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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교회(화도시온교회)역사
▣고창교회(高倉敎會) 역사 6
[3]복음(福音)의 주역(主役)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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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자료 21>윤명삼(尹明三, 1869년생)전도사 초상화
▣ 윤명삼 전도사(尹明三,1869.12.05~1924.6.4)
파평 윤씨(파平 尹氏) 가문의 32세손(世孫)으로 ,경기 화성에서 출생하여,*註22)
*註22)「念坡 尹在根」염파 윤재근 선생 추모집 발간 위원회 P.14
-출생연월일은 호적에 의하면,명삼(明三)은 1869년 12월 5일 출생하여 1924년
6월 4일 56세로 사망했다.-
당대에 강화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그 이유로,그의 집안이 흥선대원군과 관련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할머니의 인도로 형 명운(明云) 과 명삼(明三)형제는 인천 앞바다의 작은 섬인 팔미도(八尾島)로 피신해 조모(祖母) 품에서 자랐다.
조모는 10세 쯤된 손자 둘을 이끌고 인천 앞 팔미도(八尾島)로 이주해 살았고,그 곳에서 노환으로 돌아가자 명삼,명운 형제
는 고아가 되고 말았다. 마침 강화 출신 뱃사람들이 그 곳에서 배를 조선(造船)하고 있었는데,두 형제의 딱한 사정을 보고 강화로 데리고 와서 송강촌 (松崗村,지금의 소루지) 김씨네 집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註23)
*註23) 「念坡 尹在根」염파 윤재근 선생 추모집 발간 위원회 P.14
-윤병문 장로(念坡 尹在根의 조카)의 증언,염파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서.-
이러한 우연한 계기로 명운,명삼 형제는 왕조의 도읍지였고 성지인 강도(江都) 땅 내리 송강촌(松崗村)에 정착하게되었다.
송강촌은 소루지라고 불리우는 바닷가 마을로 당시에는 아직 성뚝공사(일제가 1900년대 초에 농토 확장과 정비사업으로 펼친 간척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으므로,지금 같은 농지가 넓은 벌판은 형성되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주민들은 대부
분 배(새우잡이 일명,멍텅구리배)를 가지고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사진자료 22>윤명삼 전도사의 처 김민례(金敏禮
1879生) 사모>
「念坡 尹在根」염파 윤재근 선생 추모집 발간 위원회 P.17
명운,명삼 형제는 송강촌 김씨 집안에서 고깃배를 타고 바닷가에 나가서 고기잡는 일을 해주며 성장하였다. 명운(明云)은 남평 문(文)씨, 명삼(明三)은 안동(安東)김씨 김민례(金敏禮)와 결혼했다. 김민례(金敏禮)는 같은 마을에 살던 김영규(金
榮奎) 둘째 딸로 명삼(明三)보다 10살 연하(1879년생)였다.
첫째, 순근(舜根),
둘째,형근(亨根),
셋째,준근(俊根),
넷째,마리아(馬利亞)
다섯째,재근(在根 ; 호 염파,제헌국회의원),
여섯째,성근(成根)
일곱째,밀라(密羅) 등 5남 2녀를 낳았다. *註24)
*註24) 「念坡 尹在根」염파 윤재근 선생 추모집 발간 위원회 P.14~15
염파(念波)의 외조부인 김영규(金榮奎)에게는 아들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래서
1916년 외손자인 형근(亨根),즉 염파의 둘째 형을 외손봉사하게 한 것이다.김영규는 1903년
1932년 53세로 사망했다.
넷째,마리아(馬利亞)와 일곱째,밀라(密羅) 등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에는 여자이름을 서양식(기독교 성경 인물)
으로 짓는 일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일찌기 그는 내리 송강촌에서 강화읍 잠두교회(현,강화중앙감리교회)까지 40리 길을 걸어서 다녔고,그 곳에서 존스(George H.Jone/趙元時,1867~1919) 선교사를 비롯하여 당시 '강화의 바울'이라고 불리웠던 前 강화부 진위대장 이동휘(李東揮) 같은 기독교계 와 정치 사회운동가들과 교류(交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註25)
*註25)「念坡 尹在根」염파 윤재근 선생 추모집 발간 위원회 P.16~17
-이동휘는 원래 함경도 단천 출신으로 고종의 호위를 담당한 무관이었다. 그 후 26세 때 강화부 진위대장
으로 부임했다. 지방군대 최고 지휘관으로서 강화와 서울 교회지도자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기독교 신앙에
점점 교화되었으며,청일전쟁(1894년)과 아관파천(1896년), 러일전쟁(1903년)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겪으면
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길이 총과 칼이 아니라, 교육과 신앙에 있음을 깨닫고 고종을 찾아가 관직을
사퇴하고,1904년 고종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보창학교'를 강화에 설립 운영했다. 1905년 당시 교사 6명,학생
이 200여 명에 이르렀다.
보창학교가 설립된 이후 강화 지역에는 학교와 학생 수가 급증하여,많을 때는 사립학교가 72개에 달했는데,
이 중 32개가 기독교(감리교) 계통의 학교였다.명삼(明三)도 내리에 학교를 세우고,지역 유지(有志)들인 유
경근(劉景根,월곳리=月串里),유봉진(劉鳳鎭,),윤명삼(尹明三,內里 松崗村),김광찬(金光 瓚,양도=良道 造山里)
등은 이동휘(李東輝)와 의형제 관계를 맺고 청소년 교육과 민족 근대화 운동을 전개했다.
또, 1908년 마을의 유지들(前 의관 朱潤昌,李泰榮,金性權,丁益燮,金陽權,咸命植,金南植 등)과 뜻을 모아
정규창(부인 김영애 속장)씨의 넓은 사랑채에 리산학원(尼山學院)을 설립하였다.
이동휘는 1904년 강화에 첫 '보창학교'를 설립하교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1906년 조산 합일학교,1907년 흥천 보창학교 설립,1908년 석모도 부흥여학교 설립,교동 동화 학교 설립,
오상리 보창학교 설립,동막리 동막학원 설립 등 이동휘의 연설자리와 눈물이 떨어진 곳곳마다 학교가 설립
되었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이동휘의 영향은 강화의 민족 정신을 일깨우기에 컸다.
내리 리산학교(尼山學校)는,
교장:주윤창(朱潤昌),
부교장:윤명삼(尹明三),
학감:정익섭(丁益燮),
교사:유봉진(劉鳳鎭),김양권(金陽權),김성권(金性權),주장훈(朱章勳),주시민(朱時民),조경복(趙景福) 등이 맡아서 학교
를 운영하였다.
당시에는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3년)을 겪으면서 강성해 지는 일본의 힘에 상대적으로 무력해진 군대의
힘으로는 나라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다는 군인으로서(강화부 진위대장)의 절망감과 허탈한 심경의 한계를 느낀 나머지
1905년 고종황제를 찾아 뵙고 그 직(진위대장)을 사임하면서 '보창'이라는 학교명을 하사받아 강화 곳곳에 보창학교를
설립하던 이동휘('강화의 바울'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던 독립운동가이자 전도자이자 선각자)의 영향을 받고 있던 마을
유지들이었다.
그리고 56세때인 1924년 내리 마리산 자락에 구식 기와집으로 50여칸을 지어학생수 150여명을 교육하는 본격
교육시설로 확장하는 등 민족 의식을 고취하며 신학문을 가르쳐 민족혼을 계승코자 하였다. .*註26)
*註26)「念坡 尹在根」염파 윤재근 선생 추모집 발간 위원회 P.18~19
정규은(丁奎恩=丁益燮의 子)장로의 증언록(證言錄):
『니산학원(尼山학院)의 설립당시 차일을 치고 면민들이 운집(雲集)한 가운데 이동휘(李東輝)씨는 그 앞에 모인 망국(亡國)
백성들의 그 측은한 모습들을 둘러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듯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니 모인 군중들도 같이 울고 나서
강연이 시작되는데 '강토의 왜놈들에게 임시 빼앗겼으나 우리의 혼은 뺏지 못할 것이니 자녀들을 교육시켜 똑똑하고 강
한 국민으로 만들어서 왜놈들을 몰아내자!'고 열변(熱辯)을 토(吐)했다.
이 때 면 유지(有志)들은 거의 다 모여서 이 기막힌 애국강연에 감복했다.그런데 동산촌(東山村)에 사는 심주부(沈主
簿)는 보이지 않았다.이동휘씨가 화를 내어 "그 놈 잡아오라!"고 호통을 쳐 젊은이들이 데리고 오는데 심주부의 거동(擧
動)은 관(冠)을 쓰고 긴 담뱃대를 들고 팔자(八字)걸음으로 거만하게 입장하는 것을 본 이동휘씨는 큰 소리로 "저 놈은 애
를 뱄나.왜 배때기는 쑥 내밀고 오노.나라가 망했는데 지금도 양반이냐?"하며 자기보다 나이 많은 노인을 죄인 꾸짖듯 했
다. 심주부는 풀이 꺾이고 청중은 숙연했다. 그 자리에서 학교 세울 기성회가 구성되었다.
▣ 이동휘(李東輝,1872. . ~1935. . )
-1872년 함경남도 단천 출생
-1889년 18세 때 국관학교 입학
-1902년 참령(26세 때)이 되어 강화부 진위대로 부임(현,소령급),강화읍 잠두교회에 출석(박능일,김경일,권신일,
김우제 전도사 등을 만남.
-1904년 고종의 지원을 받아,강화읍 보창학교 설립(초대 교장 취임)
-1905년 3월 3일 강화 진위대장 사임.(고종황제를 알현한 후,민족 부흥과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듦.)
-1906년 조산 합일학교 설립 ,송해 하도리 보창학교 설립,월곳 광명학교 설립.
-1907년 진위대 해산과 더불어,흥천 보창학교 설립(초대 교장)
-1908년 석모도 부흥여학교 설립,-교동 동화학교 설립,오상리 보창학교 설립,동막리 동막학원 설립,주문도의 영생학교,
-1912년 만주 간도로 망명(독립운동에 전념함)
-1919년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취임
-1935년 시베리아에서 별세.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註25) <사진자료 19)>: '강화도 바울'
이동휘(李東輝,1873-1935)강화도 진위대장(鎭衛隊長) 재인용.
이와같이 강화 각 면은 이동휘씨의 강연과 눔물 한 번 떨어진 곳에는 학교와 교회가 세워졌다는 말이 유행되었다.』
명삼(明三)은 인근 마을인 상도면(上道面=현,양도면良道面) 조산리(造山里)에도 조산마을 교인 김광찬(金光璨)이 1906
년 조산합일학교(造山合一學校)를 세웠는데,이 학교가 경영난에 봉착 폐교 위기에 처하자 명삼(明三)은 조산동 유지인
진사(進士) 이규의(李珪儀)와 같은 가문의 교인인 이범일(李範一)을 끌여들여 학교를 다시 일으키고 '심양강습소( 沁陽
講習所)'란 이름으로 학교를 계속 유지시키기도 했다.
명삼(明三)은 형 명운(明云)과 함께 소루지 김씨 집안에서 새우잡이 배를 따라다니면서 성장하였다. 비록 배우지는 못
했지만 체력은 남달리 강건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결혼한 후 형 명운(明云)은 1906년 소루지를 떠나 문산리로 이주
윤기동(尹基東,1906년 문산교회 창립자)를 권면하여 예수를 믿게 하였고,그 외 16인의 신자를 얻어 속장으로 창립멤버가
되었다. 그러나 1097년 8월에 교회에 큰 위기가 닥쳐왔다.바로 정미년 의병(강화 구국 의병대)사건으로 일본군 강화 수
비병 토벌대(일본군)이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교인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1910년 2월 일제의 교회 핍박(逼迫)이
점점 심해지자 낙심하여 30여 명의 교인이 절반 교회를 떠날 때 명운(明云)도 같이 출회했다.
명삼(明三)은 형 명운(明云), 곳창촌(고창촌) 김양권(金陽權) 등과 함께 내리 송강촌(소루지)에서 강화읍 잠두교회까
지 40리길을 걸어서 교회를 다녔다.그 때 이미 1902년 강화부 진위대 참령으로 부임(현,소령급)한 진위대장 이동휘(李東
輝)가 강화읍 잠두교회에 입교하여 '기독교야 말로 쓰러져가는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다'고 하면서 김우제 전도사를
방문해 지식인들이 대거 잠두교회에 모이고 있었다.강화읍 잠두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박능일,김경일,권신일,
을 비롯하여 육군자(六君子)라고 불리우는 전병규(양도 흥천교회 설립),김용하(양도 흥천교회 설립),유경근(劉景根,독립
운동가),윤명삼(尹明三,내리 두곡교회 설립),김광찬(金光璨,1906년 조산합일학교 설립 ),김양권(金陽權,고창교회 설립)
등이 교제를 하고 있었다.
당시 (1906년) 경성지방 관리 순행 선교사는 미국인 조원시(趙元時,George H.Jones,1867.8.14~1919.5.11)라고 문산
교회역사는 기록하고 있는데,인천 내리교회 「내리선교 130년 역사화보집」p.43~47에 의하면,
'1902년 5월에 존스는 신병요양차 일본으로 떠나면서……'(p.44),
'1903년 5월부터 1906년 7월까지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안식년을 얻어 미국으로 귀환했는데,'(p.47)
'1909년 6월 한국에서의 선교사직을 접고 미국으로 영구 귀국했지만……'(p.43)
으로 기록하고 있다.
인천 내리교회 역사기록이 정확하다고 인정할 때,존스는 1902년 5월 일본으로 떠나고,1903년 5월부터 1906년 7월
까지 본국으로 안식년을 얻어 귀환했다면,내리 소루지(松崗村) 명삼(明三)의 사랑채에 들려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여
김양권(金陽權,고창교회 설립자) 과의 조우(遭遇)가 있었던 때가 1892년 제물포 선교관리책임자로 부임하여 상주(常駐)
부부선교사로 제물포에 내려와 인천 내리교회를 전초기지로 삼아 인천,강화,부평,부천,황해 연안과 해주(海州),남양(南
陽)등지의 선교에 힘쓴 결과 1892년부터 1903년까지 무려 44개 교회를 개척했다.*註27)
*註27) '내리선교 130년 역사화보집'(내리교회,2015.12.27) p.43
① 1902년 5월이전(일본으로 신병요양차 떠나기 전) ② 1906년 8월부터~ 1909년 5월 사이가 될 것 같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44개 교회개척의 결실기였던 때에 활발한 강화 선교방문이 있었을 가능성으로 보아 ① 이 유력할
것 같다. 존스의 소루지 방문이후인 1903년부터 윤명삼(尹明三) 자택 기도처에서 정기 예배가 이루어 지고,고창교회
설립자 김양권(金陽權,1887년生)도 그 때부터 교회 설립의 꿈을 품고 기도에 열을 올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3]복음(福音)의 주역(主役)들 >
▣윤명삼(尹明三) ▣이동휘(李東輝) <끝>
* 註24) <사진자료 23>1900년 대 송강촌 122번지 윤명삼 씨가 살던 기도처 자리(잠두교회 다니면서 존스
(G.H.Jones)선교사의 방문을 받고 김양권(金陽權) 씨 등과 함께 기도하며 예배드리던 집.
맨 앞 사랑채가 기도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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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집필 :김재규(金在圭)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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