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천사에게
김형진
얼굴 없는 천사가 올 세밑에도 어김없이 거액이 든 쇼핑백을 전주시 노송동동사무소 옆에 놓고 갔다고요. 쇼핑백에서 쏟아놓은 오만 원 짜리 다발과 커다란 돼지저금통이 토해 놓은 동전이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장면을 보면서 어려운 이웃에게는 인색한 사람으로서는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 뒤 며칠 동안 당신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속을 꽉 메워 답답해 하다가 편지를 씁니다.
해마다 연말이면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이웃돕기 성금 모금 행사를 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성금 액수가 많은 순으로 줄줄이 성명을 열거하는 장면에 이제 우리들은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즈음에는 성금 기사에 별 감동이 일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얼굴을 숨긴 채 거액의 성금을 도시 주변 동사무소 옆 화단에 두고 가다니요. 이런 일은 나 같이 약삭빠른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궁금증을 누를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신문, 방송의 한쪽에 성금 기부자의 성명이 나열될 때 당신은 당신의 성금 마련하기 위해 한동안 분주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했을 테니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었을 겁니다. 지폐는 은행 - 그것도 한 은행에서는 발각될 염려가 있으니 여러 은행을 다니며 인출하고, 나중에는 손닿기 쉬운 곳에 둔 돼지저금통의 무게를 가늠한 다음 쇼핑백에 차곡차곡 담았겠지요. 인적이 사라진 한밤중에 그 쇼핑백을 들고 나가 살금살금 화단 앞에 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정원수 옆에 숨겨 놓고 돌아서는 당신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겉으로는 겁많은 얼굴이면서 속으로는 웃고 있었을까? 마음속 무거운 짐을 부려버린 듯 홀가분한 얼굴이었을까? 남 몰래 성금을 기탁한 경험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당신의 행동을 쉽게 떠올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했다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을 떠올리긴 했지만 어떤 것이 오른손이고 어떤 것이 왼손인지도 분간 못하는 사람이니 리얼하게 다가오지 않음은 마찬가지였고요.
내 짐작에 당신은 대기업체의 회장이나 중소기업체의 사장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투자나 투기를 위한 지출에만 길들여 있을 뿐 이익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지출에는 길들여지지 않은 부류일 테니 말입니다. 그들은 속빈 강정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기 좋아하는 부류일 테니 말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국민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는 정치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화약 냄새를 풍기나 실탄 내놓기에는 인색한 부류일 테니까요.
당신은 소시민일 것입니다. 재래시장에서 장사를 하거나, 포장마차 주인이거나, 간판도 변변치 않은 가게에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음식 - 그것도 아주 서민적인 국밥이나 빈대떡 같은 것 - 을 조리하는 사람일 게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당신은 낯가죽이 얇은 사람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 얼굴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당신을 세상 사람들은 '얼굴 없는 천사'라 이르고요. 그러나 당신이 그 이름에 만족할는지는 의문입니다만.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이 날 때부터 지니고 있다는 오욕五慾중에 재물욕財物慾과 명예욕名譽慾이 있다는 것을 당신도 모르진 않으리라 봅니다. 아흔아홉 섬 가진 사람이 이웃 사람이 가진 한 섬을 빼앗으려 한다는 속답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한 일은 쥐뿔만 한데 이름은 대서특필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 이야기도 들었겠지요. 세상인심이 이러한데 그 거액을 성금으로 내놓고도 얼굴을 감추다니요. 그것도 내리 십사 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그 참을성 또한 대단합니다.
얼굴 없는 천사여, 정말 궁금합니다. 당신은 세상물정 모르는 우매한愚昧漢인가요? 아니면 세상물정을 초월하여 인심 위에 군림하는 도인道人인가요? 당신의 정체가 정말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