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쿠르 대회
아마도 이 콩쿠르 대회 라는 말을 아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50대가 넘는 나이가 되어있을 것이다. 도시에서 어릴 적부터 거주했던 사람이라면 나이에 무관하게 이 콩쿠르 대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티브이가 귀하던 시절에 이 콩쿠르 대회는 볼거리 중의 볼거리였다. 콩쿠르 대회는 마치 잔치가 열리는 것과 같이 대단한 성황을 이뤘다. 대회가 열리기전부터 마을의 곳곳에는 벽보가 붙어 사람들의 마음을 더 설레게 했다. 나는 이콩쿠르 대회에 두 가지의 추억을 갖고 있다. 하나는 내가 심사를 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게 사촌형님이 이 콩쿠르 대회 에서 여자 하나를 만나 데려온 것이다.
안중이라는 서부사개면의 중심지에서 열린 콩쿠르 대회는 닫 두 번뿐이었다. 첫 번째는 시내의 한 공터에서 열렸고, 두 번째는 성공회의 마당에서 열려다. 두 번의 이 대회는 아직까지도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듯 기억에 생생하다. 왜냐하면 첫 번째 콩쿠르 대회가 열릴 때 내가 운영하는 전파사가 찬조를 했다는 방이 마을 곳곳에 붙었고, 내가 심사위원으로 대회를 주관했기 때문이다. 내가 찬조한 것은 당시에 귀했던 앰프와 스피커인 유니뜨 라는 확성기 였다. 내가 심사를 본 것은 첫 번째 대회에서 였다. 실제 대회를 주최한 사람은 누군지 기억이 안나지만 지역의 유지인 것 같았다. 그래야 허가가 나기 때문이다. 그 주최자는 모든 권한을 내게 일임했다. 아마도 사람들 대부분이 콩쿠르 대회에서 일등을 했다면 대단한 노래의 실력자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일등부터 삼등까지는 이미 수상자를 결정해놓고 대회는 진행되기 때문이다. 등수를 정해놓고 점수를 꿰어 맞추는 것은 아마도 지금의 컴퓨터나 가능할 만큼 복잡한 것이었다. 그 점수를 매기는 권한이 나에게 있으니 힘들어도 해내야 했다. 그때 만해도 이 콩쿠르 대회에서 수상을 받는 다는 것은 하나의 영광이며 자랑이었다. 사촌동생이 나를 찾아와 10등이라도 좋으니 상을 받게 해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난 그의 말대로 10등에 명단을 넣어줬다. 3등까지는 이미 주최 측에서 결정을 했지만 나머지 4등부터 10등까지는 내 수중에 달려있는 것이다. 당시에 당장 가구로 데뷔해도 될 만큼 노래 실력이 대단한 여성이 한명 있었다. 관객 모두가 그녀가 일등을 할 것이라 입을 모았다. 하는 수없이 5등으로 입상을 시켰다. 이 콩쿠르 대회가 열린 안중은 서부 사개면의 중심지라 사람들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장장 열흘 동안 진행된 이 콩쿠르 대회에서 심사를 본 이후에 내 얼굴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스물셋, 이 젊은 나이에 전파사까지 하니 많은 여자들이 가게까지 찾아왔다. 심지어 어느 여자는 집까지 찾아와 하는 수없이 밤길을 걷다가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 여자는 오늘 밤은 집에 안 들어간다고 노골적으로 유혹을 하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좋은 현상이라고 해야 할지 나쁜 현상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나의 인기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두 번째 콩쿠르 대회가 열린 곳은 성공회의 공터에서 였다. 아마도 지금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겠지만 그때는 넓은 마당이 있었다. 내게는 많은 사촌 형들이 있었다. 그중 제일 큰집이 되는 곳의 형님 한뷴이 이 콩쿠르 대회를 가더니 어떤 여자 하나를 데리고 내 집으로 와서 한동안 살게 되었다. 그런 것을 동거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내가 쓰던 거너 방을 형에게 빼앗기고 안방으로 쫒겨 났다. 형은 한참 때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밤새도록 그 여자와 교성을 질러대서 거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조용해지면 그때서야 잠을 잤다. 아무래도 형수에게 무언가 약점이 있어서 사촌형님은 집으로 못데려가고 우리 집에 머무른 것 같았다. 그 형수님은 얼굴도 예뻤고 키도 늘씬하니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큼 미모가 빼어났다. 뿐만 아니라 부지런해서 아침밥상도 차려 내오고 잡다한 집안일도 척척 해내었다. 나는 그 형수가 좋았다. 성격도 서글서글해서 누구에게나 다가가기가 쉬운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어 달도 안 된 어느 날 그 형수님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사촌형 역시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이후 나는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며 살았는데, 그 세월이 어언 이 십여 년이나 되었다. 고향을 떠난 지 오래 되다보니 친척들 모두가 궁금했다. 나는 옛날의 생각이 나서 수소문 끝에 이 형님댁을 찾았다. 집은 길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서 기척을 내니 어느 여자 분이 문을 열어주었다. 말을 건네지 않아도 형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형수가 되는 분은 엄청 키가 작았다. 미모도 별로 였다. 애들이 둘 있는 것으로 기억된다. 형의 안부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 이런. 사람의 운명이란 게 이렇게 허무한 것이구나. 나는 옛날에 우리 집에서 콩쿠르 대회에서 데려온 여자와 같이 살던 때가 문득 그리워졌다. 사촌 형님은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콩쿠르 대회는 물론 그 여인과 함께 예전의 설레었던 그 모습 그대로 내 가슴 안에 안타까움과 그리움으로 남아있다.