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과응보 이야기
우리는 나쁜 행위를 한 사람이 방송에 보도되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게 될 거야 혹은 엄벌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또 나쁜 행위를 한 사람이 그 대가를 받은 경우를 보고, 그것은 因果應報야, 事必歸正(사필귀정: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감)이야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因果(인과)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이르는 말로, 善惡의 業(행위)에 따라 그에 해당하는 果報(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흔히 罪 값을 치른다는 개념을 나타낼 때 자주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인과응보라고 하며, 과보는 인과응보의 줄임 말이다. 불교에서 因果應報(인과응보)는 전생(前生)에 지은 선악(善惡)에 따라 현재(現在)의 행(幸)과 불행(不幸)이 있고, 현세(現世)에서의 선악(善惡)의 결과(結果)에 따라 내세(來世)에서 행(幸)과 불행(不幸)이 있는 일로 쓰이고 있다.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이 진리는 단순하게 그냥 받아넘기기 십상이다. 쉬운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선을 널리 베풀게 되면, 사람들이 친밀감을 느끼며 가까이하고 싶어 한다. 반대로 악한 일을 하게 되면 죗값을 치르게 되고, 원망이 뒤따르게 되어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모두 떠나고 멀리하게 된다. 이 어찌 지극히 순수하면서도 깊이 받아들여야 할 진리가 아니겠는가?
“전생은 금생의 과거요, 내생은 금생의 미래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있는 이상, 전생·금생·내생이 있게 마련이다. 이를 일러 삼셰윤회(三世輪廻)가 있기 마련이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삼세 윤회는 인(因)·연(緣)·업(業)·과(果)로 구성된 필연적인 연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因이라는 것은 씨앗(因子)을 말하는 것이고, 緣은 연지(緣地)를, 곧 씨앗이 뿌려지는 밭을 의미하며, 業(업)은 밭에 뿌린 씨앗이 결실을 맺을 때까지 가꾸는 행위를 말함이댜. 이렇게 인과 연과 업이 모이면, 결과는 자연스럽게 이루어(成) 진다. 밭은 기름진 밭을 선택했느냐? 씨는 품종이 좋은 것을 선택했느나? 정성스럽게 거름도 주고, 비·바람·추위 등으로부터 잘 보호할 수 있도록 정성을 얼마나 들였느냐에 따라 좋은 수확을 거둘 수 있거나 아니면, 소홀히 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빈약하게 수확하거나 아예 수확을 거두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일러 지은 대로 거두고, 지은 대로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즉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인과응보의 법칙을 말함이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있는 것이라 여기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 여긴다. 또한 인과응보의 원리를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 이도 있다. 왜 그런 것인가? 내가 오늘 나쁜 일을 하거나 좋은 일을 했다고 해서, 금방 그 결과가 나에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한 나쁜 일이 수학 공식처럼 내일 혹은 다음날, 한 달 후에 나타난다고 한다면 죄업을 짓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죄를 짓고도 그 결과가 언제 나에게 나타날지 정해진 기간이 없기 때문에 죄을 지은 사람은 잊어버린다. 그래 놓고는 그 결과가 나에게 미치지 않기를 은근히 바란다. 시간이 지나면서 죄를 지었다는 것조차 희미해지고 심지어 죄책감마저 없어지게 된다. 현명한 사람은 죄업의 씨가 되는 因(인)을 만들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언젠가는 재앙이 미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해 놓고 그 결과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늘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지은 행위는 언제 받아야 할지 정해진 기간은 없지만, 반드시 내가 되돌려 받는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적당히 돈도 벌고 고급스러운 승용차도 타고 다니며, 적당한 사치를 즐기며 살다가 가면 그만인 세상이 아니다.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한다면 큰 재앙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항상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선가 나의 행동을 다 보고 있고,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살얼음판이 얼어있는 긴 강을 건너가듯이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건너가야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우주의 진리인 인과법칙을 깊이 믿고 신뢰할 때 험난한 인생의 긴 강을 반성하는 마음가짐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기쁨 마음으로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인과응보의 사례를 소개하기 전에 일타스님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일타 스님(1999년 11월, 세수 71세로 입적)은 충남 공주 태생으로 1933년 출가했다. 친가·외가 합하여 41명의 출가하여 스님이 된 집안이다. 이는 부처님 다음으로 집안 출가자가 많이 배출한 경우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점에서 매우 괄목할 만한 일이라 여겨진다.
아래 인과응보에 관한 내용은, 일타스님의 어머니인 성호 비구니의 업보에 관한 이야기다. 이 사례는 일타스님이 직접 밝힌 내용이다.
일타스님이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과응보 사례 1
1940년대 전반기 우리 가족이 모두 출가한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나의 어머니인 성호(性浩) 비구니는 전생부터 불법에 인연이 많아서인지 출가 전부터 절에 가시기를 좋아하였고, 절에 가서는 절을 하고 살림살이를 마련해 주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 당시 대구 동화사(棟華寺) 내원암(內院庵)은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아주 가난한 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실 때마다 바가지와 작은 그릇, 단지 등 필요한 살림살이를 무시로 사서 날랐습니다.
어느 날 갖가지 살림살이를 소달구지에다 가득 싣고 내원암으로 올라가는데, 짐끈을 제대로 묶지 않아 실은 물건들이 덜거덕덜거덕 흔들렸습니다. 어머니는 끈을 단단히 묶기 위해 수레를 세우고 수레바퀴 옆에 바짝 붙어 서서 끈을 다시 묶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던 소가 갑자기 앞으로 달려 나갔고,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어머니 발등 위로 수레바퀴가 넘어갔습니다. 그때의 수레바퀴는 지금의 고무바퀴와는 달리 나무에다 쇠를 두른 아주 딱딱한 것이었습니다(쇠로 된 수레바퀴). 빈 수레라 하여도 무거운데, 거기다 짐을 실었으니 그 중량이 얼마이겠습니까? 연한 두 발이 사정없이 바스러지는 순간,
어머니는 기절하여 대구 동산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어머니 아프지 않으십니까?”
“두 발등이 다 부서졌는데 안 아프면 되는가?”
가히 백천 겁이 지나더라도 한 번 지어놓은 업은 없어지지 않나니
(家使百千劫 所作業不亡(가사백천겁 소작업불망)
인연이 닥쳐오면 그 과보를 면할 수가 없느니라.
因緣來遇時 果報難免矣(인연래우시 과보난면의)
처녀 시절 사사삼경(四書三經)을 모두 읽으신 데다 말도 잘하고 문자를 잘하셨던 어머니는 아픈 중에도 이 게송을 읊으시며 자꾸 빙그레 웃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리둥절해하는 가족들에게 어머니는 웃는 까닭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발등을 다쳐 기절하는 바로 그 찰나에 닭 한 마리가 퍼덕퍼덕 날개를 치며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3년 전에 할아버지가 집에 오셔서 점심 진짓상을 차리는데, 부엌 안으로 닭 한 마리가 들어와서 먹을 것을 찾아왔다 갔다 하며 목을 넘실거리더구나. 그래서 닭을 쫓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부지깽이(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불이 잘 타도록 나무를 골라주고 들어주는 데 사용하는 도구)를 던졌는데, 그만 닭다리에 정통으로 맞아 다리 둘이 몽땅 부러져 나갔단다. 닭은 크게 소리 내어 울면서 두 다리가 간당간당한 상태로 밖으로 날아 나갔지.………”
기절하는 순간, 닭이 달아나는 영상을 본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그때의 닭이 죽은 다음 지금의 저 소가 되어 악연을 갚는 것’임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때 닭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린 것이 아니듯이 저 소도 일부러 내 발등을 부러뜨리려 한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벌이 달려들자 피하기 위해 갑자기 수레를 끌었을 것이야. 평소였다면 소모는 일꾼에게 그릇들이 움직이지 않게 끈을 좀 잘 매달라고 하였을 텐데, 과보를 받을 때가 되어서인지 이상하게 직접 끈을 조여 매고 싶어졌거든! 이렇게 인과가 분명할 데가 어디 있느냐? 3년 전에 지어놓은 업을 이렇게 빨리 받았으니, 그전에 지은 죄업도 어지간히 갚아진 것이 아니겠니, 나는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인지 한 달 남짓 병원에서 치료하자 바스러진 발등이 완전히 붙었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발이 아프다는 말씀을 한 번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일타스님의 어머니인 경우는 어찌 보면, 3년 전에 저지른 인과에 대해 응보를 빨리 받은 것은, 한 편으로는 그전에 지어놓은 인과가 없었기 때문에 응보를 빨리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과응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그대로 되돌려 받는 것이라는 내용을 어렴풋이 알지만, 마음에 깊게 새기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죄업을 지어 놓고 내가 되돌려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예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갑자기 큰 문제에 봉착하더라도 내가 재수 없어서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상치 않은 어떤 큰일이 발생했을 때 자신의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과거에 지은 業(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에 대해 잊어버리고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고 참회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타스님의 어머니인 성호 비구니의 발등에 쇠바퀴가 지나가서 발등이 다 으스러져 기절하여 대구 동산병원에 입원하였다. 가족들의 걱정과 본인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게송을 읊었던 것은 인과법칙을 철저히 믿고 마음에서 깊이 받아들이고 반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