뿐히 안아 돌침대 위에 눕혔다. 모용쟁은 잠자코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구양봉이 손가락을 펴서 모용쟁의 혈도를 찌르려 했다. 모용쟁은 비로소 그를 제지했다.
"난쟁이도 이 짓거리를 하고 그 녀석도 이 짓거리를 하더니 당신까지 이러는군요."
모용쟁은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구양봉은 주춤 손을 멈추었다.
"이봐요, 날 좋아하세요? 어서 말씀하세요."
구양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신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내 혈도를 찌르지 않아도 돼요. 이 몸은 당신 거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구양봉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끓어오르는 욕망으로 반쯤 미칠 지경이 돼 있었다.
"절 다시 안아서 편히 눕혀 주세요. 그리고 천천히, 가볍게 다루어 주세요, 난 당신이……."
구양봉의 입술이 모용쟁의 입술을 덮쳐 눌렀다. 모용쟁은 경련을 일으키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격렬한 흥분을 느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구양봉은 모용쟁의 부탁대로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다루었다. 모용쟁의 몸매는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고 황홀했다. 난쟁이의 대청에서 궤짝 안에 앉아 있는 그녀의 알몸을 보았었지만, 지금 침대 위에 조용히 누워 있는 모용쟁을 바라보는 기분은 그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구양봉은 모용쟁의 입술을 더듬으면서 두 손으로는 앞가슴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그는 한 손으로 모용쟁의 등을 받쳐
웃옷을 벗겨 낸 뒤 서둘러 아랫도리마저 벗겨 냈다. 구양봉은 너무나 황홀하여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저 멍청하니 모용쟁의 알몸을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갑자기 멍청해진 구양봉을 올려다보던 모용쟁은 그만 발끈 화를 냈다.
"바보처럼 왜 보기만 해요? 당신도 빛 좋은 개살구, 남자 구실을 못하는 남자인가요?"
"그녀의 말에 구양봉의 피는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그는 거친 숨을 내뿜으며 탐욕스럽게 모용쟁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서 구양적은 백면라살을 정감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그녀의 어깨와 등허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피부의 감촉이 손을 통해 온몸에 전해졌다.
"두 사람이 오늘 밤에 어떻게……."
백면라살은 말문을 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내가 네 아우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내심으로는 매우 기뻐하는 것 같았어.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더라만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 눈치야……."
구양적은 이 말을 듣고도 묵묵부답이었다.
백면라살은 구양적의 불쾌한 눈치를 알아차리고 말머리를 돌렸다.
"적아, 어서 말해 봐. 넌 날 좋아하느냐?"
백면라살은 자기의 머리칼로 구양적을 애무해 주며 유심히 표정을 살폈다.
구양적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면라살이 또 물었다.
"적아, 난 너한테 시집갈란다. 나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겠니? 만일 네가 나를 아내로 맞아들이면 난 계속 이 세상에서 살겠어. 우리 함께 강남 땅에 가서 깨끗하고 조용한 고장에 자리잡고 살자꾸나. 밥짓고 길쌈하면서 오붓한 살림을 꾸리자꾸나. 만일 네가 거절한다면 난 너를 죽여서 얼음 동굴 속에 넣어 두겠다. 그리고 나도 따라죽겠어. 그럼 우리 둘이 얼음 동굴 안에서 영원히 살수
있지 않겠니?"
"좋습니다. 사부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구양적은 웃으며 대답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달은 여전히 밝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구양봉과 모용쟁은 이윽고 뜨거운 격정에서 벗어났다. 모용쟁이 손을 구양봉의 어깨에 걸쳤다. 그녀는 몹시 피곤하고 졸렸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남자를 경험했다. 사내의 거칠음과 사내의 부드러운 정을 처음으로 동시에 맛보았다.
그녀의 온몸은 땀에 흠씬 젖었고 삼단 같은 머리는 침대맡에 드리워졌다. 그녀의 두 눈은 전에 없이 반짝였고 얼굴은 온통 흥분과 만족감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구양봉은 더없이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모용쟁이 부드럽게 그의 팔을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당신을 찾아가라고 했어요. ……우리가 왜 그들을 신경 써야 해요? ……그들도 우리처럼 함께 있을 거예요. 정 가려면 날이 밝아서 가도 돼요. 날 더 안아줘요……."
모용쟁은 두 눈을 살포시 내리감고 구양봉의 애무를 기다렸다.
구양봉은 물끄러미 모용쟁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모용쟁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부랴부랴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갔다.
모용쟁은 그의 뒷모습에 섭섭한 눈길을 주다가 자기도 옷을 입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형의 방 앞에 이르렀다. 형과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구양봉은 당황해서 급히 모용쟁을 불렀다.
둘은 부랴부랴 얼음 동굴로 향했다.
동굴 속에 들어온 두 사람은 형과 백면라살을 소리쳐 부르기 시작했다.
"형님―! 선배님―!"
구양봉의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 메아리쳤다. 거듭 불렀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구양봉은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형도 떠났고 백면라살 수라아도 떠나 버렸다. 그들 둘은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었다. 아마 그들은 살 만한 고장을 찾아가 함께 살림을 꾸리면서 잘 살아갈 것이다.
모용쟁은 몸이 오싹해지며 추워졌다. 무슨 영문일까? 방금 전에 구양봉과 땀을 흘리면서 살을 섞고 난 뒤로는 어쩐지 조금만 추워도 몸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어지간한 추위에는 추운 줄을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얼음 동굴 속에서 그녀는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오돌오돌 떨면서 말했다.
"이봐요, 그만 나갔으면 좋겠어요. 더는 못 견디겠어요. 난…… 난 추워서 죽겠다구요……."
구양봉은 그녀를 품에 안고 몸을 날려 동굴에서 빠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