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슬’은 기적 같은 노래다. 1970~80년대 내내 암흑기를 겪다 1987년 해금된 뒤 시대를 초월한 국민가요로 우뚝 섰다. 어느 때에는 애국가보다도 아름다웠다던가. 한국 가요사에 길이 남을 걸작 ‘아침이슬’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찢어진 악보, 운명의 시작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1971년 봄, 어느 작은 음악회에서 양희은은 우연히 김민기의 기타 반주로 어떤 이가 부르는 ‘아침이슬’을 처음 듣게 된다. 노래가 너무 마음에 들어 꼭 배우고 싶었는데, 김민기의 같은 학과 학생이 공연 뒤 버려져 있던 악보를 급히 찾아다 주었다는 것이다. 김민기가 찢어서 버린 악보를 가져다 열심히 연습한 양희은의 순수함이 아니었던들 ‘아침이슬’은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양희은은 자신의 첫 앨범에 주저 없이 ‘아침이슬’을 넣고 싶었고 김민기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바야흐로 대중음악사의 새로운 문을 열게 될 싱어송라이터 김민기와 한국을 대표하는 가객이 될 양희은의 극적인 연결고리가 바로 ‘아침이슬’이었던 것.
무슨 영화나 드라마 같은 얘기지만 사실이다. 지난 4월 출간된 양희은의 에세이집 <그러라 그래>에 다 나온다. ‘아침이슬’은 꿈에도 몰랐던 가수의 길을 양희은에게 인도했다. 아니라면 그의 인생은 한참 달랐을지 모른다. 정말 운명이란 게 있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찢어진 조각들을 정성스레 다시 붙인 그 악보를 지금껏 간직하고 있는 양희은은 말한다. “훗날 ‘아침이슬’과 내 이름이 한데 묶여 50년 넘게 따라다닐 줄이야….”
박해와 시련의 역사
김민기가 작사·작곡한 ‘아침이슬’이 맨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1971년 6월 양희은의 첫 음반 ‘고운 노래 모음’을 통해서였다. 김민기가 클래식 기타로 받치고 시각장애인 천재 뮤지션 이용복이 12줄짜리 스틸 기타로 멜로디 파트를 담당했던 양희은의 ‘아침이슬’은 한국 통기타 음악의 연주를 한 차원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그해 하반기 김민기는 ‘아침이슬’을 손수 부르고 연주한 버전을 자신의 첫 음반에 수록한다. 시차가 불과 얼마 안 되지만 두 버전은 사뭇 다르다. 중저음으로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담담하면서도 숙연한 것이라면, 양희은의 ‘아침이슬’은 맑고 낭랑하면서도 단호한 목청으로 듣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진 것은 양희은 버전이다. 김민기의 1집 음반은 나오자마자 비명도 못 지르고 전량 압수됐기 때문이다. 1972년 봄, 김민기가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꽃피우는 아이’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를 불렀다가 경찰에 붙잡혀 간 뒤의 일이다.
‘아침이슬’은 1975년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한 유신 정부에 의해 아예 금지곡으로 낙인찍힌다. ‘태양이 묘지 위에 떠오른다’는 가사가 불순하다는 것이다. 붉은 태양이 북쪽의 최고 인사를 암시하는 것 아니냐는 억지 해석까지 나돌던 엄혹한 냉전 시대였다. 시중에 배포된 김민기의 모든 앨범은 폐기되고 노래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물론 다른 음반에서 ‘아침이슬’을 만날 수 있었지만 노랫말은 가령 ‘태양은 묘지 위에’가 ‘태양은 대지 위에’로 바뀌는 식으로 수난을 겪어야 했다.
질기디질긴 생명력
그런데 ‘아침이슬’에는 잡초 같은 생명력이 있었다. 어두운 시대에 이 노래가 지닌 맑은 정서와 순수한 정신에 매료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무수한 광장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불린 것이다. 정부는 음반을 폐기하고 방송도 통제했지만 이 땅 장삼이사들의 입은 결코 막지 못했다. ‘아침이슬’은 시대를 고민하고 아픔을 나누는 이들이 모인 거리로 퍼져 나갔다. 1970년대를 넘어 80년대, 90년대에도 사람이 있고 기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불렸다. 1987년 6월 항쟁 때도,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2016년의 광장에서도 100만이 넘는 군중들은 한목소리로 ‘아침이슬’을 불렀다.
대중매체에서는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서 마침내 하나가 된 노래. ‘아침이슬’은 한국 현대사의 격랑과 함께하면서 시련과 박해를 딛고 역사가 됐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고 후배 뮤지션들이 존경과 상찬을 보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침이슬’의 행로가 그 노랫말의 운명을 닮았다는 자체가 가슴 벅찬 일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아침이슬’에 ‘대한민국 명예 국가’라는 칭호를 붙인다.
왜 명곡인가
‘아침이슬’은 빛나는 은유적 가사와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이 만나 인간의 결연한 의지를 드높이는 노래다. 먼저 ‘긴 밤 지새우고’로 시작해서 ‘나 이제 가노라’로 끝나는 노랫말의 높은 문학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간주를 전후해 반복되는 가사는 “서정성과 서사성, 여성성과 남성성이 마치 좌우의 날개처럼 힘차게 날갯짓”(박재철) 한다. “긴 밤을 지새웠지만 마침내 자신을 적시는 슬픔과 화해한다는 노랫말은 높은 시적 경지”(카터 J 에커트)에 닿아 있다. 김민기의 모든 노랫말이 그렇듯 한국어의 어감, 한국인의 정서가 담긴 말맛을 고민한 결과물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보편성까지 획득하고 있다는 사실.
선율과 가락 역시 뛰어난 예술성으로 빛난다. 포크의 품 안에 있지만 클래식 등 다양한 형태로 변주할 수 있는 화성 구조는 당시로선 혁신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미지 전개와 음악적 구성의 탄탄함은 최고의 대중가요라는 칭송을 듣기에 부끄럽지 않다.”(이영미)
작곡 구조를 보면, 유행가의 일반적인 A-A′-B-A 흐름에서 벗어난 A-A′-B-C의 형태다. 다장조인데도 불안정한 파음으로 시작하는 파격, 못갖춘마디로 시작하는 A, A′와 다르게 B에서 한 박자 쉬고 들어가는 데서 오는 선율의 비장미, 절정(B) 이후 메인 주제(A)로의 복귀가 아닌 새로운 주제(C)로의 비상까지, 전형적인 음악 구조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C는 특히 김민기의 다른 노래에서는 볼 수 없는 고음역의 절정부를 열어젖힌다. 마무리 역시 안정적인 음으로 끝나지 않은 채 열려 있는데, 그것이 묘한 심리적 해방감을 안긴다. “그 시절 대학가에서 학생들이 이 곡을 자신들의 노래라고 생각하며 사랑한 것은 바로 곡의 구조에 있었다.”(강헌) 작곡 구조 자체가 이미 극복과 비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노래 부르는 입장에서도 음색과 성량이 안정된 상태로 가장 잘 발휘될 음역대와 멜로디를 갖고 있다.
어두우면서도 우아하고,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아침이슬’. 이 아이러니를 1970년대 군사정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아침이슬’의 두 가치, ‘서정성’과 ‘저항성’을 모두 간파했던 듯하다. 처음엔 시적인 가사의 우수성을 인정해 ‘고운 노래상’을 안겼다가 불과 2년 뒤 금지곡으로 지정해 매장시켰기 때문이다.
음악 예술의 참된 의미
‘아침이슬’은 김민기가 미대생 시절 반지하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만든 곡이라고 한다. 하지만 발표 후에는 이 노래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절절하게 부르니까, 그럼 저 사람들 노래지요.” 양희은도 마찬가지다. “한참 후에야 알았어요. 백만 명이 각자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부르는데… 그때 느꼈어요. 아, 이건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사실 김민기의 음악엔 정치적 구호가 없다. 부정을 규탄하는 세찬 목청도 없다. 들리는 것은 그저 삶의 절박한 신음이고 영혼의 애처로운 속삭임이다. 민주-독재, 체제-반체제 같은 도식으로 가둘 수 없는 다른 차원의 말과 곡조가 그 안에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음악을 ‘저항’의 자장 안에만 가두는 건 온당한 평가라 할 수 없다(김창남).”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 대목은 대중음악 수용자들의 힘이다. 많은 사람들이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아침이슬’을 자신의 세계관을 담은 자신의 노래로 받아들였다. “음악이 창작자의 의지를 떠나 듣는 이들에 의해 재해석되고 의미가 새롭게 부여될 때, 음악은 다시 태어난다.”(김형찬)
한 청년이 방에서 읊조리던 노래가 마침내 사람들을 움직이고 시대를 바꿨다는 것. 참으로 장엄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아침이슬’은 누군가의 귀속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이제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조그만 물방울이 계속 흘러 바다가 됐잖아요.”(박학기)) 그래서 수많은 가수와 시민들, 누가 불러도 힘이 솟고 가슴 뜨거워진다. ‘아침이슬’은 대중가요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 가장 숭고한 사례다. 노래의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